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오점수

찰나의 깨달음과 반복적인 수행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왜 한 번의 깨달음으로 충분하지 않은 것일까? 반복은 고루하고 지겹고 없어 보이는데. (2020. 02. 28)

guilherme-romano-ixFSJYwPWb8-unsplash.jpg

언스플레쉬

 

 

한 번의 깨달음으로 족할 줄 알았는데 사는 것이 그렇지가 않다. 깨지고 부서지며 깨달은 뒤에도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반복한다면 아직 제대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고 당신은 말할 지도 모르겠다. 제대로 안다면 제대로 행동하지 않을 리 없다고. 하지만 나는 문 틈 사이 반짝이던 햇빛을 기억하듯이 깨달음을 확신한다. 당시 나는 더 분명할 수 없도록 확실히 깨달았다. 다만 그 뒤로 따라야 하는 반복적인 수행을 잊었다. 그로 인해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만 했다. 무한히, 계속해서, 처음인 것처럼.

 

하루는 매일 반복되고 그 안에서 나는 새로운 것을 깨닫고 또 다짐한다. 다짐은 쉽고 간편하고 있어 보인다. 운동하겠다는 약속, 욕하지 않겠다는 약속, 작은 것을 사랑하겠다는 약속. 나와의 약속은 쉽게 체결되고 또 파기된다. 내가 나를 존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다른 모습의 나를 더 반기기 때문이다. 깨닫는 나만큼 즉흥적인 내가 좋다. 즉흥적인 나만큼 꾸준한 나도 좋다. 꾸준한 나만큼 재미있는 나도 좋다. 나는 나의 다양한 모습을 골고루 사랑하여 내가 다짐을 하도록 또 어기도록 허락한다. 곧 이것이 나의 아이덴티티가 된다.

 

박주연 : 다짐과 어김. 행위할 때는 몰랐지만 이렇게 명사로 만들고 보니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나의 정체성, 나는 그런 나를 폐기하고 새로운 나를 쌓고 싶어진다.

 

박주연 : 다짐과 지킴. 한결 마음에 든다. 하지만 더 마음에 드는 것은 이것이다.

 

박주연 : (없음). 무엇으로도 정의되지 않는 편이 더 좋다. 하지만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것이 다짐과 어김의 단순한 변주는 아닐까? 가볍고자 하는 열망, 잡히지 않고자 하는 열망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나에 대한 유치한 변명처럼 느껴진다. 나 원래 그런 사람이야, 하고 도망치는 것처럼. 결국 나는 다시 돌아간다.

 

박주연 : 다짐과 지킴. 이것이 좋겠어.

 

새로운 다짐이 추가된 셈이다. 다짐한 것을 지키겠다는 다짐, 그러니까 다짐에 대한 다짐. 가벼운 흥분과 열감이 느껴진다. 다짐했으니 새로운 일상이 시작될 것 같은 환상 때문이다. 그러나 안다. 다짐만으로는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안다. 

 

한 번의 깨달음이 기적 같은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것에 매번 실망한다. 그렇다면 깨달음은 무엇을 이르는 말인가? 반복은 이미 지겹도록 하고 있는데, 이런 반복을 끝내기 위해 깨달음을 원한 것이었는데. 찰나로 지나가는 것 뒤에 드리워진 긴 반복의 그림자 안에서 나는 또 길을 잃는다. 저는 지구력이 없어서 운동을 못하는 사람인데요, 사는 것도 지구력이 없어서 자신이 없어지려고 해요. 깨달음도 삶도 구루도 대답이 없다. 다만 어느 피아니스트가 말한다. 매일, 이 모든 걸 다시 터득해야 한다고.

 

아침의 첫 동작들을 의식하면 나머지 하루의 움직임 전체가 평온해진다. 그러면 몰입할 수 있다. 매일, 이 모든 걸 다시 터득해야 한다. 초심자인 채로 잠에서 깨어난 나는 모든 순간에 귀를 기울인다. 이 소중한 침묵 위에 독주회가 세워진다. 시간이 흐르면서 축적되는 이 다양한 에너지가 오늘 저녁에 부화할 첫 음에 풍성한 밀도를 안겨줄 것이다. 이제 나는 잠을 깰 때의 침묵이 콘서트가 탄탄하게 닻을 내릴 토대를 마련해준다는 걸 안다. 이 내면의 평화에 주의를 기울이면 시간에 개입할 수 있다. 시간을 다듬고, 빻고, 협상할 수 있다.

 

- 『이제 당신의 손을 보여줘요』  , 알렉상드르 타로.

 

 

 

 

 

이제 당신의 손을 보여줘요Alexandre Tharaud 저/백선희 역 | 풍월당
거울 속의 이미지에서 시작해 꿈속의 이야기로 끝나는 이 작고도 다채로운 에세이는 피아니스트의 내면을 가장 풍부하게 담아낸 기록 중 하나로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배너_책읽아웃-띠배너.jpg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0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박주연(도서 MD)

수신만 해도 됩니까.

이제 당신의 손을 보여줘요

<알렉상드르 타로> 저/<백선희> 역12,600원(10% + 5%)

피아니스트들의 내면은 여전히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작가들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피아니스트들은 그 내면을 충분히 묘사할 수 있을 정도로 열렬히 글을 쓰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글솜씨가 좋은 피아니스트들은 여러 명 있지만, 그 솜씨를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데 사용한 이는 없었다. 혹은 충분히 성공적이지 못했..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오늘의 책

AI, 전혀 다른 세상의 시작일까

유발 하라리의 신작. 호모 사피엔스를 있게 한 원동력으로 '허구'를 꼽은 저자의 관점이 이번 책에서도 이어진다. 정보란 진실의 문제라기보다 연결과 관련 있다고 보는 그는 생성형 AI로 상징되는 새로운 정보 기술이 초래할 영향을 분석했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한국 문학의 지평을 더욱 넓혀 줄 이야기

등단 후 10년 이상 활동한 작가들이 1년간 발표한 단편소설 중 가장 독보적인 작품을 뽑아 선보이는 김승옥문학상. 2024년에는 조경란 작가의 「그들」을 포함한 총 일곱 편의 작품을 실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들과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한 권에 모두 담겨 있다.

주목받는 수익형 콘텐츠의 비밀

소셜 마케팅 전문가 게리 바이너척의 최신작. SNS 마케팅이 필수인 시대, 소셜 플랫폼의 진화와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콘텐츠 제작을 위한 6단계 마케팅 전략을 소개한다. 광고를 하지 않아도, 팔로워 수가 적어도 당신의 콘텐츠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다.

삶의 끝자락에서 발견한 생의 의미

서른둘 젊은 호스피스 간호사의 에세이. 환자들의 마지막 여정을 함께하며 겪고 느낀 경험을 전한다. 죽음을 앞둔 이들과 나눈 이야기는 지금 이순간 우리가 간직하고 살아야 할 마음은 무엇일지 되묻게 한다. 기꺼이 놓아주는 것의 의미, 사랑을 통해 생의 마지막을 돕는 진정한 치유의 기록을 담은 책.


PYCHYESWEB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