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부를 쓰는 이유

매일 돈을 생각하고 살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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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생각하는 시간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도 돈, 시간을 판단하는 기준도 돈이 된다. (2022.02.18)

언스플래쉬

새해를 맞아 항목을 세분화한 가계부를 쓰기 시작했다. 총 수입과 지출만 확인하던 것에서 더 나아가 어디에 돈을 쓰는지 구체적으로 보고 싶었다. 가계부를 쓸 때마다 예상한 것보다는 많이 쓴다는 걸 알게 되지만, 아는 데서 멈춘다. 

단순히 돈의 드나듦을 기록한다고 돈이 아껴지진 않는다. 물론 작정하고 돈을 아낀다면야 방법은 있다. 보험비와 통신비 등 고정비를 줄이고, 취미로 배우는 레슨을 그만두고 외롭고 고단한 독학의 길을 걸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아끼면 돈은 모인다. 다만 몸이 좀 더 고단해지고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기분이 든다. 돈과 어떤 소중한 것들을 바꾸는 기분이 든달까.

늘 나는 돈에 관심이 많았고, 어렸을 때부터 돈을 쓰는 걸 무서워했다. 흔히 과소비하는 습관은 나쁘고 아끼는 습관은 좋다고 생각하지만, 돈에 아등바등한 것도 그리 좋은 태도는 아니었다. 당장 돈이 부족하다는 불안감이 들면 식비부터 줄였다. 9,000원짜리 메뉴 대신 6,000원짜리 메뉴를 고르고, 식당에 가는 대신 편의점을 선택했다. 지금은 그렇게까지 하진 않는다. 그렇게까지 아끼지 않아도 사람은 살아지고, 돈을 아끼려다가 병원비가 훨씬 더 많이 들어간다는 걸 몸으로 체득하고 나서야 배웠다.

몇 년 전에는 돈 생각이 이상한 곳으로 흘러서 자산관리사 시험을 준비한 적이 있다. 문제집을 10만 원어치 사고 시험을 등록해놓은 다음 공부를 안 해서 시험을 못 보러 간 것도 '준비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말이다. 아직 문제집은 책장에 꽂혀 있고 이제는 시험 유형이 다 바뀌어서 쓸데없는 종이 뭉치가 되었다. 생각해보니까 식비 아껴서 모은 돈으로 보지도 않을 시험에 돈을 쓴 게 아닌가? 저 돈이면 매일 국밥 특대로 시켜 먹었겠다.

맨 처음 자산관리사 자격증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도 지금 생각하면 웃기고 낯부끄럽다. 나보다 적게 버는 친구들이 나보다 많이 쓰는 것 같아서 너무 안타까웠다. 자격을 취득하면 친구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가만히 있으면 절반은 갈 텐데, 자격증도 못 땄으면서 잔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지 말고 청약을 들어라, 소득 일부분은 나중에 사고가 생겼을 때를 대비해서 비상금으로 모아둬라. 너 그렇게 살면 안 된다. 저축! 저축! 카드 리볼빙을 쓰면 안 된다! 네, 젊은 꼰대가 여기 있었습니다. 오마이갓 리틀 재테크 히틀러 워즈 히얼. 

돈이 많다/적다를 판단하는 기준은 상대적이다. 나보다 잘 벌고 '더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는 친구들과 있으면 나는 지극히 없는 사람이 되고, 박봉과 과로에 시달리다 자주 아파서 회사를 그만두는 친구들과 있으면 나는 순식간에 기득권이 된다. 

모두가 코인과 주식과 부동산에 매몰되었던 시기가 한풀 꺾인 것 같다. 돈이 모이는 즐거운 기분을 만끽한 사람은 앞으로도 그 기분을 다시 느끼기 위해 돈을 모을 것이다. 하지만 돈을 모으는 게 기쁘지 않은 사람도 있고, 사람마다 만족을 주는 경제적 자원의 양과 모을 수 있는 자원의 양도 다 다르다. 살아온 환경과 기준이 다른데 내 기준으로만 생각하면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가 된다.

조지프 라운트리 재단의 연구팀이 영국 두 도시의 가장 가난한 동네에 위치한 공공시설에서 생활하는 사람들과 집단 토론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토론 내용에는 가난한 사람이 동정받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이 있었다. 토론에 참여한 가난한 사람들은 음식을 살 돈조차 없으면서 신상 휴대폰이나 최신 텔레비전을 산 가족 이야기를 했다. 게다가 비슷한 이야기가 토론하는 동안 계속해서 나왔다. 사람은 재정 상태에 따른 적합한 소비 금액에 대한 강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 생필품을 살 여유도 없으면서 일반적으로 사치품이라고 생각하는 물건을 사면 사람은 특히 화를 낸다.



전체적으로 상당수의 사람이 가난이란 그저 정신만 차리면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돈 걱정이 무엇인지 모르는 부자만이 아니다. 연구에 참여한 사람 중에 그리 부유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_『돈의 힘』, 210~211쪽


돈을 생각하는 시간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도 돈, 시간을 판단하는 기준도 돈이 된다. 나는 친구들의 재정 상태를 내 기준으로 판단하고 오지랖을 부린 거였겠지. 미안하다 친구들아. 너희를 함부로 판단했단다. 용서는 못 받겠지만 이건 돈이 시킨 거지 내가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어...

가계부를 썼던 이유는 스스로 돈에 더 관심을 두기보다 돈에 덜 관심을 쏟고 싶어서였다. 가계부를 쓰는 시간만 돈을 생각하고 나머지 시간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이번 글도 스스로 다짐하기 위해 썼다. 돈은 중요하다. 하지만 매일 돈을 생각하고 살지는 말자. 돈을 지배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돈에 지배당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 오늘 점심은 도시락을 싸 왔다. 저녁에는 국내산 콩으로 만든 두부를 사자. 술은 덜 먹고 너무 오래 일하지 말자. 가계부를 쓰는 순간에는 이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겠지만, 그 순간만 생각하고 나머지는 잊어버리자.



돈의 힘
돈의 힘
클라우디아 해먼드 저 | 도지영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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