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하게 둥글게 기억되기를
기억의 작동방식
‘지금’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이 시간은 훗날 어떻게 기억될까. 기억에 남기는 할까. 당장 얼마 후면 희미해 질지도 모를 지금 순간이, 오늘이, 이 봄이, 당신에게 아주 괴롭지는 않은 기억이 되기를 바란다.(2021.04.09)
내가 그랬다고? 에이 설마. 진짜? 대화 중에 이런 반응을 하게 될 때가 있다. 내가 했다고 인정하기에는 너무 낯선 말과 행동이 상대에게는 나의 것으로 남아있는 경우가 있어서다. 진짜 진심이다. 나는 그런 적이 없다. 억울하다. 싶은데, 가만 생각하면 잘 모르겠다. 어떤 일은 무서울 만큼 서로에게 다른 기억으로 남았으니까. 이 일과 저 일의 구체적인 정보들, 관계한 인물이나 인과, 발생 순서 등이 뒤죽박죽 섞여서, 하나둘 함께 맞춰 보다가 결국 당사자 누구도 정확한 기억을 장담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친구 M은 모든 것을 기억했다. 그는 종종 과거 어느 날의 일들을 꺼내 놓으며 듣는 이를 놀라게 하기도 했는데, 그를 제외하고는 그 존재 자체를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어떤 상황의 시간과 장소와 말들까지도 거의 완벽하게 복원해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물론 누군가의 부끄러움과 애써 묻어둔 흑역사도 들어있었으니 너는 또 뭘 알고 있는 것이냐고 경외의 시선을 보내기도 했는데 특별히 애를 쓴다 하기보다는 그에게는 그게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았다. 그가 어렵지 않게 떠올릴, 잊기는 어려울 그 기억들을 가만 간직하고만 있어 주기를 바랄 뿐이다.
내 기억에서 사라진 것들이 타인에 의해 자꾸 드러날 때마다 나의 무신경을 반성하기도 했다. 만사에 특히 사람에 너무 관심을 안 두는 것은 아닌지 자주 스스로를 돌아봤다. 중요한 누군가의 결정적인 무엇까지도 대책없이 무심하게 놓쳐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러다 후에 돌아보면 정작 필요한 것은 무엇도 남지 않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스멀스멀 피어 올랐다. 그러면서도 좀처럼 나아지지는 않는 것이 의문인데, 그래서 의식적으로 뭔가를 기록하는 습관이 생겼다. 쓰면서 정리하고 정리하면서 한번 더 기억하는 방식이 내게는 잘 맞았다.
이렇게 기억은 사람에 따라 상대에 따라 천차만별 제멋대로인데, 그런 중에도 아픈 기억은 또 과하게 선명하게 남았다. 충격이 크면 클수록 고통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그랬다. 물리적인 기록 같은 것은 전혀 필요 없는 것. 망각 기능이 고장 나는 때다. 무적에 가까운 자기방어 본능도 어찌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 그것은 늘 마음 한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설명하기 힘들지만 분명 머리가 아니라 마음 어딘가에 저장된 것이 맞다.) 그러다 보통날 작은 계기 하나로도 불쑥 튀어나와 사람을 휘청거리게 만든다. 그러니까 이 기억의 작동 방식이라는 것이 참 고약한 면이 있긴 한 거다. 모난 기억들은 희석되고 둥글어 지기도 하지만 개중에 정말 아프게 뾰족한 것들은 잘 마모되지 않으니까. 아니면 어쩌면 무의식 중에 그것을 계속 곱씹기 때문일까. 그렇게 거듭 되살아나고 새롭게 진해지는 것일까.
나는 그걸 연경에게 보낼 생각이었는데 이제는 그게 좋은 생각인지 알 수 없어졌다. 이미 그 일들은 연경에게서 아주 멀리 떠나왔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끝난 뒤에 그것을 복기하는 일은 과거를 기억하거나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재해석하고 재창조하는 일이니까. 그것은 과거를 다시 경험하는 것이 아닌 과거를 새로 살아내는 것과 같은 일이니까.
_정영수, 『내일의 연인들』, 「우리들」 41쪽
‘지금’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이 시간은 훗날 어떻게 기억될까. 기억에 남기는 할까. 당장 얼마 후면 희미해 질지도 모를 지금 순간이, 오늘이, 이 봄이, 당신에게 아주 괴롭지는 않은 기억이 되기를 바란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이라면 적당히 비틀어지고 뒤바뀌어도 괜찮겠다. 이 글도 머지않아 흐릿하게 흔적만 남겠지. 언젠가 ‘그때 그 글 그거 뭐더라 정확히 떠오르지는 않는데 나쁘지 않았어.’ 정도로만 기억되면 좋겠다. 날카롭지 않게 누구의 기억에도 상처를 남기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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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고르고 사고 팝니다. 아직은 ‘역시’ 보다는 ‘정말?’을 많이 듣고 싶은데 이번 생에는 글렀습니다. 그것대로의 좋은 점을 찾으며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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