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살아있고 싶어서
내적 댄스 해방 운동
‘도대체 왜?’라고 물으면 모르겠다. 음악이 나오면 절로 어깨가 둠칫 둠칫 움직인다. ‘산이 거기에 있으니 오른다’는 기분이 이런 걸까. (2019. 05. 17)
나에게는 남들이 전혀 모르는 내가 있다. 엄마와 언니 앞에서만 잠금 해제되는 ‘댄스 모드-정연’이다. ‘댄스 모드-정연’을 작동시키기는 어렵지 않다. 몸이 움직일 수 있는 적당한 공간과 음악만 있으면 준비 끝. 발라드도 힙합도 EDM도 좋다.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음악이 나오면 제일 먼저 반응하는 건 머리다. 개를 피해 도망치는 닭처럼 머리가 선율이나 리듬에 맞추어 앞뒤로 움직인다. 이윽고 갈비뼈를 중심으로 상반신이 흐느적 흐느적 움직이기 시작한다. 몸통에서 사지로 번지며 몸짓은 점점 격정적으로 변하고, 혼자 고조되어 팔다리를 마구 휘젓다 스스로 지치면 댄스 모드 OFF. 다시 모두가 아는 나로 돌아간다.
그렇다고 어릴 적부터 춤을 배웠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초등학생 때 댄스 스포츠 방과후 수업에 잠깐, 중학생 때 언니따라 재즈댄스 학원에 잠깐 다녔지만 길어봐야 6개월을 못 넘겼더랬다. 그러니까 위에서 말한 몸짓은 정말 몸-짓이다. 댄스 모드라고 하기도 민망한 몸부림. ‘도대체 왜?’라고 물으면 모르겠다. 음악이 나오면 절로 어깨가 둠칫 둠칫 움직인다. ‘산이 거기에 있으니 오른다’는 기분이 이런 걸까. 이렇게 말하니 뭐 대단한 댄서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서 나도 억울할 지경이다. 하지만 별다른 설명 없이도 ‘내적 댄스’라는 말이 대중적으로 통하는 사실을 보면 흥을 주체 못하는 건 나만이 아닌 듯하다.
언스플래쉬
크리스마스 철이 되면 온갖 데에서 퍼져 나오는 캐롤(Carol)도 원래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행위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한다. 캐롤이라는 단어는 옛 프랑스어 카롤르(carole)에서 유래했는데, 카롤르는 중간 중간 발을 구르며 원 모양으로 추던 춤을 의미한다. 위 사진과 같은 모습이랄까. 조반니 보카치오도 『데카메론』에서 캐롤을 부른다고 하지 않고 캐롤을 춘다고 표현한다. 심지어 엄숙하기로 유명한 중세에도 영국의 한 사제가 교회 앞에서 캐롤을 추고 부르는 신도들 때문에 잠을 설쳤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그 때에는 크리스마스뿐만 아니라 축복일마다 캐롤을 추었다고 하니, 성직자가 아니었으면 참지 못했을 것도 같다.) 동양 어느 나라에서 마당을 밟으며 노래를 메기고 받을 때 서양 어느 나라에서는 캐롤을 추고 불렀다고 하니 고성방가, 아니 춤은 인간의 본능인 셈이다.
그래서일까 아니면 그런데일까. 언제부턴가 춤이 원시적인 것으로 여겨지면서 정해진 자리, 이를 테면 무대나 무도회장과 같은 공간에서만 출 수 있는 것으로 바뀌었다. 캐롤은 15세기 즈음 춤과 노래가 떨어진 형태로 자리잡기 시작한다. 15세기 유럽은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르네상스로 넘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시기다. 문득 푸코가 떠오른다. 푸코는 권력은 몸의 대상화를 지향한다는 전제를 강조한다. 권력은 가장 먼저 몸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몸이야말로 권력이 조장해나가는 어떤 이념적 가치에도 환원될 수 없는 고유함과 실존성의 지표이기에 권력의 감시와 통제는 인간의 몸을 훈육하려는 집요한 시도와 결합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세상을 바꾼 철학자들』, 373쪽).
출근하자마자 퇴근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도 몸의 자율성이 회사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학교와 회사는 우리 몸과 시간을 통제한다. 1985년에 만들어진 영화 <백야>에서부터 2018년에 만들어진 영화 <스윙키즈>까지, 많은 영화가 자유를 부르짖는 수단으로 춤을 선택한 이유도 어떠한 이념에도 환원될 수 없다는 몸의 속성 때문일 테다. 두 영화의 주인공 모두 이념 전쟁 중에 상대 편 문화에 속하는 춤을 춘다는 이유로, 또는 금지된 춤을 춘다는 이유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영화 <스윙키즈>
그럼에도 <스윙키즈>의 주인공 북한군 로기수는 미국의 춤 탭댄스를 멈추지 않는다. 멈출 수 없다. 본능이다. "그(탭) 소리만 들으면 밤낮으로 심장이 끓어 번지는 거이 생각만 해도 신바람이 나” 탭 비슷한 소리에도 홱홱 돌아버리던 로기수는 결국 이념 때문에 외면했던 탭댄서이자 미군 하사에게 고백한다. “탭댄스라는거이 참 사람 미치게 만드는 거드만.” 이토록 순수한 고백이라니! 영화를 보며 깨달았다. 내가 춤추는 이유. 춤을 추면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그냥 살아있는 기분이다. 춤의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호흡을 고르며 해야하는 요가나 승패가 있는 구기 종목 등 다른 운동과 달리 춤은 목적이 없다. 완성도가 높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즐겁다. 그냥 미칠 수 있다. 가장 어려운 단어 ‘그냥’이 그냥 된다.
몇 달 전, 춤 학원을 등록했다. 이번 기회에 제대로 배워보자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남의 눈치 안 보고 마음껏 춤출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이유가 더 컸다. 내적 댄스를 정기적으로 해방시켜 주어야 하는데 독립해 살면서 공간이 좁아져 도통 그럴 기회가 없는 탓이다. 안전 문제는 물론이고 유흥을 즐기는 편도 아니라 클럽은 선택지에서 제외. 펍은 몸을 흔들기보다는 서로의 수다에 집중하는 분위기였다. 오랜만에 찾아간 대학가 술집에서는 잘못 맞춰진 퍼즐 같은 기분. 그렇다고 카페나 거리에서 춤출 수는 없었다. (혹시 춤추는 카페 아시는 분은 연락주세요.)
그래서 한 도시 장터에서 스윙댄스를 가르쳐주고 함께 추었을 때, 두고두고 행복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캐롤이니 푸코니 하면서 거들먹거린 이유는, 맥주 한 잔 없이도 흥에만 취해 몸을 흔들 수 있는 건전한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던 셈이다! 우리는 자주 춤을 추어야 한다. 흐느적대다가 격렬하게 흔들고 또 팔다리를 되는 대로 쭉쭉 뻗어 휘저어 보아야 한다. 푸코 말마따나 실존성의 증표인 몸을 가는 대로 움직여야 한다. 자주 ‘그냥’ 살아봐야 한다. 그냥.
영화 <스윙키즈>
대체로 와식인간으로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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