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 놀이터

[손보미의 오늘밤도 정주행] 침대에서 너무 빨리 나온 사람 - 윌 앤 그레이스

<월간 채널예스> 2022년 2월호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무언가를 깨달았다고, 이 실수와 고통으로부터 무언가를 분명히 배웠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언제나 그런 걸까? (2022.02.07)


<윌 앤 그레이스>의 4 시즌, 일곱 번째 에피소드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결혼을 약속한 남자와 결국 헤어짐을 선택한 그레이스는, 너무 많은 상처를 받은 나머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있기만 한다. 그레이스의 친구인 윌과 카렌, 그리고 잭은, 며칠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는 그녀가 너무 걱정되어서 더 이상 그냥 두고 볼 수 없다고 결정하고 그레이스의 방으로 처들어간 다음, 그녀를 억지로 욕실로 데려가 샤워기 물로 적신다. 그러자 그레이스는 울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얘들아, 좋아, 멈춰, 멈추라고! 있지, 내가 너희들처럼 강하지 못해서 미안해. 나도 그러고 싶지만 잘 안돼. 윌, 7년간의 사랑이 너를 떠났을 때,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 매일 지내야 했지. 난 그렇게 못하겠어. 아마 난 그렇게 되면 죽을 거 같은 거야. 그리고 카렌, 당신은 뒤에서 봐주는 남편이 감옥에 있고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죠. 제가 당신이라면 완전히 엉망이 되었을 거에요. 그리고 잭...넌 정말 쾌활해. 서른두 살이나 먹은 연기자이자 가수로서 수백만 명과 관계를 가졌지만 아무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았지. 나도 그렇게 하고 싶지만 할 수가 없어. 난 너희랑 달라. 그냥 너희와는 다르게 처리할 뿐이야. 그러니, 제발 침대로 돌아가서 내가 어떻게 할 줄 아는 방법으로 처리할 수 있게 해줘."

이렇게까지 길게 인용한 이유는 이것만큼 <윌 앤 그레이스>의 인물들-윌과 그레이스, 그리고 잭과 카렌-을 축약해서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은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잘나가는 변호사에 부족할 것 없는 게이인 윌, 갑부 남편을 두고 남에게 명령하기를 좋아하며 자신을 즐겁게 하는 것이라면 뭐든지(술, 명품쇼핑, 성형, 심지어 이런 대사도 있다. “그레이스, 나 어제밤에 통 못 잤는데, 그게 당신 걱정을 해서인지, 아니면 내가 계속 복용한 멕시코산 암페타민 때문인지 모르겠네?”)거리낌 없이 하고야 마는 카렌, 이 세상에서 자신보다 뛰어난 스타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내킬 때마다 춤추고 노래하는 잭. 하지만 그레이스의 말처럼 그들의 인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런 식의 실패와 실수, 실망과 좌절이 쑥 하고 얼굴을 내밀고 있다. 물에 잔뜩 젖은 채로 침대로 돌아간 그레이스에게 윌은 그레이스의 말이 맞다고, 자신은 침대에서 너무 빨리 나온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혈연으로 맺어지지는 않았지만)가족 이상의 끈끈한 관계를 가진 뉴요커들의 일상을 다루는 드라마는 꽤 있지만 <윌 앤 그레이스>의 인물들처럼 이렇게까지 다방면에서 우왕좌왕하고, 감정적으로 대처하고, 실패와 실수를 거듭하는 경우는 잘 없다. 잘못된 선택과 실수, 그다음에 고난, 고난 뒤의 깨달음과 교훈, 그리고 찾아오는 또 다른 실수와 잘못된 선택의 순간, 고난, 고난 뒤의 깨달음, 그리고…(무한 반복). 어떻게 보면, 우리의 삶은 실제로 이런 식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깨달았다고, 이 실수와 고통으로부터 무언가를 분명히 배웠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언제나 그런 걸까? 

<윌 앤 그레이스>의 마지막 시즌이라고 할 수 있는(이렇게 표현하는 이유는 8시즌으로 끝낸 이 드라마가 무려 11년이 지난 후 새로운 시즌으로 다시 찾아왔기 때문이다) 8시즌의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카렌은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남편이 살아있었고, 범죄조직과 연관된 일 때문에 몇 년 동안 자신을 속였음을 알게 된다. 그 사실에 분노한 카렌에게, 윌은 남편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며 카렌이 이제껏 살아오면서 괴로움을 피하게 위해 마음속에 쌓아둔, 많은 수의 벽돌을 허물어뜨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윌의 설득에 마음속 벽돌들을 차례로 지워가며 과거의 고통과 마주하던 카렌은 자신이 느꼈던 감정이 분노가 아닌, 슬픔과 외로움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다. 

하지만, 얼마 후, 카렌은 처음 겪게 되는 감정적 상황 때문에 또다시 분노를 느끼고, 윌에게 따진다. “몇 개의 벽돌을 빼내어 버리니까 빌딩 전체가 무너져 버렸어! 난 이렇게까지 감정에 노출된 적이 없었다고!” 윌은, 기억하기 싫은 일들을 기억하고,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치유될 수 있다고 카렌에게 말한다. 그러자, 카렌은 윌에게도 그의 인생에서 ‘벽돌을 빼낼 것’을 요구한다. 윌은 자신은 그런 것들이 삶에 다가오면 언제나 외면하지 않고 맞닥뜨리고 앞으로 나아갔다며 자신만만하게 벽돌을 빼내지만, 결국 자신은 삶의 실패-직장과 사랑-에서 도망치는 중이라는 것을 깨닫고 카렌보다 훨씬 더한 괴로움에 빠진다. 시즌 4에서 자신이 침대에서 너무 일찍 나온 사람이라고 말했던 윌은, 여전히 침대에서 너무 빨리 나온 사람으로 남아있는 셈이다. 결국 둘은 술을 진탕 마시다가,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벽돌을 다시 쌓아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저 벽을 세워두고 모든 감정을 그 반대편에 놔두어야 해요."

 하나하나 벽돌을 쌓고 감정들을 숨겨두던 중 윌이 카렌의 남편이 살아있었다는 사실은 아주 큰 벽돌로 가려야 할 것 같다고 밀하자, 카렌은 이렇게 대답한다. 

"아무래도 그 벽돌은 잠시 빼두어야 할 것 같아. 가슴 아프지만, 나는 아무래도 훔쳐볼 만한 게 필요할 것 같거든.”

삶의 실패를 똑바로 직시하는 것은 어렵다. 내가 겪고 있는 삶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다. 때때로 사람들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말한다. 이 문장을 이런 식으로 다르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저지른 삶의 실수(실패)는 더 나은 삶, 그러니까 일종의 성공적인 삶(물론 여기서 말하는 성공은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을 위한 밑거름이 되리라고. 그러므로 우리의 고통을 똑바로 직시해야 한다고. 하지만 정말 그럴까? 정말 그렇다면, 성공적인 삶의 밑거름이 되지 못한 실패는 어떻게 되는 걸까? 성공의 어머니가 되지 못한 실패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실패는 그저 실패, 고통은 그저 고통, 잘못된 선택은 그저 잘못된 선택이라고.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침대에 충분히, 정말 충분히 머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충분히 침대에 머물렀을 때, 침대에서 빠져나갈 만큼의 힘을 얻었을 때, 비로소 우리 역시 카렌처럼, 단 하나의 벽돌을 제거하고 거기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돌맹이 같은 실패를 슬쩍 바라보는 용기를 내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0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손보미(소설가)

드라마와 빵을 좋아하는 소설가. 『디어 랄프 로렌』,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맨해튼의 반딧불이』 등을 썼다.

오늘의 책

AI, 전혀 다른 세상의 시작일까

유발 하라리의 신작. 호모 사피엔스를 있게 한 원동력으로 '허구'를 꼽은 저자의 관점이 이번 책에서도 이어진다. 정보란 진실의 문제라기보다 연결과 관련 있다고 보는 그는 생성형 AI로 상징되는 새로운 정보 기술이 초래할 영향을 분석했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한국 문학의 지평을 더욱 넓혀 줄 이야기

등단 후 10년 이상 활동한 작가들이 1년간 발표한 단편소설 중 가장 독보적인 작품을 뽑아 선보이는 김승옥문학상. 2024년에는 조경란 작가의 「그들」을 포함한 총 일곱 편의 작품을 실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들과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한 권에 모두 담겨 있다.

주목받는 수익형 콘텐츠의 비밀

소셜 마케팅 전문가 게리 바이너척의 최신작. SNS 마케팅이 필수인 시대, 소셜 플랫폼의 진화와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콘텐츠 제작을 위한 6단계 마케팅 전략을 소개한다. 광고를 하지 않아도, 팔로워 수가 적어도 당신의 콘텐츠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다.

삶의 끝자락에서 발견한 생의 의미

서른둘 젊은 호스피스 간호사의 에세이. 환자들의 마지막 여정을 함께하며 겪고 느낀 경험을 전한다. 죽음을 앞둔 이들과 나눈 이야기는 지금 이순간 우리가 간직하고 살아야 할 마음은 무엇일지 되묻게 한다. 기꺼이 놓아주는 것의 의미, 사랑을 통해 생의 마지막을 돕는 진정한 치유의 기록을 담은 책.


PYCHYESWEB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