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기억합니다, 차이콥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Op.71”

차이콥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Op.71”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한해를 그저 흘려보낼 수 없는 안타까운 연말, 나만의 의식으로 “호두까기 인형”을 들어 보세요. 올해도, 내년에도, 내후년에도요. 메마른 가슴에 행복을 촉촉하게 뿌려 줄 겁니다. (2021.12.23)

에버렛 신, The White Ballet, 1904

음악계 우스갯소리로 사람들이 ‘블랙 프라이 데이’ 쇼핑을 할 때, 연주자들은 '호두까기 인형' 악보를 펼쳐 연습을 시작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연말이 되면 전 세계 연주회장 어디선가는 항상 이 음악이 연주되기 때문입니다. 산타 할아버지에게 선물을 받듯 근심 걱정을 잊고 달콤한 연말을 보내기에 차이콥스키 음악만큼 잘 어울리는 음악이 또 있을까요?

'호두까기 인형'은 표트르 차이콥스키가 작곡한 대표적인 발레 음악입니다. 그가 활동하던 당시 러시아에서는 고전 발레가 크게 유행했습니다. 짧은 튀튀를 입고 토슈즈를 신은 무용수가 발레를 상징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습니다. 기화할 듯 가벼운 몸짓은 느리게 떨어지는 눈송이를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우아했고, 러시아 음악은 낭만과 우수로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두 예술이 만나 환상적 세계를 그려내는 호화롭기 그지없는 장르가 바로 고전 발레였고, 그 한 가운데 차이콥스키가 있었습니다.

발레 음악은 노래나 대사 없이 음악과 무용만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갑니다. 감상자는 마치 무성 영화를 보듯 발레가 그리는 이미지와 음악 분위기로 줄거리를 상상합니다. 작곡가는 중심이 되는 이야기를 읽으며 어느 부분을 음악으로 강조할지 결정하고, 그에 맞는 다양한 음악 재료를 선택해 사용합니다. 마치 영화 배경 음악처럼요. 하지만, 발레 음악은 영화 음악보다 더 구조적입니다. 감상자가 말이나 글 없이 음악과 무용만으로 줄거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억이 가능한 선명한 구조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 명이 함께 추는 군무, 무대의 꽃인 독무와 2인무는 오페라의 합창곡, 독창이나 이중창 아리아처럼 작곡가가 구체적으로 음악을 구상하는 틀을 제공합니다.

'호두까기 인형 발레'는 E.T.A. 호프만이 1816년에 쓴 『호두까기 인형과 생쥐 대왕』을 알렉상드르 뒤마가 각색한 동화에 기반해 총 2막으로 작곡되었습니다. 1막은 주인공인 클라라와 호두까기 인형이 겪는 사건 사고가 펼쳐지고, 2막은 왕자로 변한 호두까기 인형이 클라라와 함께 도착한 과자 나라에서 열리는 연회가 주 내용을 이룹니다. 연속되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1막과 달리 2막에서는 각각의 무용수가 보여 주는 다양한 춤곡이 다채로운 음악과 함께 펼쳐집니다. 감상자는 주인공과 함께 연회에 참석한 느낌을 받게 되지요. 

초콜릿(스페인 춤), 커피(아랍 춤), 차(중국 춤), 트레파크(러시아 춤)를 비롯해 꽃들의 춤, 왕자와 사탕 요정의 2인무(파 드 되, Pas de deux) 등 음악만 들어도 장면이 연상되는 아름다운 발레곡이 이어집니다. 19세기 낭만 음악이 묘사하는 청각적 설명과 화려한 무대 장식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몸동작은 종합 선물 세트처럼 우리의 오감을 자극합니다.


초콜릿(스페인 춤) - 볼쇼이 발레단


커피(아랍 춤) - 모스크바 발레단


차(중국 춤)와 트레파크(러시아 춤) - 마린스키 발레단


꽃의 왈츠 - 로얄 발레단


발레는 오페라와 마찬가지로 종합 예술입니다. 작곡가의 음악뿐 아니라 미술가의 무대 장식과 의상, 안무가의 무용이 겹치는 공감각적 창작품이지요. 그래서, 다양한 예술 해석이 다차원적으로 교차하고 어우러집니다. 음악만으로도 우리의 상상력을 충분히 자극하는 차이콥스키의 풍성한 선율과 화성, 독특한 악기 음색과 다양한 리듬은 발레의 완성도를 올리는 데 크게 기여합니다. 낭만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는 환상의 극치가 발레와 결합해 폭발적인 상승효과를 내는 것이죠.


호두까기 인형 모음곡(Op.71a), 라디오 프랑스 교향악단, 미코 프랑크 지휘


아직 발레 전체를 보지 않았다면, '호두까기 인형 모음곡(Op.71a)'을 들으며 나만의 발레를 상상해 보세요. 차이콥스키는 음악을 발레에 맞추기 전, 중요한 음악들만 모아서 관현악 모음곡으로 먼저 선보였고 엄청난 반향을 얻었답니다. 당시 청중처럼, 이 음악을 먼저 듣고 그 이후, 여러 안무가가 제시하는 다양한 해석을 맛보는 겁니다. 내가 상상한 춤과 실제 안무가 비슷하다면 만족감으로 행복할 테고, 그렇지 않다면 예상치 못한 부분에 솜털이 쭈뼛 서는 짜릿한 자극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2막에 등장하는 왕자와 사탕 요정의 2인무를 완전히 다르게 해석하는 두 영상을 보세요. 서로 다른 두 안무가 차이콥스키의 음악으로 어떻게 고양되는지, 무엇에 마음이 더 끌리는지 보며 나의 취향을 가늠해 보는 겁니다.


레나타 샤키로브, 다비드 잘레예프 2인무, 2017년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 공연


마리옹 바르보, 스테판 뷔옹 2인무, 시디 라르비 셰르카위 안무, 2016 파리 팔레 가르니에 공연, 파리 국립 오페라 관현악단 연주


딱딱한 철학책이 주는 교훈을 받아 새기기에는 많이 지쳐버린 한 해의 마지막, 우리가 반복되는 의식처럼 '호두까기 인형'을 찾는 이유는 아마도 복잡한 생각은 새해로 미루고 일단 달콤한 선물로 마음을 달래고, 현실을 잊고 싶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에 대한 걱정도 예측도 없던 어린 시절, 어른이 주는 선물과 맛난 과자로 마냥 행복할 수 있었던 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새롭게 시작될 한 해를 버틸 힘이 충전되니까요.

"의례가 뭐야?"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것도 모두들 잊고 있는 것이지." 여우가 말했다.

"그건 어떤 날을 다른 날과 다르게, 어떤 시간을 다른 시간과 다르게 만드는 거야."

_『어린 왕자』, 앙투완 드 생텍쥐페리, 황현산 역, 열린 책들

반복되는 시간을 다르게 만들기 위해 우리에게는 ‘의례’가 필요합니다. 한해를 그저 흘려보낼 수 없는 안타까운 연말, 나만의 의식으로 '호두까기 인형'을 들어 보세요. 올해도, 내년에도, 내후년에도요. 메마른 가슴에 행복을 촉촉하게 뿌려 줄 겁니다. 이렇게 길든 마음은 이제 매번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자동 반사하듯 우리 뇌 속에 도파민을 끌어낼 거예요. 행복할 이유가 없어도 음악은 일단 우리 마음을 덥히고, 상처에 반창고를 붙여 주기 때문입니다. 음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차이코프스키: 호두까기 인형 (Tchaikovsky: The Nutcracker, Op. 71) (SACD Hybrid) - Vladimir Jurowski
차이코프스키: 호두까기 인형 (Tchaikovsky: The Nutcracker, Op. 71) (SACD Hybrid) - Vladimir Jurowski
Vladimir Jurowski
PentaTone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1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송은혜

음악 선생. 한국, 미국, 프랑스에서 피아노, 오르간, 하프시코드, 반주, 음악학을 공부한 후 프랑스의 렌느 2대학, 렌느 시립 음악원에 재직 중이다. 음악 에세이 『음악의 언어』를 출간했다.

어린 왕자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저/<황현산> 역10,620원(10% + 5%)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은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가 문학 평론가 황현산 선생의 번역으로 열린책들에서 출간되었다. 프랑스어 원문에 대한 섬세한 이해, 정확하고도 아름다운 문장력, 예리한 문학적 통찰을 고루 갖춘 번역으로 문학 번역에서 큰 입지를 굳혀 온 황현산 선생은 이 작품을 새롭게 번..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ebook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저/<황현산> 역8,000원(0% + 5%)

전 세계가 사랑하는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가 문학 평론가 황현산 선생의 번역으로 열린책들에서 출간되었다. 프랑스어 원문에 대한 섬세한 이해, 정확하고도 아름다운 문장력, 예리한 문학적 통찰을 고루 갖춘 번역으로 문학 번역에서 큰 입지를 굳혀 온 황현산 선생은 이 작품을 새롭게 번역하면서..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Vladimir Jurowski>35,800원(0% + 1%)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오늘의 책

시인 김겨울의 첫 시집

독서의 즐거움을 알려왔던 김겨울 작가가 시인으로 돌아왔다. 어쩌면 본래 시인일지도 모르겠다. 김겨울 시인은 우화라는 이야기의 형태를 빌려, 담대하게 불가해한 인생의 의미와 슬픔이 가져다주는 힘을 노래한다. 다 읽고 나면, 이 시인의 노래를 가만히 서서 듣고 싶어질 것이다.

수사학이 당신의 인생을 바꾼다

‘설득을 위한 기술'로 문장과 언어의 사용법을 연구하는 학문인 수사학. 이를 바탕으로 상대방의 마음과 행동을 변화시키는 28가지 대화법을 담았다. 대화와 설득에 번번이 실패한 사람이라도 이 책을 읽는다면, 싸우지 않고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매사가 귀찮은 사람이라면 필독

무기력. 전 세계를 뒤덮은 감정이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코로나 팬데믹 3년이 결정적이었다. 매킨지 조사로는 세계 직장인 42%가 무기력한데 한국은 51퍼센트로 높은 편이었다. 희망은 있다.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윤대현 교수가 무기력을 극복할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어린이들이 던지는 유쾌한 한 방

궁금한 건 뭐든지 파헤치는 '왜왜왜 동아리' 제대로 사고쳤다?! 반려견 실종 사건을 파헤치던 동아리 아이들, 어른들이 이익을 위해 선택한 일들이 환경오염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후 행동에 나서게 되는데... 세상을 바꿔나가는 개성 넘치고 활기찬 아이들의 반짝이는 이야기를 담았다.


PYCHYESWEB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