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스트의 하루] 그 여름의 서정(敍情) – 김민하

에세이스트의 하루 15편 – 김민하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나는 솔향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늘과 초록과 솔향과 나는 하나가 되고 있었다. (2021.08.11)


예스24가 진행하는 글쓰기 공모전 ‘나도, 에세이스트’ 대상 수상자들이 에세이를 연재합니다. 에세이스트의 일상에서 발견한 빛나는 문장을 따라가 보세요.


언스플래쉬

겨우 십 년 넘게 산 여자아이가 오르고 내리기에 적당한 야산이었다. 경사 낮은 오르막을 오르다가 두 갈래 길이 나오면 뒤돌아 왔던 길로 다시 온다. 어느 즈음부터 키가 작은 소나무 숲이 펼쳐진다. 지금까지도 나만 아는 유일한 길이었지만, 소나무 숲부터는 진짜 ‘비밀’이 펼쳐진다. 

공기가 다르다. 소나무가 내뿜는 공기는 숲의 공기와는 다른 청량함이 있다. 좀 더 투명한 청량함이랄까. 특유의 솔향은 걸음걸이를 늦추는 마법의 힘을 지니고 있다. 소나무 숲이 걸어둔 주문에서 벗어나지 못한 때에 이름 없는 절을 만나게 된다. 작은 건물에 그만큼 작은 석탑이 있고 그 옆에는 역시나 작은 돌무더기가 있다. 작은 소나무 숲에 어울리는 절이었다. 

그날도 혼자 산을 올랐다. 숙제를 마치고 혼자 몰래 집에서 빠져나왔다. 산에 혼자 가는 것은, 이제 막 10대로 들어선 여자아이에게 나만의 신비로운 약속을 쌓아두는 행위와도 같았다. 조금씩 생각이 많아지고 마음이 들뜨는 시기였다. 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만나는 나무와 풀과 꽃에 나도 모를 마음을 속삭이다가, 소나무 숲에 다다르면 묘한 감정들이 맘껏 방황하기 시작했다. 청량한 솔향에 취해 어지러운 생각들을 쏟아냈다. 사춘기의 소란스러운 마음들이 소나무 아래 힘없이 기화되고야 마는 것이다.

후두둑. 이렇게나 갑자기? 소나기 예보는 듣지 못했다. 소나무 숲을 뛰어 지나쳐야 하는 게 그저 아쉬웠다. 급히 뛰다가 넘어질 뻔했다. 절이 보인다. 얼른 처마 밑으로 들어갔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쪼그리고 앉아 세월을 보내기 시작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비였다. 바닥에 물웅덩이가 생기고, 그곳에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비였던 존재가 동그라미로 변신했다. 빗줄기 하나하나가 만든 동그라미는 급한 생을 어쩌지 못하고 사라졌다. 빗줄기와 물웅덩이가 연속으로 생과 사를 보여 주었다. 각기 다른 크기로 이어지는 동그라미의 변주곡을 조용히 들었다. 비의 운명을 지켜보다 보니 어느새 그쳤다. 순식간이었다. 휘몰아친 비와 빗방울의 삶과 죽음 앞에 열 한 살 소녀는 조금, 막연해졌다. 

추도식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처마 끝에 매달려 아직 남은 생을 위해 애쓰던 빗방울들이 바닥으로 향했다. 그들의 속도는 지금까지의 휘몰아치던 낙하와는 달랐다. 그들이 웅덩이에 남긴 동그라미는 점점 큰 여운을 그렸다. 처마에서 떨어진 빗방울이 탄생시킨 원은 느린 속도로 하늘을 품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온 사방이 초록이었다. 소나기는 나에게 빗방울의 운명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초록을 짙게 만들었다. 다시 물웅덩이를 내려다보니, 처마에서 낙하하는 빗방울과 파란 하늘과 소나기가 낳은 초록이 그 안에 모여 있었다. 온도가 상승한 공기에는 솔향이 배어 있었다. 나는 솔향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늘과 초록과 솔향과 나는 하나가 되고 있었다.

그 후로 비만 오면 산으로 갔다. 우산은 나와 비를 막는 것이었기에 그런 것은 필요 없었다. 젖은 옷을 털지도 않고 처마 밑에 앉았다. 모든 빗방울이 각기 다른 방향과 형태로 저마다의 생을 드러냈다. 나는 두 시간이든 세 시간이든 비가 그치고 처마 끝의 빗방울들이 다 떨어질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비가 소란스러운 만큼 내 마음은 고요해져만 갔다. 사춘기를 적시고 씻어낸 비였다.

비가 키워낸 초록 앞에서 기지개를 펼치면 솔향 머금은 습기가 내 몸 구석구석으로 들어왔다. 그 시절의 소나기와 소나무 숲과 빗방울, 물웅덩이의 동그라미, 초록, 그리고 나는 일종의 연대였다. 연대의 목적이 내 마음속에 ‘서정(敍情)’의 씨앗을 심는 것이었음을, 나는 한참을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30년이 지난 지금, 그 여름의 서정은 내 문학의 벌판이 되었다. 나는 가끔 그 벌판에 서서 솔향을 맡는다. 솔향을 체취로 둔갑시키고 나면 나는 활자의 대리인이 되고야 만다. 그 여름이 낳아준 서정을 활자로 채우다 보면, 어느새 문학의 언저리에 가닿아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아직도 내 속에서 열 한 살의 여름비를 멈추지 않는 까닭이다.  



*김민하

일상의 널려있는 것들을 꿰어 글로 엮습니다. 삶의 모토는 ‘텍스트 근본주의’입니다.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0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김민하(나도, 에세이스트)

일상의 널려있는 것들을 꿰어 글로 엮습니다. 삶의 모토는 '텍스트 근본주의'입니다.

오늘의 책

끝나지 않는 오월을 향한 간절한 노래

[2024 노벨문학상 수상] 1980년 5월 18일부터 열흘 간의 광주, 그리고 그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작가의 철저한 노력으로 담아낸 역작. 열다섯 살 소년 동호의 죽음을 중심으로 그 당시 고통받았지만, 역사에서 기록되지 않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꺼내 보이면서 그 시대를 증언한다.

고통 속에서도 타오르는, 어떤 사랑에 대하여

[2024 노벨문학상 수상] 2023 프랑스 메디치 외국문학상 수상작이자 가장 최근작. 말해지지 않는 지난 시간들이 수십 년을 건너 한 외딴집에서 되살아난다. 깊은 어둠 속에서도 “지극한 사랑”이 불꽃처럼 뜨겁게 피어오른다. 작가의 바람처럼 이 작품은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다.

전세계가 주목한 한강의 대표작

[2024 노벨문학상 수상] 2016년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수상한 장편소설이자 한강 소설가의 대표작. 보이지 않는 영혼의 고통을 식물적 상상력으로 표현해낸 섬세한 문장과 파격적인 내용이 큰 울림을 만들어낸다.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나무가 되고자 한 여성의 이야기.

더럽혀지지 않는 어떤 흰 것에 관한 이야기

[2024 노벨문학상 수상] 한강 소설가의 아름답고 고요한 문체가 돋보이는, 한 편의 시와 같은 작품.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물고, 그 사이를 넘나드는 소설이다. ‘흰’이라는 한 글자에서 시작한 소설은 모든 애도의 시간을 문장들로 표현해냈다. 한강만이 표현할 수 있는 깊은 사유가 돋보인다.


PYCHYESWEB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