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김지은의 모두 함께 읽는 책
[김지은의 모두 함께 읽는 책] 먹먹한 슬픔을 먹다
<월간 채널예스> 2020년 10월호 『토마토』, 『달에서 아침을』
간결한 몇 개의 문장만 있는 이 그림책에서 가장 멋진 대목은 바로 여기다. 어떤 이유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이는 엄마를 만나지 못한 지 꽤 되었다. 속상한 일이 있어도 뛸 듯이 기쁜 일이 있어도 더 이상 엄마를 부르며 대문을 열고 달려 들어와 말할 수가 없다. (2020.10.06)
날씨가 맑게 개었더라도 기분이 무거우면 세상은 흑백이다. 어깨가 축 늘어져서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오는 아이가 있다. 아이가 걷는 길에는 가로수가 울창하지만 모두 먹빛이다. 학교에서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나보다. 대문 앞에 서서 가만히 엄마를 불러본다. 대답이 없다. 이 방 저 방 하나하나 문을 열어본다. 그러나 텅 비어 있다. 아이는 가방을 내려놓고 툇마루에 앉아 중얼중얼 말한다. “오늘도 엄마는 없다.”
빨랫줄에 걸린 건 양말은 한 켤레뿐이고 그 양말은 아이의 것이다. 아이가 손으로 빨아서 널 수 있을 정도의 간소한 세탁물만, 그것도 아이 양말만 걸려있다는 것은 이 집에 어른의 손길이 뜸하다는 걸 보여준다. 돌보는 사람 없이도 마당의 수국은 활짝 피었는데 아이의 얼굴의 울적한 구김살은 좀처럼 펴지지 않는다. 이 마음을 어쩌면 좋을까. 바로 그때 아이는 냉장고 문을 열고 맨 아래 서랍에서 잘 익은 빨간 토마토를 발견한다. 엄마는 없지만 토마토는 있다.
그 다음부터 이 그림책에서는 아이가 토마토를 먹는 장면이 이어진다. 닿자마자 후루룩 빨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물컹한 완숙 토마토를 한 입에 먹는 아이의 두 뺨은 토마토처럼 붉다. 가지마다 주렁주렁 싱싱한 토마토가 열린 밭을 클로즈업하고, 엄마랑, 아빠랑, 할머니랑 둘러앉아 토마토를 따 먹던 날의 기억으로 건너간다. 아이는 말한다. “토마토를 먹고 나니 꽃이 피었다.”고 말한다. 토마토를 먹고 나니 “바람이 불고, 나무가 손을 흔든다.”고, 이제야 좀 정신이 들었다는 듯 털어놓는다.
간결한 몇 개의 문장만 있는 이 그림책에서 가장 멋진 대목은 바로 여기다. 어떤 이유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이는 엄마를 만나지 못한 지 꽤 되었다. 속상한 일이 있어도 뛸 듯이 기쁜 일이 있어도 더 이상 엄마를 부르며 대문을 열고 달려 들어와 말할 수가 없다. 하지만 아이는 엄마와 나누어 먹었던 빨간 토마토를 먹으면서 그 먹먹한 마음을 스스로 달랜다. 토마토를 먹고 나니 혼자 있는 시간도 견딜만한 것 같고, 토마토를 먹고 나니 엄마처럼 나무가 “오늘도 잘했다. 다 괜찮다. 걱정 마라.”하며 손을 흔들어주는 것 같아서 살짝 편안해진다. 슬픔은 하늘의 구름에게 훌훌 건네준다. 그 구름도 토마토를 닮았다.
이단영 작가는 슬픔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슬픔은 스멀스멀 밀려오는 것,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는 것이다. 토마토의 붉은 색처럼 번지고 토마토의 과육처럼 뭉그러지면서 안으로 파고드는 감정이다. 정말 슬플 때는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다. 이미 온몸이 슬픔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열면 울음이 쏟아질 것 같아서 입을 꾹 다물게 된다. 그러나 슬픔은 터뜨려야 한다. 책 속의 토마토는 아이의 슬픔 대신 툭 터뜨려진다. 쓱쓱 문질러 그린 것 같은 그림에 토마토의, 슬픔의 질감이 살아있다. 토마토가 슬픔을 대속한다. 표지의 작가 이름을 보면 ’이’의 이응 위에 티끌이 묻은 것처럼 토마토 꼭지가 그려져 있다. 속상한 일이 있으면 훅 잡아당기라고 만들어둔 것 같다. 작고 작은데 눈에 띈다.
이수연 작가의 『달에서 아침을』에는 학교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토끼가 나온다. 토끼를 대놓고 따돌리는 반 아이들은 셀 수 없이 많은 이유를 들어 토끼를 싫어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들은 사실이 아니고, 토끼는 이에 대해 항의하는 것을 포기했다. 말을 포기한 것은 토끼만이 아니다. 이 상황을 지켜보는 곰도 말 한 마디 꺼내지 못한다. 토끼를 지켜주고 싶지만 같이 괴롭힘을 당할까 봐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피해자의 침묵과 방관자의 침묵은 값이 다르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학교 폭력의 방관자인 곰의 독백이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곰에게 토끼가 먼저 손을 내민다. 토끼는 비겁한 곰을 화려한 상상의 식사에 초대한다. 하루 중 토끼가 가장 힘겨워하는 시간은 다들 몰려가서 밥을 먹는 점심시간이다. 집에 오면 토끼는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라는 영화를 틀어놓고 오드리 헵번의 아침식사 장면을 지켜보며 그 날카로운 긴장을 푼다. 먹는 시간이 안겨준 고통을 누군가가 편안히 먹는 장면을 보면서 이겨낸다. 길고양이 호두에게 우유를 가져다주고 그 고양이가 걱정 없이 먹는 것 보면서 아픔을 다스린다.
작가는 잔뜩 날이 서 있는 인물들의 감정을 나타내기 위해 붓의 자국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방식을 택했다. 뒤엉킨 길처럼 정렬되지 않은 붓의 흔적이 독자의 상처도 흔든다. 독자들은 한때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거나 방관자였거나 가해자였을 것이다. 그런 독자들은 모두 옆모습으로 그려지는 토끼의 절반만 나타난 표정을 보면서 온 마음을 짐작하는 어려움을 감수해야 한다. 대충 문질러 그린 쑥색의 교복들에 비해서 소매가 단정한 토끼의 잠옷이나 꽈배기 무늬를 넣어 짠 곰의 스웨터는 독보적으로 정교하다. 토끼와 그의 친구 곰을 공격하는 교실 내 파시즘의 아둔함에 비해 ‘독립적 개인’의 존엄성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이렇게 보여주는 것 같다. 작가가 차용한 음악과 영화들은 스며들 듯이 서사와 어우러진다.
마지막 면지에서 토끼와 곰과 길고양이 호두는 달에서 아침 식사를 먹는다. “잘 먹고 잘 산다.”는 말은 공연히 있는 것이 아니다. 잘 먹을 수 있는 편안한 마음이 사람을 살린다. 먹어서 슬픔을 잠재우기도 한다. 두 권 모두 조금 울 수 있다는 경고와 함께 슬픔을 누그러뜨리고 싶은 사람에게 권한다.
추천기사
관련태그: 토마토, 달에서 아침을, 김지은의 모두 함께 읽는 책, 채널예스, 추천도서, 도서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