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얼굴은 어디에 있나
엄지손톱만한 대표성의 힘
나를 대표할 무언가가 없다는 건 퍽 서글프다. 사람을 대표하는 모습은 대개 힘센 무리에 속한 사람들이다. 사람을 대표하는 남자, 사람을 대표하는 백인, 사람을 대표하는 시스젠더, 사람을 대표하는 비장애인.(2020. 07. 03)
<채널예스> 기사를 자주 보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기사마다 이미지가 꼭 하나씩은 들어간다. 대면 인터뷰는 작가의 사진이, 책 리뷰라면 표지 등이 들어가게 마련인데, 지금 읽고 있는 '솔직히 말해서'처럼 책과 조금 벗어난 이야기를 하는 칼럼은 섬네일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스톡 사진(비축된 사진. 사진 플랫폼(사이트)에서 저작권에 문제가 없는 사진을 모아놓은 것)을 넣는다.
섬네일(thumbnail)은 엄지손톱이라는 의미에서 출발했다. 엄지손톱만큼 작은 모양으로 전체 이미지를 축약하거나, 관련 내용을 쉽게 알아챌 수 있도록 대표적인 내용을 보여주는 그림을 의미한다. 국립국어원에서 공모해 얻은 순화 단어로는 '마중그림' 이나 '미리보기 사진' 등이 있다. 웬만한 인터넷 기사는 쉽게 내용을 파악할 수 있도록 섬네일 이미지를 넣고 있다.
기사를 올릴 때 이 이미지들을 구하는 것도 중요한 업무다. 주로 상업적 이용이 가능한 사진을 모아놓은 언스플래쉬나 픽사베이 등의 이미지 사이트에서 찾는다. 예를 들어 비에 관해 쓴 글을 올린다면 'rain'이나 'gloomy' 'city' 등 관련된 짤막한 키워드를 넣고 무작위로 스크롤을 내린다. 늘 쓰던 이미지에서 벗어나야 하고,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이미지도 제외하고, 글의 분위기와도 맞고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도 비슷한 사진을 찾아내는 날은 운이 좋다. 그러나 늘 걸리는 문제가 하나 있는데, 나는 이걸 동양인 관문이라고 멋대로 이름 붙여 놨다.
스톡 사진이라고 하는 것들은 대개 동양인 관문을 통과하기가 어렵다. 말인즉슨, 인터넷에 무료로 퍼져 있는 정보의 대부분은 영어 사용자를 대상으로 한 사이트에 있다. 모델 또한 서양권 인종의 얼굴이 대부분이다. 화자가 비 오는 날 가족과 함께 삼겹살에 김치찌개 먹는 이야기를 하는데, 무료 이미지 사이트의 'raining' 'dinner' 'family' 만으로는 어느 수염 덥수룩한 신사가 따뜻한 조명이 켜진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서 아리따운 금발 여성과 함께 와인잔을 기울이는 사진이 나올 뿐이다. 내가 원한 건 이 이미지가 아니다.
정 안되면 키워드에 'asian'을 추가한다. 'music asian' 'picture asian' 'happy asian'. 오기가 생겨서 동양인을 찾아보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보는데 또 마음에 안 든다. 동양인의 눈으로 보면 모델이 서양권에 사는 일본인/이란인/중국인... 이라는 게 자동으로 분류된다. 나는 한국 이야기가 하고 싶다고! 찜찜한 마음으로 간신히 모델의 인종이 특정되지 않을 만큼의 뒷모습이 나온 사진을 쓴다. 그리고 나도 독자도 필자도 알고 있다. 저 이는 분명 서양인이다. 동양인은 모두 빨리빨리 민족이라 저런 배경에서 저런 등을 보이며 한없이 차가운 눈바닥에 앉아 있기는 엉덩이가 시렵다. 아니, 이것도 나의 인종적 편견인가…
사진이 주제인 칼럼에는 나무 테이블에 놓인 감성 넘치는 사진기 사진을 쓴다. 누군가 렌즈에 눈을 대고 사진을 찍는 모습을 표현한 그럴싸한 사진을 찾았지만, 그의 머리카락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노란색이다. 사물이 나온 사진이라도 한국어 관문이 남아있다. 일요일이 주제인 칼럼이라고 치자. '일요일'이라고 적힌 수첩의 이미지는 찾을 수 없지만 'Sunday'라고 적힌 달력 사진은 쉽게 구할 수 있다. 영어를 못 알아보는 사람도 있을 텐데, 코로나 바이러스를 이야기하면서 'stay at home'이라는 단어를 굳이 써야 할까? 오늘도 나는 한글로 된 칼럼에 영어가 나오는 이미지를 써야 한다.
한국에서 운영하는 스톡사진 사이트도 물론 많다. 그러나 거기에 나오는 한국인 모델의 환한 미소와 인위적인 포즈는 결이 맞지 않는다. 갑자기 '빛은 사랑 빛은 행복~' 같은 배경음악이 깔리는 한국수자원공사나 한국관광자원공사의 홍보용 칼럼이 되어버린다.
물론 잘 찾아보면 적절한 사진이 있을 것이다. 시간과 돈이 있으면 가능하다. 한국의 이태원 밤 9시를 표현하고 싶다면 직접 나가서 사진을 찍어오면 된다. 그러나 내 근무시간은 정해져 있고, 노력에 비해 좋은 사진이 보장되지도 않는다.
나를 대표할 무언가가 없다는 건 퍽 서글프다. 사람을 대표하는 모습은 대개 힘센 무리에 속한 사람들이다. 사람을 대표하는 남자, 사람을 대표하는 백인, 사람을 대표하는 시스젠더, 사람을 대표하는 비장애인. 농구가 글의 주제가 되었다고 해 보자. 즐거움을 표현하기 위해 휠체어에 앉은 사람의 사진을 쓸 수는 없는가? '장애인이 농구하는 칼럼'이라면 매우 적절하겠지만, 건장한 남성이 주말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농구를 했다는 이야기를 쓰려면 어쩐지 어색하다.
대표성은 어째서 늘 다수자들이 지고 있는가. 오바마 대통령 당시 인턴 단체사진과 트럼프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의 인턴 단체사진이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걸 본 적이 있다. 오바마 대통령 재임시 인턴 사진은 각자 다양한 피부색으로 웃고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과 함께 찍은 50명 넘는 사람들이 모두 환하게 백인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각자 얼굴은 아주 작게 나온다. 저 엄지손톱만 한, 아주 작은 차별의 힘. 그 작은 크기의 힘을 보태고 싶지 않아서 오늘도 동양인 관문을 세워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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