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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훈의 리걸 마인드] 사빈코프를 변호함
<월간 채널예스> 2022년 9월호
신념은 사라지고 욕망만 남은 시대를 사는 우리들이 치열했던 혁명의 시대를 이해하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까. (2022.09.02)
폭우와 폭염이 어지럽게 오가던 지난여름, 지리산에 들어가 휴가를 보내고 왔다. 몇 권의 책을 들고 갔지만 제대로 읽은 소설은 『창백한 말』 한 권이었다. 소설가이자 혁명가인 보리스 빅토로비치 사빈코프(1879~1925)가 쓴, 모스크바 총독 암살을 실행하는 테러리스트의 이야기다. 소설은, 작가가 1905년 당시 모스크바 총독이었던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왕자 암살 사건의 성공 경험에 상당 부분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사빈코프는 테러리스트이자 작가였던 셈이다.
지리산에 가기 전 들렀던 전주에서, 오랜 친구인 소설가 강성훈이 운영하는 서점 '카프카'에 들러 이 책을 샀다. 그는 독후감에서 이렇게 썼다.
깊이 있는 문장은 어떻게 쓰는 것일까요? 흔한 답은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합니다. 그 부족한 부분이 인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지를 선택하는 건 그 사람의 인생과 삶의 방향에 따라 달라집니다. 책 선택뿐만 아니라 순간순간 삶의 선택들, 그리고 그 선택에 따른 책임, 그 무게감을 감내하는 것도요. '다독, 다작, 다상량'은 누구도 부정하기 힘든 답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다상량은 단순히 생각을 많이 하라는 뜻만은 아닐 것입니다. 사람의 방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창백한 말』 소설의 문장이 깊게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테러리스트들은 대의를 위해,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기 위해 살인을 계획하지만, 그 전에 도덕적 개인으로서 자신이 던진 질문에 스스로 답해야만 한다.(돌이켜보면 안중근도 이봉창도 누군가에겐 테러리스트였다) 왜 총독을 죽여야 하는가, 그 살인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바냐는 인류를 사랑하기에 살인하고, 표도르는 증오하기에 살인한다고 답한다. 하인리히는 사회주의라는 대의를 위해, 에르나는 사는 게 부끄럽기에 그들과 함께한다. 이들을 이끌고 있는 주인공 조지는 가장 냉혈한처럼 보이지만, 사랑과 살인 사이에서 번민하는 모습을 보이는 약한 존재다.
살인을 앞두고 있는 조지에게는 그가 사랑하는 여인과 그를 사랑하는 여인이 있다. 에르나는 조지를 사랑하지만, 조지는 옐레나를 사랑할 뿐이며 에르나의 사랑을 거절한다. 그러나 조지의 사랑 역시 불완전하긴 마찬가지다. 그가 사랑하는 옐레나는 이미 결혼한 유부녀이기 때문이다. 조지는 생각한다.
어쩌면 그녀는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남편도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녀는 오직 사랑만을 사랑하는지도 모른다. 오직 사랑 속에 그녀의 빛나는 인생이 있고, 사랑을 위해 그녀는 세상에 태어났고 사랑의 이름으로 무덤에 들어갈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할 때면 마음속에서 포근한 악의가 일어난다. _(156쪽)
그리고 조지의 동료 바냐가 말하는 사랑이 있다. 그는 사랑을 위해 살인하는 자다.
"그거 아나, 다른 사람을 위해 죽는다는 거, 사람들에게 자기 죽음을 바친다는 건 쉬워. 삶을 바치는 쪽이 더 어렵지. 매일매일, 일 분 일 분을 사랑으로, 살아 있는 사람 모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산다는 거 말야." _(45쪽)
이들은 사랑하는 자들이지만, 동시에 살인해야 하는 자들이다. "사랑한다면, 많이,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러면 살인도 할 수 있"(19쪽)는 것이며, "타인을 위해서 자기 영혼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기 때문에 "십자가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결단"(20쪽)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테러리스트의 길은 예수의 길과 다르지 않게 된다. 결국 "살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왜냐하면 사랑하기 때문"이다.(22쪽)
소설에서 살인은 두 번 일어난다. 실패들 끝에 마침내 성공하는 총독에 대한 테러가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지가 말하는 슬픔과 모욕의 날에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건이다. 조지는 쿠즈네츠키 다리를 걷다가 우연히 옐레나의 남편을 마주친다. 그리고 그에게 결투를 요청하고 그를 권총으로 살인한다. 조지가 총독을 공모하여 살인한 것은 테러의 이름으로, 혁명을 위한 것이었지만, 옐레나의 남편을 살인한 것은 오직 조지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조지는 "죽이고 싶어서 죽였다. (중략) 누가 나에게 와서 신념을 가지고, 살인해선 안 된다, 살인하지 말라고 할 것인가? 누가 감히 돌을 던질 것인가? 경계선도 없고 차이점도 없다. 어째서 테러를 위해 죽이는 것은 좋고, 조국을 위해서라면 필요하고, 자신을 위해서는 불가능한가? 누가 내게 답할 것인가?"(170쪽)라고 한다. 그러나 조지는 옐레나의 남편을 살인한 후 옐레나에 대한 갈망도 사라진다. "내가 쏜 무뢰한의 총탄이 사랑을 태워버린 것"이다. 조지는 옐레나가 어디에 있고 어떻게 지내는지 모른 채 모스크바를 떠난다.
아마도 조지는 자기 죽음을 바칠 수 있었지만 삶을 바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공지영의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인간에 대한 예의』)에는 조지와 같은 고민을 했던 인물이 등장한다. 비합법 운동 서클에서 만난 남자 선배를 사랑하게 된 후배는 선배를 향해 "난 목숨을 걸 수도 있어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몇 년의 시간이 흐르고 사랑도 옅어졌을 즈음 여자는 깨닫게 된다. 목숨을 걸 수 있다고 말했지만, '일상을 걸 수는 없었다'는 것을. 자잘한 나날들을 건다는 건 목숨을 거는 일보다 더 힘들다는 것을.
『창백한 말』의 작가 사빈코프는 삶의 끝까지, 저항하는 혁명가로 삶을 살아냈다. 그는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볼셰비키의 권력 독점에 맞서 싸웠으며, 1920년에는 소비에트 정부가 폴란드를 침공하자 바르샤바로 달려가 폴란드를 위해 싸웠다. 1924년에는 소련 비밀경찰이 기획한 함정에 빠져 러시아로 입국하려다 체포되었고 다음 해 감옥에서 사망했다.
조지와 바냐, 표도르와 하인리히, 에르나는 모두 신념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은 역사를 밀고 나아간다는 의지가 있었고,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어떤 사상이나 생각을 굳게 믿으며 그것을 실현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신념은 사라지고 욕망만 남은 시대를 사는 우리들이 치열했던 혁명의 시대를 이해하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까.
이 서늘하고 뜨거운 소설을 읽었던 산청 지리산 계곡은 골이 깊었다. 한여름에도 해가 빨리 지고 밤엔 한기마저 느껴지는 곳이었는데, 남원이나 구례에서 올랐던 계곡과는 또 다른 느낌을 주었다. 이 깊은 계곡이 빨치산들에게 숨기 좋은 은신처가 될 수 있었던 이유다. 한국 전쟁 이전부터 무려 15년 가까운 시간을, 자기 신념을 지키려 했던 '테러리스트들'이 그래서 이곳에 오래 머물 수 있었을 것이다.
지리산을 내려오는 길에 산청군이 운영하는 '지리산 빨치산토벌전시관'을 들렀다. 전시관에서 한 남자를 향한 사랑 때문에 빨치산이 되어 지리산에 입산하고 결국 총살당하는 여인의 이야기와, 1963년 11월 12일 마지막 빨치산으로 생포된 정순덕을 읽었다. 정순덕은 생포된 후 대구교도소에서 무기 징역을 선고받고 22년의 복역 끝에 1985년 8·15 특사로 풀려났다고 한다. 그녀는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세례명 '정카타리나'로 살다가 2004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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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그만두는 법』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