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에세이스트] 4월 대상 - 롤모델, 꼭 있어야 하나요?

내 인생의 롤모델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이제는 누군가의 롤모델이 되는 것도, 누군가를 롤모델로 삼는 것도 깨끗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우리는 각자의 경험과 상황 속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2021.04.06)

언스플래쉬

"회사 다니면서 제일 씁쓸한 게 뭐였는지 알아? 롤모델이 없다는 거야. 아등바등 열심히 해봤자 저 사람들처럼 되겠구나 싶은 거지. 멋없이 나이 드는 일만 남은 것 같더라."

회사를 떠나며 동기가 남긴 말이었다. 나도 매일 같은 생각을 했다. 실망에 예외는 없었다. 처음부터 실망하거나 기대에 배신당하듯 실망했다. 롤모델이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나를 더욱 실망시켰다. 실망이 반복되자 기대를 거두기 시작했다.  회사와 동료로부터 거리를 두고 <NO 기대, NO 실망>을 모토로 삼았다. 내 일이나 똑바로 하자고 마음먹었다.

마음의 거리를 두며 한동안 크게 동요하지 않고 회사를 다녔다. 문제는 후배가 생기고부터였다. 그동안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이상적인 선배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던 것 같다. 기대와 실망을 했다는 건 그 대상에게 바라는 이미지가 있다는 것이니까. "선배라면 책임을 질 줄 알아야지. 비전을 제시할 줄 알아야지. 감정을 숨길 줄도 알아야지."라며 바람직한 선배의 기준을 세워뒀는데 선배가 되어보니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은 것이었다.

회사에는 롤모델 따위를 찾으면 안 된다고 고개를 흔들어놓고는 정작 후배들에게 ‘저 선배가 내 롤모델이야.’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좋은 선배인 척 행동했다.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어려워하는 일이 있으면 대신해주고, 상사에게 인정받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는 롤모델이 될 수 없었다. 노력하면 할수록 더 이상해졌다. 실수하지 않으려다 더 큰 실수를 하기도 하고, 후배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상사 험담을 하고는 뒤돌아 후회하기도 했다. 이럴 때면 합리화를 하고 싶어진다.

"애초에 롤모델이라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 아닐까? 모든 면이 완벽하게 훌륭한 사람이 어디 있어?"

롤모델은 개인적이고 상대적이다. 모두에게 사랑받으려고 하면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다는 말이 떠올랐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구나 결점이 있지만 어느 한 부분쯤은 그럴듯하고 괜찮다. 그 매력적인 한 부분에 홀딱 반해서 롤모델로 삼게 되기도 한다. 내가 가진 것 중 어떤 사소한 것이 좋아 보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그때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인정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민망한 과거를 떠올리다 깨달았다. 나는 나를 보던 시선으로 동료들을 보았고, 동료들을 보던 필터로 나를 들여다보았구나. '완벽한 이상'이라는 필터가 나와 동료들 사이의 틈을 자꾸만 벌려놓았구나. 그들에게 맞지 않는 기대를 하고 실망을 하고 거리를 둔 것은 그 필터 때문이었다.

다양한 인격 조각들로 이루어진 개인에게 ‘누군가가 되라’고 주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릴 때 엄마가 친구와 나를 비교하려고 들면 이렇게 맞섰다. “엄마는 왜 꼭 걔의 좋은 점만 가지고 비교하려고 들어? 전체를 다 놓고 봐야지.” 매번 지는 싸움이었지만 매번 분했다. 엄마가 그 애의 엄마였으면 나의 장점을 콕 집어 그 애와 나를 비교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평생 누군가를 바라보며 살지만 절대 그 누구도 될 수 없을 것이다. 롤모델은 시대적이고, 개인적이고, 상대적이고, 부분적이니까.

이제는 누군가의 롤모델이 되는 것도, 누군가를 롤모델로 삼는 것도 깨끗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우리는 각자의 경험과 상황 속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 일상 속에서 나에게 맞는 원칙을 세우고 그것들을 지켜나가며 살고 싶다. 힘을 빼고 균형을 잡으면서 말이다. 중심을 잡을 때 필요한 것은 타인의 이미지가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이해와 신뢰이다. 스스로에게 솔직한 사람, 자신을 속이지 않는 사람은 알고 있다. 자신의 좋은 점을 발견하는 시선으로 상대를 바라볼 줄 안다. 내가 싫어하는 내 모습을 이해하는 마음으로 상대의 미운 모습을 봐줄 줄 안다. 롤모델이 아니라 그냥 나와 당신으로 우리가 그렇게 지냈으면 좋겠다.


제갈명 일상을 단단하게 쌓아올리는 마음의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 나도, 에세이스트 공모전 페이지 바로가기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0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제갈명(나도, 에세이스트)

일상을 단단하게 쌓아올리는 마음의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오늘의 책

AI, 전혀 다른 세상의 시작일까

유발 하라리의 신작. 호모 사피엔스를 있게 한 원동력으로 '허구'를 꼽은 저자의 관점이 이번 책에서도 이어진다. 정보란 진실의 문제라기보다 연결과 관련 있다고 보는 그는 생성형 AI로 상징되는 새로운 정보 기술이 초래할 영향을 분석했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한국 문학의 지평을 더욱 넓혀 줄 이야기

등단 후 10년 이상 활동한 작가들이 1년간 발표한 단편소설 중 가장 독보적인 작품을 뽑아 선보이는 김승옥문학상. 2024년에는 조경란 작가의 「그들」을 포함한 총 일곱 편의 작품을 실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들과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한 권에 모두 담겨 있다.

주목받는 수익형 콘텐츠의 비밀

소셜 마케팅 전문가 게리 바이너척의 최신작. SNS 마케팅이 필수인 시대, 소셜 플랫폼의 진화와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콘텐츠 제작을 위한 6단계 마케팅 전략을 소개한다. 광고를 하지 않아도, 팔로워 수가 적어도 당신의 콘텐츠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다.

삶의 끝자락에서 발견한 생의 의미

서른둘 젊은 호스피스 간호사의 에세이. 환자들의 마지막 여정을 함께하며 겪고 느낀 경험을 전한다. 죽음을 앞둔 이들과 나눈 이야기는 지금 이순간 우리가 간직하고 살아야 할 마음은 무엇일지 되묻게 한다. 기꺼이 놓아주는 것의 의미, 사랑을 통해 생의 마지막을 돕는 진정한 치유의 기록을 담은 책.


PYCHYESWEB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