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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나비가 지휘하는 장엄한 판타지 세계
잔나비 <환상의 나라>
대중적인 히트를 기록한 밴드는 결코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다. 쉽게 실현할 수 없는 아이디어를 토대로 장중한 서사를 가진 콘셉트 앨범을 기획하며 한 걸음 도약을 위한 발판을 멋스럽게 구축한다. (2021.08.25)
잔나비의 시작을 알린 <Monkey Hotel>(2016)은 청춘들의 씁쓸한 현실과 복잡한 감정을 익살과 함께 풀어낸 '놀이터'와도 같았다. 레트로 음악의 아날로그적 정취를 품으며 1970-1980년대 전설들의 음악을 레퍼런스 삼았던 소포모어 <전설>(2019)은 매니아틱한 그룹사운드에게 대중적인 히트곡을 만들어주었고 몇 번의 성공을 통한 안정감을 기반으로 이들은 그동안 꿈꾸었던 장대하고 화려한 형태의 음악 세계, <환상의 나라>로 향했다. 야심이 깃든 기획에 따라 재기발랄하게 뛰어놀던 시작을 지나 장엄한 관현악 연주와 판타지적 장치, 시적인 가사를 통해 다이내믹하고 세밀한 짜임새를 가진 시공간으로 규모를 확장한다.
도입부와 피날레를 명확히 구분했던 데뷔작과 같이 이번 음반 또한 여러 장의 막으로 이뤄진 한 편의 뮤지컬을 떠올리게 하는 뚜렷한 기승전결의 구조를 취한다. 1분 남짓의 인트로 곡 '환상의 나라'는 동화 같은 분위기의 현악기 연주와 함께 서막을 열며 지저귀는 새소리와 산뜻한 컨트리 풍의 멜로디로 흐름을 이어가는 '용맹한 발걸음이여'가 앨범의 주제의식을 내포한 내레이션과 함께 본격적인 환상의 세계로 이끈다.
잔나비가 꿈꾸었던 거대한 세계는 비틀즈의 영향을 받았던 이들의 초심으로 돌아가 완성된다. '지오르보 대장과 구닥다리 영웅들'라는 부제를 덧붙이며 가상의 세계를 설정한 것은 1967년 비틀즈가 발매한 명작 <Sgt. Pepper's Lonely Heart Club Band>를 떠오르게 하며 전설의 이름들을 외친 수록곡 '비틀 파워!'는 그들에 의한 영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재지한 멜로디의 연주를 이어가다 후반부에 빨리 감기의 형태로 템포를 극단적으로 전환하는 '로맨스의 왕'은 비슷한 구조를 가진 비틀즈의 'A day in the life'와 닮아 있다.
'환상의 나라'라는 주제에 걸맞게 변화무쌍한 사운드와 톡톡 튀는 실험적인 아이디어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페어웰 투 암스! 요람 송가'는 힘찬 드럼 연주가 이끄는 행진곡의 멜로디와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로 '용감한 발걸음이여'의 내레이션을 왜곡한 중반부, 그리고 경건한 송가의 형태로 마무리되는 예측 불가능한 전개를 택한다. 왈츠풍의 단조로운 멜로디 위에 웅장한 마칭 밴드의 연주가 겹겹이 쌓이며 무게감을 더하는 '고백극장'은 외로움이라는 주제의 본질을 우스꽝스럽게 풀어내며 재미를 더한다.
쉴 새 없이 부딪히는 악기들과 개성 넘치는 곡들의 변주가 혼을 쏙 빼놓지만 <전설>로 확립했던 잔나비의 대중적인 색깔 또한 놓치지 않는다. 타이틀곡 '외딴섬 로맨틱'은 대중이 가장 친숙하게 느낄 수 있는 서정적인 가사의 청량한 발라드 곡이며 강한 여운을 가진 최정훈의 보컬을 통해 촌스럽지만 뜨겁게 타오르는 청춘의 사랑, 꿈을 향한 아름다운 열정과 같은 앨범을 관통하는 메시지를 전한다.
대중적인 히트를 기록한 밴드는 결코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다. 쉽게 실현할 수 없는 아이디어를 토대로 장중한 서사를 가진 콘셉트 앨범을 기획하며 한 걸음 도약을 위한 발판을 멋스럽게 구축한다. 특정 싱글에 임팩트를 부여하기보다는 내러티브의 유기적인 흐름을 견고하게 형성하며 싱글 단위로 곡을 소비하는 스트리밍의 시대에 한숨에 즐길 수 있는 앨범 단위의 청취를 제안했다. 요새 음악에서 쉬이 찾아볼 수 없는 낯선 문법을 취하면서도 아티스트와 함께 교감할 수 있는 메시지와 대중친화적인 음들의 향연도 놓치지 않으며 잔나비가 지휘하는 쇼의 무대로 대중을 끌어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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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