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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이 좋아하는 맛

여성화 된 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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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이 좋아하는 식당 ‘분위기’는 허영이 둥둥 떠다니는 장소처럼 그려진다. 반면 시끌벅적하고 투박하고 토속적이며 편한 분위기에서 얼큰하고 뜨거운 뭔가를 땀을 흘리며 먹으면 ‘진짜 맛’이라는 묘한 관념이 있다. (2018. 0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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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 밥티스트 라이터Johann Baptist Reiter, <국수 먹는 여자>, 1849

 

 

줄리아 차일드가 쓴 프랑스 요리책을 최근 구입했다. 조만간 스칸디나비아 요리책을 구입하려고 이리저리 뒤적이고 있다. 내가 이렇게 요리책을 탐하는 날이 올 줄은 예전의 나는 미처 몰랐지. 어릴 때는 요리책에 아무런 흥미가 없었다. 그저 엄마들이 보는 실용서 정도로 생각했다. 여성지에 부록으로 오는 가계부와 세트를 이루는 책. 엄밀히 말하면 ‘책’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책이란 뭔가 지식을 담은 매체인데 요리책이 소개하는 요리를 지식이나 문화로 여기지 않은 탓이다.


요리책을 보기 시작한 건 서른 즈음 어디까지나 어학 공부를 위해서였다. 프랑스인 강사가 자꾸 조리법 적기를 시키는 게 아닌가. 초보자에게 요리책은 좋은 어학 교재다. 문장이 짧지만 요리책에는 꽤 다양한 어휘가 있다. 식힌다, 헹군다, 뿌린다처럼 일상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동사와 맛을 표현하는 형용사는 물론이고 수량을 표현하는 방식도 배우기 쉽다. 당장 내가 먹을 식재료와 요리의 이름을 알기 쉽고, 장을 보러 마트에 가서 낯선 채소를 활용하는 방식도 배울 수 있다.


요리에는 관심 없고 이렇게 어학교재로 접근하다가 서서히 음식과 각 지역의 식재료 등이 눈에 들어왔다. 언젠가부터 요리책을 스스로 돈을 주고 구입하기 시작했다. 요리책이 하나의 문화 유산임을 인식하면서부터다. 여성이 밥하기 노동을 맡고 있는 문제에 관심이 있다고 해서 요리 그 자체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다. 이건 묘한 차이다. 서른 즈음, 요리에 대한 나의 무관심이 실은 여성화된 노동은 물론이요 여성화된 취향에 대한 사회의 몰인정에 기반했음을 깨달아갔고 나는 요리책과 요리 잡지에 빠져 들었다. 요리책은 각 문화권의 식탁이 축약되어 정리된 사전이다.


나는 20대 초중반에 의도적으로 꽃그림을 회피하곤 했다. 여성스럽다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오히려 통념적인 여성성에서 거리두려고 했다. 뭔가 작고, 섬세하고, 온화한 분위기의 창작을 하면 꼭 이런 반응이 따라왔다. ‘역시 여자라서’. 어릴 때는 ‘역시 여자라서’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 했으나 점차 이는 질문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여성화 된 취향’은 일종의 낙인이라는 사실을.


여성이라는 집단이 ‘본질적으로’ 공유하는 ‘자연스러운’ 취향은 없다. 취향은 온전히 자연발생적인 성질이라기 보다 습관의 축적, 환경, 교육 등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다. 여성에게 주로 맡겨진 노동과 역할을 바로 여성들이 수행하기에 여성 일반의 취향이 남성 일반의 취향과 차이를 보일 수는 있다. 앞서 말했듯이 이는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본질적인 차이라기 보다 사회화의 결과이다. 또한 여성 일반의 취향이 열등한 성질로 평가받을 이유가 없다. 나아가 여성 집단 내부는 각각 취향의 차이와 종류가 다양하다.


취향의 젠더화는 여성화된 취향을 업신여기도록 이끈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이라는 말이 붙으면 일단 한 수 아래의 뭔가로 취급된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책, 여자들이 좋아하는 드라마, 여자들이 좋아하는 분위기, 여자들이 좋아하는 영화 등등. 입맛도 ‘여자들이 좋아하는 맛’이라 부르는 맛은 진짜 맛이 아닌, 가벼운 맛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취향이란 진정한 예술도, 진정한 맛도, 진정한 지식도 아닌 세계이다. 여성’문제’는 진정한 사회문제가 아니듯이.


한 중년 남성은 내가 모히토를 만들어 먹기를 좋아한다고 하니까 ‘여자들이 좋아하지’라며 자기는 럼이나 보드카를 좋아한다고 한다. 진~한 술, 도~옥한 술. 럼이 옛날에 해적들이 배에서 마시던 술이라는 설명도 부록으로 따라온다. 그것이야 말로 진짜 술맛! 캬~! 칵테일은 여자들이나 좋아하지. 희한한 일이었다. 남미에는 칵테일이 정말 다양한데 그 많은 칵테일은 모두 여자만 마시나보다.


여성에 관심은 없지만 여성을 정의하기 좋아하는 사회에서는 원거리에서 여성을 보기 때문에 늘 여성은 뭉뚱그려진다. 그리고 이 뭉뚱그려져서 표현된 세계는 실재가 되고 점점 비하되기 좋은 모양새로 빚어진다. 대표적으로 ‘소녀 취향’이라는 말은 순수함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취향의 유치함을 일컫는다. 순수함에 대한 찬양은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미성숙, 감정적, 자기애 과잉이라는 비하로 뒤집힐 수 있다. 미성숙해 보이는 글은 ‘사춘기 소녀의 일기장 같은’이라고 표현하며 비하한다. 일기 쓰는 사춘기 소녀의 마음도 모르면서. 취향은 계층의 구별만이 아니라 이처럼 젠더화를 통해 성별 구별짓기의 역할도 한다. ‘여성 취향’이라 불리는 취향을 얕잡아 봄으로써 자신의 성별을 드러내려 한다.


‘여성 취향 저격 푸드!’ 이런 광고를 보고 생각했다. 도대체 여성 취향 저격 푸드는 뭘까. 주변이 남자보다는 주로 여자가 많았던 환경이지만 도무지 ‘여성 취향’ 음식이 뭔지 모르겠다. 시장에서 플라스틱 의자에 주저앉아 닭발을 양손으로 부여잡고 뜯어먹으며 “언니 이거 안 먹어봤어? 얼마나 맛있는데.”라던 후배부터 오징어를 제외하고 어떤 동물성 식재료도 섭취하지 않던 친구에 이르기까지 내가 아는 여성들의 먹거리 취향이 떠올랐다. 선택하는 먹거리 종류도 다양하지만, 불닭처럼 매운맛을 찾아다니는 여자부터 케이크를 날마다 즐기는 여자까지 맛의 스펙트럼이 넓다. 대체로 여성 취향을 저격한다는 음식은 예쁜 모양에 단맛이 느껴지는 음식이다. 어떤 집단에 대해 반복적으로 사회에서 관념을 재생산하면, 그 집단에 속한 사람들 스스로도 그 관념에 맞춰 자신을 규정한다. 여자니까, 남자니까, 어른이니까, 한국 사람이니까 어쩐지 이런 걸 좋아해야 할 거 같고, 저런 건 좋아한다고 티내면 창피할 거 같고...... 이렇게 관념을 연기함으로써 관념이 실재가 된다.


게다가 여성들이 좋아하는 식당 ‘분위기’는 허영이 둥둥 떠다니는 장소처럼 그려진다. 반면 시끌벅적하고 투박하고 토속적이며 편한 분위기에서 얼큰하고 뜨거운 뭔가를 땀을 흘리며 먹으면 ‘진짜 맛’이라는 묘한 관념이 있다. 편한 장소에서 널부러져 먹는 그 편함을 누가 모를까. 그러나 사람이 새로운 맛, 새로운 분위기를 추구하고 싶은 마음도 있는 법이다. 이런 마음을 ‘여성화’시키고, 나아가 ‘서구에 오염된 여성’으로 구도를 만들 때 얼큰하고 토속적인 맛과 분위기는 남성화 되면서 ‘진정한’ 맛이 된다. 이런 정서가 ‘세련됨’은 곧 여성화, 서구화라는 인식으로까지 진전되면서 여성의 취향을 무시하는 태도가 마치 주체적이고 진정한 남성다움인양 여겨지기까지 한다.


어떤 사람과 취향이 통할 때 ‘그들 중 한 사람’이 아니라 나와 관계 맺을 한 사람으로 관계가 진전되기 쉽다. “무의식적으로 기록된 기호들이 상대편에 대한 반감/호감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맥락에서 취향은 사람들을 매개하는 중매자라고 말할 수 있다. 기호를 해독하는 작업을 통해서 하나의 아비투스는 다른 아비투스와의 친화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두 사람이 친화성을 느끼게 되는 중요한 계기이다. 이것을 기반으로 계급들은 서로 잘 어울리는 사람과 유대감을 느끼게 된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결혼 상대자의 선택이다.” (홍성민,  『취향의 정치학』  167쪽)


취향의 공감대는 때로 이데올로기보다 힘이 세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중요한 정상회담에 평양냉면을 가져온 건 고도의 정치다. 이 남북관계보다 더 어려운 인류의 영원한 과제로 남아있는 관계가 인간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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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라영(예술사회학 연구자)

프랑스에서 예술사회학을 공부했다. 현재는 미국에 거주하며 예술과 정치에 대한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다. 지은 책으로 『여자 사람, 여자』(전자책), 『환대받을 권리, 환대할 용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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