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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 4년에 삶의 철학을 깨닫다

『아무튼, 발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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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와는 적정 거리의 유지가 중요한데, 바에 의지는 하되 의존하지 않아야 한다. 바에 기대는 습관을 버릴 때 센터에서 자유롭게 춤을 출 수 있다. 이건 마치 사람과 관계와도 같다고 저자는 말한다. (2018.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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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스플래쉬

 

 

『아무튼, 발레』 가 단언컨대 가장 재미있었다

 

어릴 때 누구나 자신의 멋진 모습을 그리는 꿈을 꾼다. 많은 소년이 무술을 잘 하는 고수가 되는 걸 꿈꾼다. 이소룡이 한창 인기를 얻을 때는 집집마다 쌍절곤을 들고 휘두르다 온몸에 멍이 드는 아이들이 넘쳐났고, 성룡의 취권이 나오자 여기저기 비틀거리며 교실 뒤에서 뒤뚱거리는 아이들이 있었다. 소녀들의 꿈은 발레가 아닐까? 백조의 호수의 곡에 맞춰 군무를 추고, 중력을 거슬러 하늘로 사뿐히 솟아오르면 맞은 편의 발레리노가 받아주는 모습을 그려보았을 것이다. 이런 로망은 더 이상 꿈은 없는 어른이 된 다음에도 기억의 잔재로 남아있을 것이다.

 

마흔을 눈앞에 둔 한 신문사 기자도 그랬나보다. 아무리 잠을 좋아하고 피곤해도 낮잠만 자는 건 더 이상 지겨워서 못하겠다고 느낀 어느 날, 무작정 발레 학원을 찾아가서 3달치를 선 결제를 했다. 일단 한 달만 등록하고 신중히 결정하라는 원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최민영의  아무튼, 발레』  는 이렇게 충동적으로 시작한 발레가 4년에 접어들면서 삶의 중심이 되어 회사를 다니는 이유는 발레를 계속할 월급을 벌기 위해서라 말을 할 정도가 되어버린 발레와의 연애기다. ‘아무튼 시리즈는’ 위고, 제철소, 코난북스 세 출판사가 ‘나에게 기쁨이자 즐거움이 되는 생각만해도 좋은 한 가지씩을 담은’ 150쪽 남짓의 문고본 도서다. 지금까지 피트니스, 서재, 택시, 잡지, 방콕, 쇼핑 등 10여 권이 출간되었다. 나는 그중 5~6권을 보았는데 <아무튼, 발레>가 개인적으로는 단언컨대 시리즈 중 가장 재미있었다.

 

발레를 입문해서 배워나가는 과정을 하나하나 짧은 글로 적어 내려갔는데, 생생하고 유머러스하다. 기본 복장인 레오타드와 슈즈를 사러 가서 벌어진 에피소드는 프랑스의 곡예사 쥘 레오타르가 멋진 동작을 보여줄 때 몸에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니트 재질로 고안한 팬티와 티셔츠가 하나로 결합된 옷이라고 유래를 설명하며, 프랑스어로 d를 묵음처리해서 이름은 레오타르지만 대부분 나라는 d를 발음해서 ‘레오타드’가 되었다는 소소한 정보를 전달한다.

 

그리고 막상 옷을 사러 가서 시착을 했더니 자신의 몸매가 가감없이 너무나 드러나 버려서 민망했던 거울에 비친 모습을 묘사하는데, “방금 전 뷔페에서 다섯 접시를 해치웠거나 2백그램짜리 소고기 안심 스테이크가 메인인 일곱 개 코스 요리를 앙트레부터 디저트까지 모두 해치우고 이제 막 커피를 마실 참이라고 해도 믿을 판”이라고 코믹(혹은 웃프게)하게 자신을 망가뜨리면서 써내려 갔다.

 

발레의 기본은 쭉쭉 뻗는 발이고, 이를 위해서 발 찢기는 필수다. 선생님은 너무나 유연하고 자연스럽게 몸을 스트레칭하지만, 초보자인 저자에게는 넘사벽이었다. 선생님은 앉아서 다리를 옆으로 하고 상체를 앞으로 보내면서 가슴이 아닌 배꼽을 땅에 붙이라는데, 막상 해보면 180도는커녕 150도도 겨우 벌릴 수 있고, 배꼽은커녕 아래 뱃살이 먼저 바닥을 터치한다. 이러니, 선생님은 수업이 끝날 때 돌아가면서 수강생의 다리 찢기를 해줄 때가는 공포의 시간이 된다. 스모 스쿼트 자세로 누워있으면 선생님이 안쪽 허벅지를 밝고 위에 서서 버티는 것이다. 고관절이 확 늘어나는데, 나는 읽고 있으면서 상상을 하고는 ‘이건 고문이잖아’라는 생각이 들며 소름이 쫙 끼칠 정도였다. 스트레칭은 몸이 따뜻할수록 잘되기에 수업이 끝나 이미 지쳐있을 때 하기에 더욱 힘들고 공포스럽다. 수강생들끼리 서로 품앗이하듯 찢어줄 때도 있는데 고마운 마음도 들지만 2할은 으스스한 마음이 든다는 묘사는 충분히 공감이 되었다. 이렇게 고통을 사서 얻으면서도 왠지 이제는 며칠간 스트레칭을 하지 않으면 허전하다고 하니, 발레라는 것이 얼마나 중독성 있는 것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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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스플래쉬

 

 

지금의 10%만 힘을 줘도 된다

 

몇 년 동안 발레에 열중하던 중 바를 잡고 바워크를 하는데, 선생님이 다가와 “목에 제발 힘을 빼세요. 이렇게 힘주면 목 두꺼워져요”라고 지적했다고 한다. 그동안 저자는 매번 힘을 너무 주고 운동을 한다고 지적을 받았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어려운 동작을 하는데 힘을 주지 말라는 게 더 이상한 게 아닌가 하는 억울한 마음도 들었지만, 시키는 대로 힘을 뺀다고 뺐는데도 여전히 “지금의 10%만 힘을 줘도 된다”는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러던 중 저자는 몸은 마음을 반영하고, 마음이 이끄는 만큼 움직이는데 자신의 삶이 너무 힘을 주고 살아왔기에 힘을 빼지 못하는게 아닐까, 발레에서만 힘을 너무 주는게 아니라 인생 전반이 힘을 너무 주고 살아왔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본질적 성찰을 하기 시작했다. 저자는 형제 중 맏이로 자랐고, 언제나 책임의식 속에서 살아왔다. 무진장 노력해서 대학에 가서 신문사에 들어가 기자가 되었지만 목표 달성을 기뻐하기보다 이루지 못할 때 자기혐오가 훨씬 컸고, 이 정도밖에 못하냐고 자신을 다그치기 일쑤였다. 오랜 시간 자신을 다그치기만 하면서 살다가 번 아웃을 경험한 저자는 출근하면 토할 것같이 울렁거리고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무작정 사표를 내고 회사를 나와 한 달간 쉬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후 필요 이상으로 공회전을 하는 자동차 같이 시속 60킬로미터로 가도 될 곳을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려서 나머지 40킬로미터만큼은 낭비를 해버린 채로 살아왔다는 것, 꼭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고 담담히 써내려 간다.

 

이후 강박적 업무 파악과 지나친 최선을 버리면서 공회전을 멈추기로 작정하고, 삶의 궁극적 의미를 찾는 것보다 일상의 소소한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물론, 이런 깨달음이 바로 실천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고 저자는 솔직히 고백한다. 아마도 이런 무의식적 요구가 저자를 발레의 세계로 이끈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했다. 대상관계이론 정신분석가 멜라니 클라인이 인간에게는 무의식적 회복 환상(restoration fantasy)가 있다고 했듯이 힘을 빼야만 제대로 힘을 줄 수 있는 발레를 몸으로 익히고 연습하면서 삶에서도 불필요한 힘을 빼는 연습을 할 수 있게 되었을 테니 말이다.
 
“높이 뛰어오르거나 다리를 차올리는 동작을 할 때도 힘이 필요한 부분만 힘을 주고, 나머지는 힘을 빼야죠. 그래야 한 단계 올라설 수 있어요.”

 

발레교습소의 상징은 전면 거울과 바(barre)다. 이걸 보면서 저자는 바와 몸의 관계에 대해 사유한다. 바와는 적정 거리의 유지가 중요한데, 바에 의지는 하되 의존하지 않아야 한다. 바에 기대는 습관을 버릴 때 센터에서 자유롭게 춤을 출 수 있다. 이건 마치 사람과 관계와도 같다고 저자는 말한다. 의존이라는 습관에서 벗어나야 온전히 자립할 수 있듯이 말이다. 이런 식으로 발레를 하면서 만나는 그 모든 것이 인생의 사유로 이어진 결과가 책 곳곳에서 발견된다.

 

저자는 오늘도 힘을 빼는 법을 배우기 위해 발레 학원에 간다. 몸이 가벼워지는 만큼 무거운 마음도 가벼워질 것이라 기대하면서 말이다. 아무튼, 발레는 우연히 시작한 발레가 어느덧 생활의 중심이 되어버리고, 몸 움직임에 몰두하면서 몸이 제대로 움직이는 만큼 자신감이 획득해 내는 과정을 보여준다. 또 집중하고 몰입하는 만큼 연습실 밖을 나왔을 때에도 발레를 중심으로 자신의 마음을 성찰하며 각성해가는 것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삶이 무료하고 그냥 그렇게 흘러가버리는 것 같이 느껴질 때 무엇이든 확 빠져들고 좋아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 생긴다는 것은 이처럼 어떤 철학적 성찰의 깊이까지 이어지게 만드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우리도 내년에는 무엇이든 재미있을 만한, 빠져들 만한 무엇을 한 번 찾을 수 있었으면 한다. 저자가 낮잠에서 깨어나 무엇에 홀린 듯 발레 교습소를 찾아 갔듯이.

 


 

 

아무튼, 발레최민영 저 | 위고
발레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는 얼추 비슷하게만 해내도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는데, 이젠 완벽하게 해내고 싶다는 열망에 불타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씨익 웃음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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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하지현(정신과 전문의)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읽는 것을 좋아했다. 덕분에 지금은 독서가인지 애장가인지 정체성이 모호해져버린 정신과 의사. 건국대 의대에서 치료하고, 가르치고, 글을 쓰며 지내고 있다. 쓴 책으로는 '심야치유식당', '도시심리학', '소통과 공감'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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