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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에 빠졌다

이 만남이 나는 꽤나 흡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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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작가는 아주 새롭고 한글을 낯설게 사용한다. 마치 번역된 글을 읽는 것 같다. 문자를 읽는 느낌이 아니라 코드화된 사고의 고속도로를 따라 내달리는 느낌이 든다. (2019.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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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스플래쉬

 

 

새로운 작가를 알게 되었고 아주 푹 빠졌다. 책 한 권을 시작하자 멈추기가 어려웠고 그 책을 끝내고선 왕성한 허기로 작가의 다른 책을 찾아 나섰다. 다행히 읽을 것들이 더 남아 있었다. 나는 계속 읽어 나간다. 읽는지 핥는지 모를 지경으로. 원래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왜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어요, 나는 짐짓 난처하다는 듯이 취향을 전시한다.

 

그 아이가 가진 가장 큰 문제는 또래의 인간들 가운데서 자신이 특별하게 잘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오만함이 세영이 같은 종류의 아이들이 가진 고질적 적폐, 모든 문제의 시작이다. 일이 꼬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엉뚱한 식인종의 한 끼 간식이 되고 마는 가여운 결말.
- 김사과, 『0 영 ZERO 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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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내게 변했다고 말했다. 나는 아주 크게 충격에 빠졌다. 내가 변절했다고? 그리고 한 편으로, 변하지 않는 게 살아있는 건가?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 담글 수 없다는 말로 유명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이다. 우리는 YOLO의 시대를 탕진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변했다는 말은 나의 마음을 아슬아슬하게 만든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와 "난 다시 태어나면 나무가 될 거야"를 모두 접하며 자랐으니 변화에 대하여 제법 가치중립적인 교육을 받았다고 할 법도 한데 그렇지가 않다. 나는 항상성을 유지하고 싶다. 예측 가능한 사람이고 싶다. 그럼으로써 안정적이고 싶다. 삐- 삐-. 안정성이라니, 그게 당신에게 가당키나 한 말이오? 누가 내 머리에서 호통을 친다. 세대론을 믿는 건 아니지만 우리 세대를 말하라면 3불 세대라 하겠다. 불안정, 불신, 불.. 하나는 나도 몰라, 난 전문가도 아니고 세대론을 믿지도 않으니까. 어쨌건 불안정한 건 이 세대와 사회의 문제이기 때문에 비단 내 탓만은 아니다. 그런데 모두가 불안정한 곳에서 불안정이 제 의미를 획득할 수 있을까? 아, 생각났다! 불평등! 3불로 하여 우리는 결여 세대로 남는다. 내 안에 있는 커다란 구멍은 도무지 채워지지가 않는다. 나와 내 생각은 한 자리에서 뭉근하게 졸여지지가 않고 나는 어떤 엑기스도 만들지 못한 채 이리저리 휘발한다. 휘발! 나는 액체에서 기체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그 과정을 멈출 수가 없다. 변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변한다. 

 

새로운 작가는 아주 새롭고 한글을 낯설게 사용한다. 마치 번역된 글을 읽는 것 같다. 문자를 읽는 느낌이 아니라 코드화된 사고의 고속도로를 따라 내달리는 느낌이 든다. 아마도 일인칭 시점의 소설을 처음 접했고 그 다음으로 택한 것이 에세이이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국 이곳에서 나는 타인이다. 하지만 한국에 가면 내부자가 되는가? 이 도시는 나의 도시가 아니다. 하지만 어떤 도시가 나의 도시인가? 나는 이곳에서 어색하다. 하지만 어색하지 않은 장소가 있는가? 결국 지금 내가 깨닫는 것은, 이 낯설음에서 벗어나는 오직 한가지 방법은, 더 낯선 나라로 도망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케이프타운, 더블린…, 어디든. 외국어가 주는 낯섦에서 벗어나는 것은 또 다른 이해할 수 없는 외국어로 도망치는 것이다. 언어들을, 가능한 많은 언어들을 뒤죽박죽 섞을 것.
- 김사과, 『설탕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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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와 저녁으로 무엇을 해먹을까 고민하다가 냉장고를 조금 정리했다. 세 줄 남은 언 베이컨이 나왔다. 언제 얼렸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얼린 것이니 먹어도 좋을 것이다. 미리 가로로 얇게 썰어 역시 얼려둔 마늘이 있다. 통마늘과 편마늘, 다진 마늘이 비닐에 담겨 냉동실 문 1층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언제 이렇게 기특한 짓을 했대? 언 재료들을 듬뿍 넣고 크림 파스타를 만들었다. 양파는 오늘 시장에서 사온 것을 하나 전부 썰어 넣었다. 역시 듬뿍. 명란젓이 오래 냉장고에 있어 반 스푼 정도 더했다. 반 스푼이라 말하면 그렇게 느껴지지 않겠지만 이것도 듬뿍이라 할 수 있겠다. 없어도 그만이었는데. 0이었을 것을 1로 만들었으니 2에 비하면 적을지언정 존재론적으로는 더 큰 과잉이다. 있는 것을 조금 더 있게 하는 것과 없는 것을 있게 하는 것. 나는 없는 것을 있게 만들 수 있는가? 로제의 색깔이 났지만 전혀 토마토 맛이 나지 않는 파스타였고 맛있었다. 냉장고에서 요리 가능한 재료만 나왔다면 자취생의 냉장고라 할 수 없다. 나는 딱 일 인분 남은 카레를 결국 버려야 했다. 두부를 넣고 만든 카레는 금방 변한다. 변한다 ? 상한다 ? 버린다. 나에게 이 단어들은 거의 동의어에 가깝고 어떻게 죄책감 없이 카레를 버릴 수 있는지, 스스로가 잔인하게 느껴진다. 왜 다 먹지 못할 만큼 음식을 많이 하는 거야? 낭비가 이 시대의 정의니까. 또 무슨 헛소리야. 정의, 정의. 어떤 뜻이든 낭비가 이 시대의 정의라니까.

 

새로운 작가의 에세이는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외국 체류 경험을 쓴 에세이가 매우 잘 어울린다. 하루키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레이프 프룻을 처음 알았다. 번역가는 왜 자몽이라고 옮기지 않았을까? 자몽도 충분히 이국적인데. 그녀는 자주 시리얼을 먹는다. 에세이를 읽으면서 절반은 짜릿하고 절반은 몽롱했다. 약 기운이 돌았다.

 

마침내 호텔을 빠져나온 그는, 그러나 별달리 갈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밥을 먹어야 하나? 하지만 코카인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먹을 수 없다. 하지만 코카인을 많이 했다고 해서 밥을 먹으면 안 되는 것일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 것이 아닐까? 문제는 배가 고프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코카인을 너무 많이…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코카인을 굉장히 많이 했다고 해서 굳이…
- 김사과, 광장』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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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가든 그녀는 소비한다. 스웨터를 사고 코트를 사고 식료품을 사고 티켓을 산다. 한 여름의 무더위에서 100켤레의 샌들을 신고 벗는다. 그녀에게 숙소를 제공하는 다국적 외국인들은 대체로 한량이고 그들은 젊음과 시간을 낭비한다. 잠깐, 둘은 결국 같은 것이 아닌가? 그녀의 글은 이를테면 소비의 기록이다. 돈을 쓰고 시간을 쓴다. 마음을 썼던가? 아니, 그건 잘 모르겠어. 가볍고 쿨하다. 그녀도, 그녀의 소설 속 인물도. 그들은 좋은 물건을 사고 먹고 입는다. 사실 무엇을 해도 좋아보인다. 침대에서 빈대가 나왔다고 해도 오 역시 찐뉴욕을 경험하고 왔군, 하고 경탄을 보낸다. 내가 미쳐버렸냐 하면 그건 아니고, 그녀와 그들은 이미 가볍고 쿨한 사람이기 때문에. 빈티지와 동묘앞 구제 시장이 가장 힙할 때가 있는 것처럼. 물건의 가치는 결국 사람의 성질에 달려있다. 포르투갈에서 만난 한 떼의 사람들은 새벽의 대화 중 자신들이 대다수의 포르투갈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다. 그로써 발생하는 나와 그들 사이의 거리감! 신나게 달리던 고속도로에서 나는 갑작스레 출구를 잃는다. 방금 지난 저 출구로 나갔어야 했는데. 차선을 잘못 탔어. 영원히 고속도로는 즐거운 기억으로만 남을 수도 있었는데. 그녀는 그들과 새벽에 술을 마시며 대화하고 멋진 글을 써내지만 난 아니야. 난 잠을 자야 해. 그리고 출근을 하지. 자몽과 그레이프 프룻만큼 우리는 멀다. 그들은 가볍고 쿨하고 찐이지만 나는 아니다. 눅눅한 김 같은 기분이 되어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간다. 이불 속이 너무 춥지만 온기로 데울 수밖에. 어쩐지 체온마저도 부족한 사람이 된 느낌이다. 불온, 그게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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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주연(도서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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