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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시간을 봉인하여 사랑을 기억하고 영원으로 간직하다

고화질로 돌아온 전설의 명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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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는 이들을 대신해 영화로, 드라마로 사랑을, 기억을, 시간을 봉인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왕가위와 그의 작품은 클래식의 지위에 만족하지 않고 여전히 현재형으로 진행 중이다. (2020.12.31)

영화 <화양연화>의 한 장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순간’을 뜻하는 ‘화양연화 花樣年華’는 영화로 유명하다. 내 또래에게는 그렇다. 젊은 세대에게는 유지태와 이보영 배우가 출연한 드라마 <화양연화-삶이 꽃이 되는 순간>으로 더 익숙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화양연화>는 2000년 5월 칸 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지 벌써 20년이 지났다. 그즈음 출생한 이들에게 왕가위 감독과 <화양연화>를 비롯한 그의 작품은 영화 서적에서나 접할 수 있는 미지의 클래식이다.

<화양연화>가 4K 화질의 <화양연화 리마스터링>으로 재개봉했다. 차우(양조위)와 수리첸(장만옥)에게는 각자의 배우자가 있다. 운명의 장난처럼 같은 날, 같은 아파트, 같은 층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서로 바라보는 위치에 이사 왔다. 우연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각자의 배우자끼리 차우와 수리첸 몰래 만남을 이어오고 있었다. 차우는 수리첸의 핸드백이 아내 것과, 수리첸은 남편의 넥타이가 차우 것과 유사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상심에 빠진다. 

차우와 수리첸은 각자의 배우자에게 따져 묻는 대신 서로에게 위안을 얻기로 한다. 천성이 순한 이들은 주변의 보는 눈이 두려워 서로에게 마음이 가면서도 매사가 조심스럽다. 차우가 슬쩍 손을 내밀면 수리첸은 부끄러워 손을 빼고, 수리첸이 호텔로 찾아가면 차우는 침대에 같이 눕는 대신 홀로 자는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줄 뿐이다. 영화의 오프닝 자막처럼 ‘그와의 만남에 그녀는 수줍어 고개 숙였고, 그의 소심함에 그녀는 떠나가 버렸다.’

왕가위는 차우와 수리첸의 관계를 실패한 사랑으로 규정하는 대신 차우가 수리첸을 마음속에 묻는 이야기로 끌고 간다. <화양연화>는 수리첸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당시에는 몰랐겠지만, 되돌아보면 수리첸이 처음 차우의 마음에 들어온 순간이기도 하다. 그 순간을 영원으로 간직하듯 차우는 영화의 엔딩에서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를 찾아 기둥에 난 구멍에 입을 갖다 대 봉인하는 제스처를 취한다. 

차우의 행동은 동료가 알려준 일화에서 비롯됐다. 비밀이 있는 사람이 산에 올라갔다. 나무를 찾아 구멍을 뚫었다. 그 안에 비밀을 속삭였고 진흙으로 구멍을 막았다. 차우가 이에 반응한 건 봉하는 행위가 잊는다는 게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보존하겠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다. 수리첸과 함께했던 시간을 평생 간수하고 싶다는 차우의 의도는 극 중 초침 없이 시침과 분침만으로 작동해 그 순간만큼은 멈춰 있는 듯한 시계의 미장센으로 반영된다. 

차우에게 있어 수리첸은 기억이다. 기억은 주관적인 시간이다. 떠나간 기차처럼 지나가면 사라질 시간이 차우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형태로 다시 재생된다. 차우의 기억 속 수리첸과의 사랑은 더는 흐르지 않는 시간처럼 박제되기도, 슬로우모션처럼 느리게 흘러가기도, 담배 연기처럼 부유하듯 오랫동안 떠돌기도 한다. 1962년 홍콩을 시작으로 1966년 캄보디아까지, 99분의 상영 시간에 담긴 4년여의 세월이 정지한 듯한 인상을 준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순간, 차우에게 수리첸과의 사랑은 인생을 통틀어 찰나이기 때문에 기억의 일부에 해당하지만, 맺어지지 않았기에 강렬하고, 남에게 알릴 수 없었기에 더 끈끈하고, 비밀로 묻었기에 계속 생각나서 영원성을 획득한다. 그것만으로 부족하다는 듯 차우는 소설을 쓴다. 싸구려 무협물이라며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듯해도 수리첸과의 관계를 우회하여 담아내 ‘기록’하려는 의도를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영화 <화양연화> 공식 포스터


차우가 소설을 쓰던 호텔의 룸넘버는 ‘2046’이었다. 왕가위는 <화양연화>의 차기작으로 <2046>(2004)을 만들었다. <2046>에서 양조위가 다시 연기한 차우는 수리첸과의 추억이 있는 동방호텔의 2046호를 찾았다가 이 방에서 누가 자살하는 바람에 2047호에 투숙한다. 왕가위의 영화는 이런 식이다. 한 편의 영화로 완결되는 게 아니라 특정 상황 혹은 특정 캐릭터가 다음 영화에서도 새로운 사연으로 이어진다. 

최근 외신을 통해 왕가위의 차기작이 윤곽을 드러냈다. 원제가 ‘Blossoms Shanghai’다. 처음 도전하는 TV 드라마다. 1990년대의 상하이를 배경으로 <화양연화>와 같은 테마의 드라마를 펼친다고 한다. 왕가위의 작품에서 극 중 인물들은 맺어지지 않은 사랑에 아파하고 그래서 ‘화양연화’를 그리워하며 현재를 버티고는 했다. 왕가위는 이들을 대신해 영화로, 드라마로 사랑을, 기억을, 시간을 봉인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왕가위와 그의 작품은 클래식의 지위에 만족하지 않고 여전히 현재형으로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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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허남웅(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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