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 손잡고 걷기
의문투성이인 인간들과 함께 또 한번의 계절을
아 인간 지긋지긋하다 하지만 어찌 보면 바로 그 점에서 인간은 애증의 대상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참 답 없는 존재들인데 그래서 싫은데 또 그래서 마음이 가는 것, 자꾸 조마조마하게 사고 치는데 마냥 미워할 수는 없는 이상한 것 (2021.05.14)
복잡한 인생, 당신은 운이 좋은 사람인가요?
인간은 의문투성이다. 그 자체로 의문스러운 부분도, 의문을 품는 일도 많다. 인간이 얽히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고 변수가 쏟아진다. 다른 어떤 존재라고 안 그러겠는가 싶지만, 나도 인간 종이라 그런 문제적 존재들 중에는 그래도 인간에게 가장 많은 시간을 쏟게 되니, 나에게 이것은 인간의 일인 것이다. 아 인간 지긋지긋하다 하지만 어찌 보면 바로 그 점에서 인간은 애증의 대상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참 답 없는 존재들인데 그래서 싫은데 또 그래서 마음이 가는 것, 자꾸 조마조마하게 사고 치는데 마냥 미워할 수는 없는 이상한 것.
새삼 이런 생각이 든 건, 책을 읽다가 오랜만에 좋아하는 영화 한 편을 다시 떠올렸기 때문이다. 마이크 리 감독의 〈세상의 모든 계절〉 (원제: Another Year). 모난 데 없이 여유롭고 다정하고 행복한 부부 톰과 제리, 그와 반대로 되는 일 하나 없는 엉망진창인 삶에 지칠 대로 지친, 제리의 직장 동료 메리. 이야기는 그들과 그들 주변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사건들, 거기에서 드러나는 조용하지만 지배적이고 복합적인 감정들을 중심으로 흐른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제리의 처지이던 나는 영화가 끝난 후에야 메리의 편에 서본다. 어쩌면 나는 그간 나의 메리들을 제리의 눈으로 바라본 것이 아닌가? 나의 메리들에게 제리의 입으로 말한 것이 아닌가? 나의 메리들을 제리의 팔로 포옹해 준 것이 아닌가? 그것은 어쩌면 억세게 운 좋은 자의 오만과 위선이 아닌가?
_한수희, 『조금 긴 추신을 써야겠습니다』, 62쪽
영화를 보는 내내, 본 후에도,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최근까지도, 나는 내가 메리에 더 가까운 눈으로 그들을 봤다고 여겼다. 아마 메리가 다른 이들보다 더 강한 기운을 뿜었기 때문일 거다. 불안한 눈빛과 떨리는 목소리, 척하는 표정과 과장하는 몸짓 같은 것들은 기대보다 세게 눈과 귀와 마음을 압도한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책을 읽으며 가만 보니 그것 역시 관망하는 자의 시선이었던 듯하다. 유리 벽을 친 안전지대에 있으면서 인식하지 못한 자기 연민과 위선이 아니었을까. 많은 경우에 나의 비극은 남의 그것보다 거대하고 나의 운은 남의 그것보다 보잘것없어 보이니까.
지금도, 앞으로도, 메리의 눈으로 메리를, 제리의 눈으로 제리를 보는 일은 쉽지 않을 거다. 우리는 자주 제리 앞에서 메리가 되어 한없이 초라해지고, 메리 앞에서 제리가 되어 상대적 우월감에 빠질 테니. 아 이렇게 나약하고 이기적이고 때로는 선을 넘어 추해지기까지 하는 인간이라니, 복잡하다.
애고 어른이고 우린 도통 아는 게 없었다. 이런저런 생활의 지혜 같은 것은 기가 막히게 잘 알면서도, 자기 삶을 관통하는 아주 결정적인 사실은 모른 채로, 때로는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로도 우리는 그럭저럭 살았던 것이다. 그런 비밀은 모르는 게 나을 때도 많다. 알아봤자 생각은 복잡해지고 골치만 아프고, 어떤 경우에는 자기 삶을 아예 부정하고 싶어지기도 하니까.
_최진영, 『구의 증명』, 21-22쪽
그렇다. 우리는 계속해서 의문투성이인, 불안하고 불확실한 인간들과 함께 또 한번의 계절을 나는 것일 뿐. 그리고 또 소리를 지르고 핀잔하고 다그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나의 메리의 손을 놓지 않겠다. 메리는 여기 있고 계절은 가고 또 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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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고르고 사고 팝니다. 아직은 ‘역시’ 보다는 ‘정말?’을 많이 듣고 싶은데 이번 생에는 글렀습니다. 그것대로의 좋은 점을 찾으며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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