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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하기 싫은 날
<월간 채널예스> 2020년 4월호
나는 영향을 잘 받는 사람이지, 나는 가스라이팅을 당한 적도 있는 사람이고, 그리고 나는 늘 반성을 해, 혹시 나도 애인에게 가스라이팅을? (2020. 04.06)
언스플래쉬
너 똑똑하잖아. 그런 것 아니잖아. 대화가 되잖아 그러니까 뭘 아는 것처럼 행동하지 마 오빠가 차근차근 알려줄 게 다 널 위한 거야 너 나 못 믿는 거야? 농담인데 왜 정색을 하고 그래 (중략) 이러니까 네가 그동안 남자들한테 차인 거야 나니까 지금까지 같이 사귀는 거야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 연인 사이에 이런 말도 못 해? 우린 이 세상 누구보다 제일 가까운 사이잖아. 너 생각하는 건 나뿐이야 잊지 마 그러니까 너 오빠한테 잘해
- 이소호, 『캣콜링』 중 「오빠는 그런 여자가 좋더라」 일부
말을 많이 한 날이면 자기 전에 생각을 잔뜩 한다. 말은 입을 열면 날아가 버리니까 주로 이불 발차기를 한다. 아 그 말 왜 했지, 네가 무슨 세상사를 통달한 도사야? 어쩜 그런 말을 ……. 믿을 수 없을 만큼 구린 말들. 술 마신 다음 날이면 후회는 아침부터 시작된다. 누군가 술 취한 나와 진지한 대화를 하게 된다면 한 번쯤은 날 때리고 싶을 것이다.
자기 전에는 주로 자기반성을 했다. 내가 했던 말에 작대기를 좍좍 긋고 수정하거나 다신 꺼내지 않으리라 지워버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떤 날은 불쑥 화가 났다. 다들 나처럼 반성하나? 아니면 나만 이렇게 매일매일 반성해야 하는 부족한 인간인 건가? 친구에게 물었다. 너는 자기 전에 이런 생각 해? 반성해? 친구의 대답은 아니? 그러면 울컥해서 그럼 나도 안 할래! 하면 응, 하지 마. 그럼 난 또 생각하는 거다. 아무도 하라고 하지 않았는데 왜 혼자 난리…? 아 피곤하다…….
며칠 전 산책하다가 애인에게 대뜸 화를 냈다. 마스크 속에서 못된 말들이 막 튀어나왔다. 우린 관심사가 아예 다르다, 너랑 산책한 시간 동안 재밌는 이야기는 두 개밖에 없었다, 유머 코드도 안 맞는다, 무심하다, 다른 연인이 부럽다 등등. (욕먹을까 봐 순화한 것) 사실 잊을 만하면 내가 문제 삼는 것들이었다. 애인을 세워 놓고 우리가 잘 맞는 게 무엇인지 따져 물었다. 애인은 그동안 몇십번 반복해왔던 말을 또 차근차근 내뱉었다. 그리고 자신이 노력해서 고칠 수 있는 부분을 지적한다면 충분히 할 수 있겠지만 나라는 사람의 성향과 쌓아온 취향, 성격 등을 지적한다면 무력해진다고 했다. 얼굴을 바꿀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네가 감수할 수 없다면 헤어져야 한다고 했다.
감수? 네가 감수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물었다. 나와 싸울 때 언성을 높이지 않는 것,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치지 않는 것, 나라는 사람을 자신과 다른 인격체로 받아들이는 거라고 했다. 네가 기본적으로 날 함부로 대하는 것도 받아들이고 있다고. 문제 삼지 않는다고 했다.
함부로 한다고? 깜짝 놀라 물었다.
“내가 널 함부로 해? 언제?”
“날 길바닥에 세워 놓고 갑자기 우리가 잘 맞는 게 뭔지 읊어보라고 하는 것부터 함부로 대하는 거지.”
그리고 차분하게 “넌 내가 어떻게 하면 편안할지, 즐거울지, 행복할지 생각해?” 물었다.
순간 여기서 더 세게 나가면 크게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고 애인에게 사과했다. 나도 감수하겠다고, 그리고 생각하겠다고.
다음날 친구와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가스라이팅(타인을 통제하고 정신적으로 황폐화 시키는 심리학 용어)을 당한 지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고 갉아먹는 걸 가장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나는 홀린 듯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공포감이 들었다. 나는 영향을 잘 받는 사람이지, 나는 가스라이팅을 당한 적도 있는 사람이고, 그리고 나는 늘 반성을 해, 혹시 나도 애인에게 가스라이팅을?
급히 친구에게 얼마 전 애인과의 싸움을 털어놓았다. (이때는 애인의 허락을 구했다) 그날 일을 아주 자세하게 이야기했는데, 말을 하는 중간중간 친구의 싸한 표정을 느꼈고 나 역시 ‘아 뭔가 말하면서 정리가 되는 느낌인데?’ 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이야기를 무사히 마치며 친구에게 말했다. “그런데 내가 이 이야기를 왜 한 줄 알아? 내가 애인한테 가스라이팅 당하고 있는 건 아닌지 무서워서…….” 친구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더 무서운 건 뭔 줄 알아? 애인이 아니라 네가 가스라이팅 하고 있다는 거야.”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사람은 배운다. 나는 사람을 자기 방식으로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사람을 여럿 봐왔다. 내가 피해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안 그럴 줄 알았다. 내가 이렇게 영향을 잘 받는 사람인데, 내가 당했던 사람인데, 어떻게 남에게 그럴 수 있겠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내 입맛대로 맞추려고 하는 것, 당연한 것처럼 지적하고 화내고 그래서 상대로 하여금 “아 이 사람 말이 맞는 건가?” 헷갈리게 만드는 것. 이성적이고 쉽사리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애인도 초반엔 나의 (그럴듯해 보이지만 따져보면 막무가내인) 논리에 흔들릴 때도 있었다. 나는 사랑하는 애인을 내게 최적화된 인간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게 사랑인 줄 알았고.
사람은 다면적이다. 내 안에는 다정함과 순수함도 결핍과 피해의식도 함께 둥둥 떠다닌다. 그래서 상대가 내게 완전히 굴복하거나 맞춰줄 때 애정과 만족감을 느낀다. 아기처럼.
난 이렇게 한심한 사람이다. 적어도 연애에서만큼은. 나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 내 장점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가끔 칭찬하고 전시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매번 그랬듯이 나는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날 밤부터 지금까지 밤에 또 생각을 잔뜩 한다. 자기반성보다는 감사 인사를 한다. 난 종교가 없기에 내가 나에게 하는 인사다. 자기 전에 막 감사기도하고 이런 거 오글거린다고 생각했었는데 누군가를 통제하려고 하는 내가 더 오글거린다. 너나 잘 통제해…….
요새는 잠을 잘 잔다. 나는 좀 모자라고 이상할 때도 있지만 악질은 아닌 거 같다. 그래서 좋다.
캣콜링
이소호 저 | 민음사
고발과 폭로를 통한 심리적 진실이 시집의 한 축이라면 다른 한 축에는 내면의 고통을 예술 작품으로 분출해 내는 ‘전시적’ 진실이 있다. 거칠고 공격적이면서도 지적인 이소호의 시 세계는 격정적이고도 이지적인 시인들의 계보를 새롭게 이어간다.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출판사에서 5년간 일했습니다. 10년 넘게 기분부전장애(경도의 우울증)와 불안장애를 앓으며 정신과를 전전했습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를 지었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떡볶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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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캣콜링』이 민음의 시 253번으로 출간되었다.(심사위원 김행숙, 정한아, 조재룡) 2014년 《현대시》로 등단한 이소호 시인은 첫 번째 시집 『캣콜링』을 통해 가장 새로운 ‘고백의 왕’을 선보인다. 2018년에 탄생한 ‘고백의 왕’은 성폭력의 유구한 전통과 끔찍한 일상성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