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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라, 그리고 알려라 : 슬기 <28 Reasons> 티저 영상
케이팝에서 탄생한 티저의 정석
슬기의 '28 Reasons' 티저는 그런 의미에서 슬기라는 인물이 가진 익숙함과 새로움을 동시에 담아낸 영리한 영상이다. (2022.09.15)
한국인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가장 많이 듣는 말 가운데 '남들 하는 만큼만 하라'가 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와 함께 대한민국 남 눈치 시리즈의 양대 산맥으로 자리 잡은 이 문장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을 어떻게든 튀지 않게, 무채색 그라데이션으로 조성한 일등 공신이다. 이 정의는 케이팝 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꿈틀대는 역동의 문화 아이콘 케이팝의 근본에 놓인 사상이 '남들 하는 만큼'이라니 하품이 날 정도로 지루하지만, 한편 반박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누구보다 빠르게 난 남들과는 다르게는 다음 문제다. 음악과 퍼포먼스의 완성도에서 자체 제작 콘텐츠 개수와 SNS 업로드 빈도수까지, 수년째 과포화 상태를 유지 중인 이 시장은 남들만큼 하지 않으면 당장 도태의 절벽 앞에 서게 되는 운명을 타고났다. '남들만큼'은 물론 '빨리빨리'도 해야 하는 민족답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같은 빽빽한 TO DO 리스트 상단에 글자 하나가 선명하다. 티저(teaser)다. 케이팝 가수라면 앨범 발매 전 누구나 티저를 공개한다. 케이팝 가수 가운데 티저가 없는 그룹은, 단언컨대 없다. 케이팝 기본 중의 기본, 티저의 목적은 간단하다.
'모월 모일에 앨범이 발매됩니다.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시장이 형성된 이래 단 한 번도 여유로운 적이 없었던 바쁘다 바빠 케이팝 사회에서, 티저는 새 앨범과 활동에 대한 주목도와 화제성을 높이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그러나 필수의 질과 양, 방식과 규모는 천차만별이다. 뮤직비디오를 편집한 짧은 영상이나 앨범의 하이라이트 멜로디 편집은 최소한의 의무 방어다.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는 제작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눈에 띄는 티저를 만드는 데 혼신의 힘을 쏟는다. 컴백 날짜가 박힌 이미지 하나도 허투루 내지 않는다.
오는 10월 발매를 앞둔 앨범 <28 Reasons>는 그룹 레드벨벳의 멤버 슬기가 데뷔 이후 처음 발표하는 솔로작이다. 앨범 발매까지 아직 3주 정도가 남은 상황, 다소 이른 영상이 하나 떴다. 음산한 휘파람 소리와 명도 낮은 화면, 아무도 없는 수영장에서 손톱을 깎는 사람이 있다. 슬기다. 텅 빈 공간을 공명하는 손톱 깎는 소리를 신호로 몇 가지 상황이 교차한다. 교복을 입은 한 무리의 여자아이들이 슬기를 중심에 두고 빙글빙글 돌며 의문스러운 동작을 반복한다. 한 소녀가 거즈로 슬기의 눈을 가린다. 슬기는 유리창에 알 수 없는 액체를 들이붓다가는 다음 장면에서 갑자기 화면을 향해 총을 겨눈다. 물속으로 첨벙 빠져드는 누군가의 실루엣과 폭발하는 차를 배경으로 이어폰을 끼고 어딘가로 다급히 떠나는, 누군가에게 쫓기듯 복도를 정신없이 뛰어가는 슬기의 모습이 이어진다. 힌트 카드처럼 하나씩 뒤집어지는 이미지의 편린이 빠르게 교차하다 모든 것이 사라진 곳. 흥얼대는 여자 목소리를 배경으로 측면을 바라보던 슬기가 이어폰을 빼며 서늘한 시선으로 정면을 응시한다. '28 Reasons' 그리고 'SEULGI'라는 이름이 붉게 떠오른다.
모든 것이 수수께끼투성이다. 다만, 알 수 있는 건 이 영상이 뜬 뒤 제작사가 언론에 배포한 '28 Reasons'를 제목으로 한 슬기의 첫 솔로 앨범이 10월 4일에 발매된다는 사실뿐이다. 이 모든 이미지가 어떤 관계성을 가지는지, 실제 앨범과는 어떻게 연결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기에서는 모르는 게 포인트다. 만약 이 티저의 주인공이 가요계에 처음 데뷔하는 가수였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슬기는 이미 활동 8년 차, 전 국민이 알고 있는 히트곡을 다수 보유한 유명 그룹의 멤버다. 심지어 2년 전 레드벨벳-아이린&슬기라는 이름으로 유닛 활동도 선보였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람. 그럼에도 또 다른 출발을 준비하는 이에게 가장 필요한 건, 지금까지 없던 새로움이다.
슬기의 '28 Reasons' 티저는 그런 의미에서 슬기라는 인물이 가진 익숙함과 새로움을 동시에 담아낸 영리한 영상이다. 레드벨벳에서 레드벨벳-아이린&슬기까지, 슬기가 가장 잘하고 또 오래 매만져온 이미지는 스릴러와 공포를 기반으로 한 섬뜩함이다. 레드벨벳의 두 번째 앨범 <Perfect Velvet>을 기점으로 본격화되기 시작한 이미지는 괴물을 연상시키는 기괴한 형태의 크레오그래피와 케이팝이 묘사할 수 있는 가사의 수위를 시험한 'Feel Good' 등의 노래를 포함한 유닛 활동까지 뚜렷하게 이어졌다. 동화로 치자면 어린이 동화 100선에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어딘가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안데르센의 『빨간 구두』나 그림 형제의 『헨젤과 그레텔』 같은 작품이었다. 케이팝 안에서도 유난히 독보적이라 손꼽혀온 이 이미지들이, 1분 28초짜리 티저를 통해 슬기의 얼굴 하나로 수렴되었다. 아직 내막을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모든 걸 파괴하고야 말 듯한 눈빛. 알 만큼 드러나 있고, 모를 만큼 숨겨져 있다. 잘 숨길 것, 그리고 그것으로 널리 알릴 것. 좋은 티저의 정석 같은 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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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케이팝부터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에 대해 쓰고 이야기한다. <시사IN>,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