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김진형의 틈입하는 편집자
버지니아처럼, 레너드처럼
<월간 채널예스> 2019년 9월호 틈입하는 편집자, 아홉 번째 편지
단단한 비관에도 불구하고 버지니아처럼 아름답고 행복하고 용맹하기를. (2019. 09. 02)
〈디 아워스〉의 첫 장면처럼, 그녀는 호주머니에 돌멩이를 가득 채우고 흐르는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수현,
단단한 비관으로 기어코 희망을 만들어내는 이들, 우리는 그런 출판인이 되자고 결의했었지요. 자본주의에 경도된 현실은 우리를 끊임없이 흔들고 불안하게 만듭니다. 현실은 섣부른 낙관을 처방하고 성공에 이르는 처세의 비결을 거래합니다. 자본주의로부터 배태된 계급사회 속에서 무산자와 소수자들은 거리로 내몰리고 광장은 붕괴되어갑니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함께 공부하며 다짐했었죠. 불안과 성공, 그 무엇에도 쉬이 현혹되지 말자고,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건 섣부른 낙관이 아니라 단단한 비관이라고, 세상을 향한 비관적 태도를 견지하되 끝내 삶을 긍정해내는 현실주의자가 되자고, 거기서부터 시작하자고.
“정복당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고, 너를 향해 내 몸을 던지노라, 오오 죽음이여!”
버지니아 울프의 비석에 새겨진 이 문장은, 그녀가 마흔여덟에 썼던 소설 『파도』의 마지막 문장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모임은 늦겨울에 시작하여 첫봄 언저리에 끝났는데, 마지막 몇 주는 버지니아의 책들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지막 모임에서 영화 〈디 아워스〉를 보았고 저 문장을 함께 나눴지요.
버지니아는 평생 비극과 싸웠습니다. 〈디 아워스〉의 첫 장면처럼, 그녀는 호주머니에 돌멩이를 가득 채우고 흐르는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시신은 20여 일 후에 발견되었고 화장된 후 집 앞 느릅나무 밑에 뿌려졌습니다. 그녀는 우울 성향의 가족력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열다섯 살 때 어머니가, 스물두 살 때 아버지가, 스물네 살 때 친오빠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버지니아의 연구자로 알려진 영문학자 루이즈 디살보에 의하면, 버지니아는 평생 성적 외상으로 인한 트라우마와 싸웠다고 합니다. 백일해를 앓고 난 직후인 여섯 살 때부터 아버지가 죽기 전까지 두 의붓오빠들로부터 지속적인 성추행을 당했습니다. 아버지가 죽고 난 후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진 후에야 그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버지니아는 어린 시절부터 우울증과 정신이상 증세를 앓았고 그 증상은 점점 심해졌습니다. 현실에선 부재했던 어머니의 존재가 항상 자신을 따라다니며 뭔가 말하는 환청 증세를 평생 겪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출판사들은 무명의 여성 작가에게는 좀처럼 기회를 주지 않았고, 결국 그녀의 첫 책 『출항』 은 자신을 성추행했던 의붓오빠 제럴드 덕워스가 설립한 출판사에서 출간해야 했습니다.
버지니아를 둘러싼 세상은 비극적이었지만 그녀의 생애는 결코 비극적이지 않았다고, 우리는 이야기하였지요.
버지니아를 둘러싼 세상은 비극적이었지만 그녀의 생애는 결코 비극적이지 않았다고, 우리는 이야기하였지요. 그녀는 평생 극심한 고통을 앓으며 세상과 싸웠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직후부터 노동자들을 위한 야간대학에서 강의했고, 여성 참정권 운동에 참여했으며, 병세가 악화되어 첫 번째 자살을 시도한 이후에도 기어코 첫 책을 출간하고 남성 본위의 세상 속에서 편견과 싸우며 평생을 작가와 비평가로 살아냈습니다. 남편 레너드에게 남긴 유서에서 버지니아는 자신이 다시 미쳐가고 있다고, 이번에는 회복될 수 없을 것 같다고 고백하면서도, “나는 어느 두 사람도 우리만큼 행복할 수 없었다고 생각해요”라고 썼습니다. 그녀는 강물 속으로 투신하는 그 순간에도 그녀의 문장과 닮아 있었습니다. 죽음을 향해 몸을 던지면서도 정복당하지 않겠다고 굴복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아름답고도 결연한 문장처럼.
우리는 버지니아의 책들을 읽으며 내내 그녀의 시선과 사유와 문장에 매혹되었지요. 특히 우리는 그녀의 곁을 지켰던 남편 레너드 울프에게 주목했습니다. 레너드는 버지니아의 남편이었고 편집자였고 비평가였으며, 버지니아의 책들을 펴낸 출판사의 발행인이었습니다. 레너드는 예술가, 철학자, 지식인 등이 활동하던 불룸즈버리 그룹에서 버지니아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청혼하지만 버지니아는 거절합니다. 그러나 레너드는 포기하지 않고 8년을 구애한 끝에 결국 그녀와 결혼하게 됩니다. 버지니아는 결혼의 전제 조건으로 두 가지를 제시했었습니다. 첫째, 작가의 길을 가려는 자신을 위해 공무원직을 포기해달라는 것. 둘째, 잠자리를 요구하지 않을 것. 레너드는 이 조건을 흔쾌히 수용하고 새로운 출판사를 설립하여 버지니아의 책들을 출판하기 시작합니다(그들이 세운 호가스 출판사는 T. S. 엘리엇, 캐서린 맨스필드의 작품들과 프로이트 전집 등을 출간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버지니아의 편집자 레너드처럼 온갖 비극을 통과한 책들을 만들어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버지니아의 일기 속 레너드는 성실하고 사려 깊으면서도 날카로운 비평을 아끼지 않는 편집자였습니다. 버지니아는 자신의 첫 독자인 레너드를 신뢰했고 무엇보다 그와의 관계를 행복해했습니다. “우리 마음의 깊은 곳은 위협받지 않는다. 레너드와 나는 너무너무 행복했다. 사람들이 말하듯이 ‘지금 죽는다고 해도’ 등등.” 그리고 버지니아가 남긴 유서이자 마지막 연서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 모든 행복은 당신이 있어 가능했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당신은 한없이 참을성이 있었고, 또 믿을 수 없으리만치 잘해주었어요. 나는,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누가 나를 구해낼 수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당신이었을 거예요.”(이상 『울프 일기』 에서)
“레너드는 버지니아를 구해내지 못한 것일까요”라고 나는 물었고, “레너드는 버지니아를 결국 구해낸 것 같아요. 우리가 지금 버지니아를 읽고 있으니까요”라고 수현이 답했지요. 단단한 비관이 하나의 희망으로 도달한 순간이었습니다. 레너드는 버지니아가 세상을 떠난 지 28년 후 화장된 후 느릅나무 밑 그녀의 자리에 뿌려졌습니다.
언젠가 딸아이가 읽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특히 『자기만의 방』은 여러 번역본을 나란히 놓아두었어요.
저희 집 서가 한쪽에 버지니아의 책들이 꽂혀 있습니다. 언젠가 딸아이가 읽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특히 『자기만의 방』 은 여러 번역본을 나란히 놓아두었지요. 아이들이 커갈수록 저의 욕심은 조금씩 더 커집니다. 제 아이들이 언젠가 버지니아의 모든 책들을 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들이 단단한 비관에도 불구하고 버지니아처럼 아름답고 행복하고 용맹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저는 버지니아의 편집자 레너드처럼 온갖 비극을 통과한 책들을 만들어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단단한 비관으로 기어코 희망의 책들을. 수현도 그럴 수 있기를 빕니다.
자기만의 방버지니아 울프 저/이미애 역 | 민음사
여성 작가들을 문학사 안에 위치시킨 최초의 시도이자 성을 중심으로 문학적 유산을 논의한 최초의 이론서라는 역사적 의의를 넘어 여러 페미니즘 비평의 다양한 관심사를 아우르는 여성 문학 비평의 정전이 되었다.
편집자로 일한다는 자부심을 잃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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