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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고양이
너는 세상을 어떻게 견디지, 혼자?
우리는 얼마 동안 그렇게 앉아있었다. 그러다 내가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질문을 하고 말았다. (2019. 01. 24)
언스플래쉬
나는 안으로 조금씩 부스러지고 있었다. 멀쩡해 보였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다. 오래된 감정들로 딱딱해진 응어리에 미세한 균열이 생긴 게 분명했다. 손을 넣어 안을 만져볼 도리가 없으므로, 좀 걷기로 했다. 목도리와 외투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었다. 파주의 겨울밤은 고요하고 바람이 없어 춥지 않았다. 개미 한 마리도 없구나, 혼잣말을 하며 무작정 걸었다.
좀 쉴 요량으로 벤치에 앉았다. 떠오르는 상념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을 때였다. 고양이 한 마리가 사뿐사뿐, 벤치를 향해 걸어왔다. 고양이를 향한 내 짝사랑은 꽤 오래 되었다. 단순한 호감이 아니라 경외감에 가까운 감정이 고양이를 볼 때마다 들었다. 우습게도 나는 고양이 앞에 서면 늘 심장이 뛴다. 좋아서, 그리고 두려워서(경외!). 사실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몰라 그냥 쩔쩔맸다.
가까이에서 보니 베이지색 털에 납작하게 코가 눌린 페르시아고양이었다. 떠돌이 길고양이인지, 근처 주택의 고양이인데 잠시 외출한 건지 가늠이 안 됐다. 경계심이 없고 모양새가 깔끔한 것을 보아 후자일 가능성이 있었다. 고양이는 내게 눈을 찡긋 감아 보이더니 벤치 위로 뛰어올라왔다. 둘이 벤치에 나란히 앉게 되었다. 엉덩이는 내 쪽을 향해 두고, 밤의 가운데를 응시하는 듯 시선을 멀리 둔 고양이가 내 옆에 있다니. 겨울밤의 호사였다.
밤을 두려워하는 고양이는 없다. 고양이는 밤의 야경꾼, 밤을 다스리는 여왕이다. 내 옆에 앉은 고양이 역시 품위를 잃지 않고 우아하게 앉아있었다. 모든 동작에 서두름이 없고, 지체하지도 않는다. 장 그르니에는 <고양이 물루>라는 산문에서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한다.
“짐승들의 세계는 침묵과 도약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짐승들이 가만히 엎드려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장 그르니에 『섬』 37쪽.
침묵과 도약으로 이루어진 존재. 어쩌면 이 아이를 만나려고 여기까지 걸어온 것일지도 모르겠군. 작은 목소리로 나비야, 하고 부르니 침묵이 돌아온다. 등선이 이토록 우아한 동물이 또 있을까. 등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역시 침묵. 벤치에 고양이와 둘이 앉아있으니 시끄러운 마음이 고요해졌다. 나는 입 밖으로 꺼내면 금세 누추해지고 마는 소소한 일들을 고양이 앞에 털어놓았다. 울적한 기분에 대해 이야기했다. 고양이는 잠자코 내 얘기를 들어주었다. 가만히. 보고 있지 않지만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우리는 얼마 동안 그렇게 앉아있었다. 그러다 내가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질문을 하고 말았다.
“너는 세상을 어떻게 견디지, 혼자?”
그 애는 일어나더니, 폴짝 뛰어 벤치에서 내려갔다. 내게서 2미터쯤 거리를 두고 자리에 엎드린 고양이.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마, 그리고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은 하지 마. 그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멀어진 고양이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리 와, 내 곁에 다시 앉아 보렴, 그 애를 불러봤지만 내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 애는 어둠을 고요히 응시하고 있는 자기 뒷모습을 한동안 더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가볍게 일어나 떠나버렸다. 뒤도 안 돌아보고 표표히, 밤을 가로질러 갔다.
고양이는 내게 질문을 던지고 떠났다. 혼자 견디는 법,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존재하는 법, 밤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법을 궁리해 보라고.
외투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리고 집을 향해 걸었다. 조금은, 용기가 생긴 것 같았다.
섬쟝 그르니에 저/김화영 역 | 민음사
철학적 사유라 해서 거창한 주제가 아니라 개 한마리의 죽음에서 떠 올린 일상적 추억,튀니지의 작은 해변도시에서 발견한 꽃 핀 테라스,그리고 지중해 해안가의 무덤 같은 것들이 글의 소재다.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덕여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에 시 '얼음을 주세요'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속눈썹이 지르는 비명』『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가 있고, 산문집『소란』을 냈다.
<장 그르니에> 저/<김화영> 역7,650원(10% + 5%)
'섬'은 남프랑스 지중해의 쏟아지는 햇빛 아래 점점이 떠있는 섬과 사람들의 일상을 지극히 담담하고 서정적인 문체로 그리고 있는 책으로 '섬'은 다분히 철학적인 에세이로 채워져 있다.작가이자 철학자인 그르니에는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철학적 사유를 반짝이는 시적 영감에 담아냈다.철학적 사유라 해서 거창한 주제가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