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장>, K-도터를 아십니까

넷플릭스 영화 <이장>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세기말적 가부장제에 작별을 고하다”라는 타이틀대로, <이장>은 각자 쌓인 것도 얽매인 것도 많았던 자매들이 입을 열어 말하고 서로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하며 가부장제의 관성에서 함께 벗어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2021.01.18)

영화 <이장>의 한 장면

K-팝, K-방역, K-좀비의 시대를 맞아 오늘은 ‘K-도터’ 얘기를 해보려 한다. 트위터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표현인 ‘K-도터’, 즉 ‘한국의 딸(daughter)’이 혹시 ‘국가대표’ 같은 건가 싶다면 오해다. K-도터는 대개 자조적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다. 지난 칼럼에서 다룬 웹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한국에서 수많은 아들과 딸은 같은 집에서 다른 세상을 산다. 아들 없이 딸만 있는 가정의 자매에게는 “대가 끊겨 큰일”이라는 타박과 “그러니 (부족한 딸인) 너희가 (존재만으로도 효의 완성인 아들보다) 더 효도해야 한다”는 압력이 가해진다. 이처럼 가정 안팎의 성차별적 토양에서 자라온 딸들은 분노, 서글픔, 억울함, 원한, 그리고 본의 아니게 내면화된 책임감, 인정욕구, 효(!) 강박 등 다양한 감정이 끈끈하게 엉겨 K-도터인 자신을 구성하는 동시에 구속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영화 <이장>은 바로 그 K-도터들의 이야기다. 첫 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덕담을 가장한 망언에서 알 수 있듯 K-도터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짐을 진 자로 불리는 ‘K-장녀’ 혜영(장리우)은 범상치 않게 속 썩이는 아들 동민(강민준)을 혼자 키우며 직장에 다니는 싱글 맘이다. ‘장녀답게’ 성실히 살아온 게 분명해 보이지만 가장이자 양육자로 고군분투하다가 한계에 부딪힌 그에게 아버지의 묘를 이장해야 한다는 문자가 날아오며 딸들의 여정은 시작된다. 참고로 K-도터의 분노를 유발하는 대표 키워드로는 ‘명절, 제사, 조상’ 등이 있다. 

한때 누구보다 가까운 존재였지만 어느 순간 보면 놀라울 만큼 다른 인간이 되어 있다는 게 동기간의 신비일 것이다. 수더분하고 느긋해 보이지만 결혼 생활에 닥친 위기를 숨기느라 심란한 금옥(이선희), 야무지게 살려 애쓰지만 하필 부모에게서 독립하지 못한 남자와 결혼을 앞두어 속 터지는 금희(공민정), 학내 성폭력을 고발한 페미니스트이자 언니들에 비해 과격한 방식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혜연(윤금선아) 등 네 자매는 성격도 사는 방식도 제각각이다. 친구나 직장 동료보다도 애매한 타인이 된 서로를 견디며 목적지로 향하는 이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이장 보상금 5백만 원이다. 


영화 <이장>의 한 장면

그러나 큰아버지가 네 자매의 막냇동생이자 ‘장남’ 승락(곽민규) 없이 이장은 불가능하다고 억지를 쓰면서 사태는 꼬이기 시작한다. 집안의 실질적 기둥은 돈 필요할 때만 연락하다 잠적하기 일쑤인 승락이 아니라 혜영인데도 가부장제의 화석 같은 큰아버지는 아들 타령을 멈추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승락을 찾아 다시 길을 떠난 자매들의 피로, 짜증, 환멸 가득한 표정은 왠지 친숙하다. 종일 전을 부치고도 제사상에 절하기를 허락받지 못했거나 여자끼리 작은 상에서 식은 음식을 데워 먹어야 했을 때 우리의 얼굴에 떠올랐을 바로 그 표정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승락의 전 여자친구 윤화(송희준)가 등장하면서 여정은 좀 더 복잡해지는데 “며느리 생기면 유학파도 유교파가 되는 게 한국 시부모들이야.”, “고추가 무슨 벼슬이에요?” 등 신랄한 대사와 배우들의 연기가 착 붙어 지루할 틈이 없다. 무엇보다 스트레스를 눌러 참다못해 얼굴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듯 지쳐 보이는 혜영 역 장리우 배우의 존재감이 인상적이다. 

가족의 일이란 게 대개 그러하듯, 어떤 문제는 간신히 정리되고 어떤 문제는 남겨진 채 영화는 막을 내린다. 다만 “세기말적 가부장제에 작별을 고하다”라는 타이틀대로, <이장>은 각자 쌓인 것도 얽매인 것도 많았던 자매들이 입을 열어 말하고 서로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하며 가부장제의 관성에서 함께 벗어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가부장제의 수혜자였지만 가부장의 자리를 회피하고 싶어 하는 승락, 가부장제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미래 세대의 가능성을 상징하는 동민 등 세상의 변화 속에서 스스로 변화해야만 하는 남성들을 묘사하는 방식에는 남성인 정승오 감독의 고민도 드러난다. 정신 차려 보면 다가와 있을 설을 앞두고 K-도터로서 전의를 다지기 좋은 영화다. 자매들이 큰아버지의 반대를 넘어 아버지의 유골을 화장하기로 하듯, 그냥 좀 태워 보내야 할 것들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0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최지은(칼럼니스트)

대중문화 웹 매거진 <매거진t>, <텐아시아>, <아이즈>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괜찮지 않습니다』와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 등의 책을 썼다.

오늘의 책

AI, 전혀 다른 세상의 시작일까

유발 하라리의 신작. 호모 사피엔스를 있게 한 원동력으로 '허구'를 꼽은 저자의 관점이 이번 책에서도 이어진다. 정보란 진실의 문제라기보다 연결과 관련 있다고 보는 그는 생성형 AI로 상징되는 새로운 정보 기술이 초래할 영향을 분석했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한국 문학의 지평을 더욱 넓혀 줄 이야기

등단 후 10년 이상 활동한 작가들이 1년간 발표한 단편소설 중 가장 독보적인 작품을 뽑아 선보이는 김승옥문학상. 2024년에는 조경란 작가의 「그들」을 포함한 총 일곱 편의 작품을 실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들과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한 권에 모두 담겨 있다.

주목받는 수익형 콘텐츠의 비밀

소셜 마케팅 전문가 게리 바이너척의 최신작. SNS 마케팅이 필수인 시대, 소셜 플랫폼의 진화와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콘텐츠 제작을 위한 6단계 마케팅 전략을 소개한다. 광고를 하지 않아도, 팔로워 수가 적어도 당신의 콘텐츠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다.

삶의 끝자락에서 발견한 생의 의미

서른둘 젊은 호스피스 간호사의 에세이. 환자들의 마지막 여정을 함께하며 겪고 느낀 경험을 전한다. 죽음을 앞둔 이들과 나눈 이야기는 지금 이순간 우리가 간직하고 살아야 할 마음은 무엇일지 되묻게 한다. 기꺼이 놓아주는 것의 의미, 사랑을 통해 생의 마지막을 돕는 진정한 치유의 기록을 담은 책.


PYCHYESWEB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