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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고한 첨탑, 그 위에 선 블랙핑크
블랙핑크(BLACKPINK) 'Born Pink'
커버에 그려진 뱀 이빨만큼이나 여전히 날 서있고 배고픈 <Born Pink>는 다음 먹이를 정확히 포착한다. (2022.11.16)
아이돌의 아이돌, 블랙핑크의 원대한 걸음은 아직 진행형이다. '뚜두뚜두'가 빌보드 차트에서 첫 발자국을 남긴 이래로 꾸준히 펼쳐온 로컬라이징 전략은 어느덧 후발 주자라면 반드시 참고해야 할 성공 신화가 되었고, 그들이 내건 걸크러시 이미지는 K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키워드로 자리 잡았다. 막강한 팬덤 파워와 브랜드 협업으로 쌓아 올린 견고한 첨탑. 그 위에 선 블랙핑크는 유유히 동시대 경쟁자들을 관망한다.
커버에 그려진 뱀 이빨만큼이나 여전히 날 서있고 배고픈 <Born Pink>는 다음 먹이를 정확히 포착한다. 팝 시장을 고려한 영어 위주의 가사, 안정적인 반응을 위해 꾸린 무난한 작법 체계, 선두자 역할에 걸맞은 트렌드 반영과 화려한 뮤직비디오까지. 얼개만 본다면 전작에 이어 굳히기에 돌입하려는 평범한 후속작처럼 보인다. 다만, 조금 더 자세히 바라보면 관점은 달라진다. 이빨 앞에 놓인 것은 먹음직스럽게 차려진 화제의 상찬이 아닌 바로 스스로의 목덜미기 때문이다.
모든 수록곡이 그간 커리어의 아류 수준에 가깝다. 그룹의 고유 정체성과 팝스타 지향성을 적정선에서 조율한 전작 <The Album>에서 더 강한 상업적 노선을 취하자 기존 특색이 퇴색된 셈이다. 모든 히트곡을 거푸집에 넣어 한 데 녹인 선공개 타이틀 'Pink venom'을 보자. 익숙한 스트링과 브라스 사운드, 둔탁한 트랩 비트, 매번 비슷한 파트 분배와 빠르게 고조되는 부분 모두 그 여느 때보다 기시감이 짙다. 나름의 킬링 파트를 위해 숨 가쁘게 '그라타타'를 연호하는 지점은 그 괴팍한 센스에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다.
최근 K팝에서 시도되는 클래식 접목의 결과물인 'Shut down'은 파가니니의 '라 캄파넬라'를 소재로 삼았으나, 최소한의 완급 없이 원곡의 포맷을 그대로 가져간 탓에 3분가량의 광고 음악으로 전락하고 만다. 게임 회사와의 콜라보 하에 추진되어 메타버스 개념을 도입했지만 공허함만 남는 EDM 트랙 'Ready for love' 역시 급하게 추진된 느낌을 감출 수 없다. 유행을 위시한 기획에 자주 쓰던 재료만 얼추 섞은 뒤 신곡으로 결재안을 올린 양상이다.
복구처가 되었어야 할 중반부의 밋밋함도 치명적이다. 정상급 아이돌의 여유로운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 차분하게 잡은 작법과 영어 가사가 되려 창의성의 부재로 작용했다. 한 마디로 '케이'스러운 매력을 풍기지도, '팝'처럼 대중적이지도 않은 구간이다. 자극적이더라도 확실한 인상을 남기는 데 능했던 과거와 달리 시종일관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기에 간극은 더욱 크다. 주력 무기를 가져왔으나 차별성이 부족한 'Typa girl', 팝 록 계열로 청춘 송가 'Lovesick girl'의 성공 사례를 이어가려는 'Yeah yeah yeah', 꽤 성공적인 스타일 변화에도 뚜렷한 멜로디나 완급이 없어 특색 없는 발라드에 그치고만 'The happiest girl'이 그렇다.
현지화를 택했다면, 이보다 더 좋은 팝은 많다. 오리엔탈리즘의 신비를 마케팅으로 삼은 것이라면, 그 의도부터 편협함이 가득하다. 화려한 비주얼 라이징과 스타일만을 노린 것이라면, 자신을 가수보다도 협찬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양방향 발전 가능성을 모두 내포하던 하이브리드작 <The Album> 이후 2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블랙핑크의 파괴 전차는 여전히 같은 곳에 머무른 듯 보인다. 겸손한 정착과 당당한 선도, 그 어디에도 명쾌한 해결책을 남기지 못한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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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