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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살 수 없어서

<월간 채널예스> 2019년 5월호 『100 인생 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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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밑줄을 긋지도 못한 채 나는 가만히 책을 덮었다. (2019. 05.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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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생을 다시 살고 싶어서.’ 김애란 작가의 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  에서 사람들이 아이를 낳는 이유에 대해 표현한 문장이다. 이즈음의 내 상태를 설명하려면 여기에 한 구절을 덧붙이면 된다. ‘기억하는 생은 물론이고.’

 

아이들을 키우다보면 내가 아이였을 때의 기억들이 저절로 소환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이들이 커갈수록 그렇다. 예를 들어 친구와의 문제로 고민할 때 혹은 수학시험에서 어이없는 실수로 틀려놓고는 오답노트에 똑같은 잘못을 반복해놓았을 때 등등. 특히 나는 수학에 대해서라면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든데 ‘평범하던 아이는 어떻게 수학을 포기하게 되는가?’라는 주제에 대해 누구보다 핍진한 논픽션을 쓸 자신이 있는 왕년의 수포자였기 때문이다. 수학점수 앞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 아이를 바라보고 있으면 뭐랄까 오랫동안 덮어둔 내면의 그림자와 불시에 맞대면하는 기분이 든다. 

 

공식적으로는 고1 교과서의 이차함수에서 장렬히 마음을 접었지만, 그 기피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초등학교 시절의 연산부터 문제의 싹이 보였었다(는 걸 나만은 알고 있다). 그때 그 싹을 다르게 대했더라면, 좀 더 진지한 자세로 쪼그려 앉아 들여다봤더라면 지금 내 인생이 뭔가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나는 손에 쥐고 있던 볼펜을 앞뒤로 흔들었다. 아이가 황당해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게 외쳤다.

 

“정신 좀 차려. 이게 네 공부니, 내 공부니? 응?”

 

그러니까 그건 거짓말이었다. 그건 내 인생과 네 인생이 뒤죽박죽 한데 뒤섞인 채 커다란 냄비 안에서 끓고 있다는, 그 냄비가 넘쳐버릴 것 같아 괴롭다는 자기고백에 다름 아니었다.

 

“죄송해요.”

 

아이가 천천히 대답했다. 퍼뜩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밤, 하지현 선생의 책을 꺼내 읽었다.
 
투사란 자기 내면의 열망을 무의식적으로 다른 대상에게 적용하는 방어기제의 하나다. 투사를 하면 내 안에 담아놓지 않아도 되니 당사자는 편안하다. 투사된 욕망이 실현되지 않으면 상대를 탓할 수도 있으니 편리하기도 하다. (중략) 우리나라 부모들에게 아이는 분신, 즉 ‘확장된 자아(extended ego)’ 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아이의 성공을 자신의 성공으로, 아이의 실패를 자신의 실패로 여겨 울고 웃는다. 당사자인 아이보다 더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경우도 많다...아이는 지금의 실패만 아파하지만 부모는 그 욕망을 이루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와 미래까지 내다보니 더더욱 아플 수밖에 없다.

(하지현,  『엄마의 빈틈이 아이를 키운다』   91-92쪽)

 

확장된 자아라니. 최근 어떤 언어도 이토록 적확하고 날카롭게 가슴을 후벼 파지는 못했다. 차마 밑줄을 긋지도 못한 채 나는 가만히 책을 덮었다.  

 

끊임없이 상대를 의식하는 한, 이쪽이나 저쪽이나 행복하지 않은 것은 비슷할 것이다. 백수린 작가의 소설  친애하고 친애하는』  은 외할머니-어머니-딸로 이어지는 모녀 3대의 이야기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어머니 대신 외할머니의 돌봄 아래에 자라온 딸의 마음속에서 엄마는 어렵고 복잡한 대상이다. 딸의 독백 중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아마도 그런 식의, 어쩔 도리가 없는 마음이 되어버린 것은 그즈음 내가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엄마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예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36쪽) 딸은 또 이렇게도 말한다. ‘결국 그 침대 위에서 “나는 이렇게 엄마를 실망시키는 사람으로 남을 거야”라고 말하며 울음을 터뜨렸다.’(48쪽) 

 

『100 인생 그림책』  은 이탈리아의 작가 하이케 팔러가 글을 쓰고 일러스트레이트 발레리오 비달리가 그림을 그려 만든 책이다. 0세부터 100세까지의 인간의 삶을 각각 한 컷의 그림과 짧은 문장으로 담았다.

 

-8세 : 네 자신을 점점 더 믿게 될 거야.

-12세 : 벌써 엄마 아빠보다 잘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졌구나.
-21세 : 네가 어릴 때 쓰던 방이 얼마나 작은지, 놀랐지?
 
39세의 그림에는 비행기 기내에서 무릎위에 아이를 올려 안고 있는 한 남성이 있다.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은 한 번도 없었을 거야.’ 40세의 그림은 비행 중 비상상황에 대한 대처법 안내도다. ‘누군가를 이토록 걱정한 적도 한 번도 없었을 거고.’ 46세의 여성은 아이의 어깨에 한손을 얹은 채 강가에 서 있다.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게 어떤 기분인지 이제야 진짜로 배우고 있구나.’

 

그 누군가란 그저 자식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닌 듯하다. 지난날의 자신 또한 거기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아무도 인생을 다시 살 수는 없다. 자식이라는 타인을 통해서는 더더욱. 지난날의 아쉬움과 후회는 결국 자신의 손으로 떠나보내야만 한다.  

 

51세는 말한다. ‘이제는 부모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구나.’

 

46세와 51세의 어딘가를 서성이며 나는 결심한다. 아주 가까운 곁의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지켜봐주겠다고. 함부로 휙 안을 헤집지 않으며, 결코 더 멀리로 도망치지 않겠다고. 그러려면 일단 수학! 저 수학 앞에서부터 담대해져야 한다는 건 큰일이다.   
 
 


 

 

100 인생 그림책하이케 팔러 저/발레리오 비달리 그림/김서정 역 | 사계절
내 삶의 다음 장은 어떤 모습일까? 그 두근거림으로 책장을 넘겨보자. 때로는 달고, 때로는 쓰며 가끔은 느끼지 못하고 지나쳤을 인생의 맛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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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이현(소설가)

1972년 서울 출생으로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2002년 제1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이후 단편 「타인의 고독」으로 제5회 이효석문학상(2004)을, 단편 「삼풍백화점」으로 제51회 현대문학상(2006)을 수상했다. 작품집으로 『낭만적 사랑과 사회』『타인의 고독』(수상작품집) 『삼풍백화점』(수상작품집) 『달콤한 나의 도시』『오늘의 거짓말』『풍선』『작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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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것은 모든 엄마들의 당연한 바람이자 욕망이다. 문제는,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엄마들이 너무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도 늘 자신이 부족하고, 뭔가 놓치고 있고, 더 해주어야 한다는 불안과 죄책감에 시달린다는 것. 언론은 하루가 멀다 하고 아이에게 올인하는 슈퍼맘들을 소개하고, 수많은 자녀교육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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