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 놀이터

‘대륙세력’이 되고자 했던 일본은 열심히 철도를 깔았다!

서구의 기계 문명을 상징하던 기차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조선에 이르게 되면 조선의 항구를 통해 일본에까지 내려가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기 때문이다. 러시아 입장에서 조선 철도의 광궤 설치는 아시아 침략의 완성을 뜻했다. (2018. 06. 01)

그림1-동청철도.jpg

동청철도(東淸鐵道)와 남만주철도(南滿洲鐵道). 청일전쟁 후, 러시아는 어부지리로 두 개의 만주철도부설권을 얻게 된다. 드디어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동쪽 끝의 바다에까지 닿게 된 것이다. 두 개의 철도노선은 한반도를 고깔모자처럼 싸고 있다. 지도 윗부분의 치타(Chita)에서 하얼빈(Harbin)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까지 연결되는 선이 동청철도다. 남만주철도는 하얼빈에서 아래쪽으로 포트 아서(Port Arthur)까지 이어진다. 포트 아서는 뤼순의 서양식 명칭이다.

 


1. 일본은 ‘해양세력’이 아니라 ‘대륙세력’이고자 했다

 

삼국간섭으로 인해 청일전쟁은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엉뚱한 주인이 번다’는 형국이 되었다. 여기서 ‘곰’은 일본이고, ‘엉뚱한 주인’은 러시아다. 아시아의 대국 청나라와 죽어라 전쟁을 했지만, 일본은 청나라의 랴오둥 반도를 입에 넣었다가 도로 뱉은 격이 되었다. 1896년, 청나라는 러시아에게 일본의 랴오둥 반도 침략을 앞장서 막아준 대가로 동청철도(東淸鐵道) 부설권을 허락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만주 노선인 동청철도는 만주 북부의 치타(Chita)에서 출발해 하얼빈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이어지는, 만주 지역을 관통하는 노선이다.

 

1901년에 완공된 동청철도는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을 서두르게 되는 원인이 된다. 바이칼 호 연안의 철도가 일부 미완성이었지만, 동청철도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완성을 뜻하는 것이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완성되면 러시아의 공격에 대항할 수 있는 일본군의 작전 범위가 크게 좁아지기 때문이었다.

 

청일전쟁의 결과를 러시아는 매우 즐겼다. 1897년 독일이 자오저우 만을 차지하자, 러시아도 청나라로부터 뤼순과 다롄을 25년 간 조차(租借)했다. 러시아가 그토록 원하던 부동항을 확보한 것이다. 뿐만 아니다. 하얼빈에서 뤼순에 이르는 동청철도 지선의 부설권도 확보한다. 하얼빈을 기점으로 동쪽과 남쪽으로 갈라지는 동청철도의 노선은 한반도를 고깔모자처럼 덮고 있는 모양이다. 한쪽은 압록강 끝, 다른 한쪽은 두만강 끝과 쉽게 연결된다. 조선의 철도가 연결되면 일본까지 내려오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 된다. 일본의 두려움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다.

 

몇 년 후, 러시아가 얻어낸 동청철도 지선은 일본 제국주의의 아주 효과적인 침략 수단이 되고 만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이 동청철도 지선을 ‘남만주철도(南滿洲鐵道)’로 이름을 바꾸어 만주 침략의 수단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하얼빈에서 뤼순 항으로 이어지는 남만주철도가 일본의 손아귀로 넘어가자, 러시아의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종착역은 블라디보스토크가 된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1916년에 겨우 완공하게 된다. 

 

1906년 창설된 일제의 남만주철도 주식회사의 초대 총재는 고토 신페이(後藤新平, 1857~1929)였다. 그가 작성했다고 알려진 「만주경영책경계(滿洲經營策梗槪)」에 따르면 ‘전후 만주 경영의 유일한 비결은 겉으로 철도 경영의 가면을 쓰고, 속으로 각종 시책을 단행함에 있다’고 되어 있다(고바야시 히데오, 임성모 역, 『만철』, 산처럼, 2004, 34쪽). 의사 출신인 고토 신페이는 1890년 독일에 유학하여 위생학, 세균학 등을 공부하고 돌아와 청일전쟁에 참여한 병사들의 검역을 책임지기도 했다. 청일전쟁 후, 일본이 차지한 타이완에서 철도, 수력발전, 상하수도 정비 등의 정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능력을 인정받았다. 러일전쟁이 끝나자 식민지 경영의 전문가로 발탁되어 ‘만철(滿鐵)’, 즉 ‘남만주철도(南滿洲鐵道)’의 경영을 책임졌다. 일본의 젊은 인재들은 새로 세워진 만철로 몰려들었다. 이후 만철은 일제의 대륙침략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게 되는 사건에도 고토 신페이가 한몫했다. 타이완의 총독부에서 일할 때, 고토 신페이는 유럽의 지정학을 집중해서 공부했다. 그는 유럽과 아시아를 하나의 대륙으로 보자는 ‘유라시아’ 개념에 크게 감동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대표로, 독일이나 러시아 같은 유럽 대륙세력과 연합해야 당시 새롭게 떠오르는 미국에 맞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독일, 러시아와의 관계가 복잡했지만 일본은 더 이상 해양세력이 아니라 대륙세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만철을 책임지던 고토 신페이의 생각이었다(이어령, 『지의 최전선』 , 81쪽).

 

섬나라이기에 영국과 더불어 해양세력이 당연한 줄 알았던 당시의 일본 정치가들에겐 고토 신페이의 대륙정책은 무척이나 낯선 것이었다. 그러나 육군이 지배하는 제국주의 국가였던 일본에서 고토 신페이의 철학은 매우 신선했다. 고토 신페이는 러시아와 손잡고 대륙세력으로서의 교두보를 만들자고 이토 히로부미를 설득했다. 설득당한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대신을 만나기 위해 하얼빈으로 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토는 하얼빈 역에서 러시아 재무대신을 만나 불과 25분 대화를 한 후, 안중근의 총탄에 고꾸라지게 된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가 죽었어도 섬나라 일본의 대륙세력을 주도하려는 꿈은 계속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유라시아 대륙과 드디어 연결된 것이다.

 

 

그림2-고토신페이.jpg

고토 신페이(後藤新平). 러일전쟁 후 러시아로부터 뺏어온 남만주철도의 운영 회사인 남만주철도 주식회사의 초대 총재는 고토 신페이였다. 그는 일본이 해양세력이 아니라 대륙세력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다시 청일전쟁 이후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일본은 청나라로부터 전쟁 배상금 3억 엔을 받고, 거기에 랴오둥 반도를 돌려주는 대가로 받은 환부금까지 포함하면 총 3억 6천만 엔을 얻었다. 일본은 이 배상금의 대부분을 육군과 해군의 군비 확장에 지출했다. 뿐만 아니었다. 철도와 제철소 건설에 국가 예산을 적극 투자했다. 일본 국내의 철도뿐만 아니라 대만과 한반도의 철도 건설에도 적극 나섰다. 10년 전 프로이센의 참모제도를 일본 육군에 전수해준 야콥 멕켈 소좌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독일 참모제도의 핵심은 철도를 이용한 신속한 병력 이동에 있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는 신속한 군대 이동 없이는 성립 불가능하다.

 

조선의 첫 번째 철도인 제물포와 노량진 사이의 경인선(京仁線)은 1899년 9월 18일에 개통되었다. 원래 경인선의 부설권은 1896년 3월 미국인 제임스 모스(James R. Morse)가 얻었다. 당시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상태였다.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불리는 시기다. 철도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던 일본은 몹시 당황했다. 조선의 철도 부설권을 얻기 위해 여러 통로로 조선 정부에 접근했으나,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으로 인해 일본에 대한 고종과 조선 대신들의 감정은 좋을 수 없었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모스에게 접근했다. 모스는 경인철도부설권을 얻고 공사는 이미 시작했지만, 철도를 완성하기 위한 자금 모집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897년 4월부터 시작된 모스와의 줄다리기 끝에 모스는 1898년 12월에 170만 2천 엔에 경인철도부설권을 일본에 넘겼다. 일본은 그 이듬해에 경인선을 개통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열차는 노량진에서 인천 제물포까지의 33.8킬로미터를 1시간 30분에 주파했다. 시속 20여 킬로미터로 달린 것이다.

 

 

그림3-경인철도 기공식.png

1897년 3월 22일에 거행된, 아주 소박했던 경인철도 기공식. 일본은 한반도 철도 건설에 목을 맸다. 만주 침략의 도구로 쓰기 위해서다. ‘철도를 통한 신속한 병력 이동’에 관한 탁월한 노하우를 가진 독일 참모제도를 일찌감치 배웠기 때문이다.

 

 

일본은 집요했다. 한편으로는 모스로부터 경인철도부설권을 가져오기 위한 협상을 진행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부철도부설권을 가져오기 위해 조선 정부를 압박했다. 결국 두 나라는 1898년 9월 경부철도합동계약(京釜鐵道合同契約)을 맺었고, 1901년 일본 도쿄에서 철도회사인 경부철도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일본의 대규모 민간자본이 조선의 철도 설립에 참여한 것이다.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선(京釜線)은 1905년 1월 1일 개통했다. 같은 해 9월 11일에는 일본 시모노세키(下關)와 부산을 연결하는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을 통해 일본 철도와 경부선이 연결되었다. 서울과 신의주를 잇는 경의선(京義線)은 1906년 4월에 완공되었고, 1908년 4월 1일에는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달리는 직통 급행열차인 융희호(隆熙號)가 처음 운행되기 시작했다. 동남쪽의 부산에서 서북쪽의 신의주까지 한반도를 관통하는 최단거리의 종단철도가 완성된 것이다.

 


2. ‘대륙세력’은 기차 철도부터 깔았다!

 

경부선과 경의선은 철저하게 러시아의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저지하고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한 일본의 군사적 목적으로 기획되었다. 그 의도는 열차의 궤간(軌間, track gauge)을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분명해진다. 궤간이란 선로의 간격을 의미한다. 궤간의 국제 기준은 1.435미터다. 이를 표준궤(標準軌, standard gauge)라 한다. 표준궤간이 1.435미터가 된 이유는 철도가 영국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기차가 상용화되기 전, 영국에는 말이 끄는 마차를 위한 레일이 설치되어 있었다. 주로 광산에서 썼던 트램로드(tramroad), 즉 광차(鑛車) 궤도다. 말들이 보다 많은 양의 석탄을 효과적으로 나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일반적으로 영국의 마차는 두 마리의 말이 끌었다. 말의 힘이 더 필요할 경우에는 네 마리의 말을 2열로 연결시켜 끌게 했다. 트램로드의 선로 폭은 이 마차의 바퀴 폭과 동일했다. 두 마리의 말 엉덩이가 서로 부딪히지 않고 달릴 수 있는 최소한의 간격이 1.435미터였다. 영국은 이 간격을 열차의 궤간으로 표준화시켰던 것이다.

 

표준궤간보다 더 넓은 것은 광궤(廣軌, broad gauge), 더 좁은 경우는 협궤(狹軌, narrow gauge)라고 한다. 광궤를 까는 기술적인 이유는 출력이 더 높은 열차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크고 많은 물건을 나르는 데 유리해진다. 오늘날 광궤는 러시아, 스페인, 핀란드, 캐나다, 아일랜드, 인도 등에서 볼 수 있다. 나치 독일에서는 궤간의 폭이 3미터에 달하고, 차량의 폭이 6미터인 초대형 광궤 고속열차 브라이트슈프어반(Breitspurbahn)을 계획한 적도 있다.

 


그림4-Breitspurbahn.jpg

나치 독일의 초대형 광궤 열차 브라이트슈프어반(Breitspurbahn). 궤간의 폭이 3미터에 달하고, 차량의 폭이 6미터에 이르는 초대형 열차다. 러시아를 제압하고 유라시아의 지배자가 되고자 했던 나치는 무조건 크게 만들었다. 레벤스라움(Lebensraum)이라는 지정학적 이데올로기의 천박한 구현이다.

 

 

러시아의 철도는 1.520미터로 광궤다. 러시아가 광궤로 했던 이유는 광대한 국토를 이동하기 위해서 더 많은 석탄과 물을 사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기술적 이유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정치적, 군사적 이유다. 독일과의 단절을 위해서였다. 프로이센, 즉 독일제국이 북유럽의 강자로 갑자기 부상했던 이유도 철도 때문이다. 이 철도를 군사전략적 목적에 따라 아주 효율적으로 활용했던 독일 군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러시아는 광궤를 선택했던 것이다. 표준궤를 사용하는 독일의 기차가 러시아 지역으로 쉽게 연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스페인도 군사적 이유 때문에 광궤를 설치했다. 스페인은 프랑스를 두려워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에게 호되게 당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철도와 같은 표준궤로 할 경우에는 또 다시 쉽게 침략당할 수 있을 거라는 두려움 때문에 광궤를 설치했던 것이다.

 

협궤는 표준궤보다 좁은 경우를 지칭한다. 폭은 아주 좁으면 0.6미터 이하로 내려가기도 한다. 협궤의 설치 이유는 단순하다.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교통량이 한산하거나 산악 지형에 주로 협궤를 설치한다. 건설비가 절약되고 빠르게 설치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그러나 열차속도에 제한이 있고, 안정성에도 문제가 있다. 서구열강은 자신들의 식민지에 대부분 협궤를 설치했다. 보다 효율적인 수탈을 위해 빠른 시간에 적은 투자로 많은 노선을 설치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식민지시대에 설치된 철도는 대부분 협궤다.

 

일본의 철도도 협궤로 출발했다. 일본 최초의 철도는 1872년 10월 14일 도쿄의 신바시와 요코하마 구간에 설치되었다. 일본이 협궤를 설치한 것은 경제적 이유가 크다. 도쿄-요코하마 구간은 영국의 자본과 기술로 설치되었다. 당시 철도 건설의 책임자였던 이토 히로부미는 영국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철도건설 비용을 마련했다. 그러나 열차의 선로는 영국 시스템인 표준궤가 아니라 영국 식민지에 주로 설치하던 방식인 협궤로 결정되었다. 오늘날 일본의 간선철도에는 여전히 협궤 열차가 달리고 있다. 그러나 고속으로 달려야 하는 신칸센과 같은 경우 표준궤를 사용한다.

 

일본에게 기차는 서구의 기계 문명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1854년 1월, 미국의 페리 제독(Matthew C. Perry, 1794~1858)은 2차로 일본에 들어갔다. 이때 페리 제독은 미국의 근대 산업화의 결과물들을 보여주며 개국 협상을 했다. 이 신기한 미국 물건에 모형 철도와 모형 증기기관차도 있었다. 모형 철도였지만 실제로 궤도 위를 스스로 움직이는 기차는 일본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전혀 경험하지 못한 기계 문명과의 첫 접촉은 공포에 가까운 경험이었다. 이때의 충격과 공포는 러시아의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대한 공포로까지 계속된다. 일본인들은 이 증기기관차를 유심히 관찰하고, 그 이듬해에 비슷한 모양의 기차를 자력으로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림5-일본페리모형기차.png

페리 제독이 선물로 가져온 모형 증기기관차를 올라탄 일본의 사무라이. 페리 제독이 타고 온 전함은 추상적인 공포였다. 바다 멀리 정박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앞에서 스스로 움직이는 기차는 일본인들에게 아주 구체적인 공포로 다가왔다. 이렇게 시작한 기차에 대한 일본인의 공포는 러시아의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대한 공포로 이어졌다.

 

 

조선 경인선은 표준궤였다. 그러나 표준궤로 설치해 실제 기차가 달릴 수 있을 때까지 우여곡절이 있었다. 1896년, 조선의 경인철도가 처음 계획되었을 때는 표준궤의 선로를 설치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는 한반도의 철도 건설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조선의 철도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와의 연결을 위해 광궤로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조선에 이르게 되면 조선의 항구를 통해 일본에까지 내려가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기 때문이다. 러시아 입장에서 조선 철도의 광궤 설치는 아시아 침략의 완성을 뜻했다.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는 경의철도부설권의 허가를 고종으로부터 얻었다. (프랑스가 얻었던 경의철도부설권은 조선 정부로 환원되었지만 러일전쟁 당시 일본이 군사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빼앗아갔다.) 프랑스는 러시아의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투자하고 있었던 까닭에 러시아의 이 같은 주장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이 시기에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고 있었다. 당연히 러시아의 압력을 거부할 힘이 없었다. 표준궤에서 광궤로 계획은 변경되었다. 그러나 러시아가 한반도에서 고종을 자신들의 공사관에 볼모로 잡아두고 독점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영국이나 일본, 미국이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이 나라들과의 마찰을 피해 러시아는 청나라로부터 가까스로 얻어낸 만주의 동청철도에 관심을 집중하기로 한다. 경인선은 다시 표준궤로 번복되었다. 그 사이 일본이 경인철도부설권을 가져가면서 일본식 협궤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결국은 표준궤로 건설되었다.

 

협궤냐, 표준궤냐에 관한 논의는 경부선과 경의선 설치와 관련되어서도 계속되었다. 결국 일본은 조선의 열차선로는 일본식 협궤가 아니라 표준궤로 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만주와 청나라 지역에 세워지고 있던 열차 선로가 대부분 표준궤였기 때문이다. 조선의 식민지화를 통해 대륙세력의 강자로 부상하고자 했던 일본은 한반도 철도를 대륙의 철도와 연결하여 러시아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광궤철도에 맞서고자 했던 것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0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문화심리학자이자 '나름 화가'.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에디톨로지> <남자의 물건>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등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집필했다. 현재 전남 여수에서 저작 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오늘의 책

AI, 전혀 다른 세상의 시작일까

유발 하라리의 신작. 호모 사피엔스를 있게 한 원동력으로 '허구'를 꼽은 저자의 관점이 이번 책에서도 이어진다. 정보란 진실의 문제라기보다 연결과 관련 있다고 보는 그는 생성형 AI로 상징되는 새로운 정보 기술이 초래할 영향을 분석했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한국 문학의 지평을 더욱 넓혀 줄 이야기

등단 후 10년 이상 활동한 작가들이 1년간 발표한 단편소설 중 가장 독보적인 작품을 뽑아 선보이는 김승옥문학상. 2024년에는 조경란 작가의 「그들」을 포함한 총 일곱 편의 작품을 실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들과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한 권에 모두 담겨 있다.

주목받는 수익형 콘텐츠의 비밀

소셜 마케팅 전문가 게리 바이너척의 최신작. SNS 마케팅이 필수인 시대, 소셜 플랫폼의 진화와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콘텐츠 제작을 위한 6단계 마케팅 전략을 소개한다. 광고를 하지 않아도, 팔로워 수가 적어도 당신의 콘텐츠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다.

삶의 끝자락에서 발견한 생의 의미

서른둘 젊은 호스피스 간호사의 에세이. 환자들의 마지막 여정을 함께하며 겪고 느낀 경험을 전한다. 죽음을 앞둔 이들과 나눈 이야기는 지금 이순간 우리가 간직하고 살아야 할 마음은 무엇일지 되묻게 한다. 기꺼이 놓아주는 것의 의미, 사랑을 통해 생의 마지막을 돕는 진정한 치유의 기록을 담은 책.


PYCHYESWEB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