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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5.18을 기억하는 방법, 정재일의 Psalms
정재일 <Psalms>
긴 시간이 흐른 뒤에도 우리가 5.18을 기억하는 방법, 그날이 기록된 걸작이 탄생했다. (2021.03.24)
음악인 동시에 언어이고, 노래이지만 절규이며, 비극이자 눈물이다. 수많은 민중이 겪어낸 시대의 고통과 그 잔해, 빗발치는 총성에도 소리내기를 멈추지 않았던 이들의 아우성. 1980년 5월 광주에서의 민주화 운동은 약 30년이 흐른 지금 정재일의 <Psalms>에서 다시 한번 재현된다. 21곡이라는 방대한 수록곡 안에서 우리는 그때의 슬픔을 귀로 듣고, 소리로 느낀다.
앨범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40년에 헌정하는 음악 '내 정은 청산이오'에 이어 장민승 작가와 함께한 시청각 프로젝트 '둥글게 둥글게(round and around)'에서부터 시작됐다. 1979년 부마민주항쟁과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을 거쳐,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이르기까지의 모습을 아카이빙한 프로젝트를 위해 만든 음악을 재구성한 것. 2020년의 정재일은 5.18의 현장에 철저히 뛰어들었으며, 이를 진정성 있게 담아내기 위해 외면하고 싶은 역사를 기꺼이 용기 내 마주했다. 그렇게 태어난 <Psalms>는 '둥글게 둥글게(round and around)'와 달리 오롯이 '듣는 것'을 위한 결과물이나, 놀랍게도 상처의 파편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 쓰라린 경험을 선사한다.
앨범의 흐름을 주도하는 건 시편의 기도문이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긴 책인 시편은 찬양, 기쁨, 좌절, 희망, 복수 등 다양한 정서를 지니고 있다. 그중에서도 그는 '좌절'에 집중한다.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시편 22:21)'라는 비극으로부터 구원받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 '저희 손에 악특함이 있고 그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시편 26:10)'라는 정권을 향한 증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시편 10:1)'라는 신에 대한 원망.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니나이다(시편 38:6)'는 무기력한 절망까지. 당시의 처참한 심상을 시편(Psalms)을 통해 반추한다.
시편의 장과 절에 기반한 노래들은 합창단의 아카펠라와 정은혜의 구음(구강으로 기류만 통하게 하여 내는 소리)으로 구현된다. 노랫말은 희미하다.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듯 “구체적인 가사를 전달하기보다는 만트라처럼 계속해서 욀 수 있는 음악”이라는 취지 때문이다. 라틴어 기도를 차용해 알아듣기 어려운 노랫말과 울부짖음에 가까운 정은혜의 구음이 만나, 되풀이되어서는 안될 과거의 아픔을 극대화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소리는 시대가 흘러도 여전히 남아있는 상처를 거친 손길로 쓰다듬고, 또 위로한다.
긴 러닝타임 속에서도 뚜렷한 서사를 지니고 있다. 절제된 아카펠라 '26.9'로 시작해 처절한 울부짖음과 꺽꺽대는 고통의 신음으로 날카롭게 가슴을 파고드는 'be not depart from me', 일렉트로닉의 굉음으로 암담한 공포의 현장이 연상되는 'Why do you stand afar'. 비극 속의 고요 'before the face of my foolishness'는 모두가 죽고 난 뒤의 난 뒤의 허탈함이 황망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이 모든 아픔을 기억해야 한다는 'memorare'는 앨범의 절정이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메모라레(memorare)'의 노랫말이 노래 내내 반복되며, 현악기의 웅장함이 그날의 사건을 다시금 우리에게 각인시킨다.
약 10년 만에 선보이는 정규 앨범은 뒤틀린 역사의 기록이자 뼈아픈 기억의 산물이다. 수없이 들어온 과거의 아픔이 다양한 형태의 소리를 통해 눈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정재일은 듣는 음악을 넘어 보이는 음악을 만들어냈다. 긴 시간이 흐른 뒤에도 우리가 5.18을 기억하는 방법, 그날이 기록된 걸작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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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