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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살고 싶은 마음

박판식 『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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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삶이 어울리지 않는 것들과의 어색한 동행이자 어울리는 것들과의 조우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결국 ‘나’라는 구심점을 완성하고 있다. (2017.07.04)

사진_유계영.JPG

 

욕망을 들키는 사소한 순간들을 상상했다가 진저리를 쳤다. 내 것을 들키는 것도 싫지만 세련되게 다듬어지지 않은 남의 욕망을 마주치는 것도 썩 유쾌하지 않다. 여러 사람 앞에 한 점 남은 고기반찬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 눈빛을 읽히는 일은 수치스럽다. 대표자를 선출하는 자리에서 손들고 자기를 추천하는 일은 망측하다. 너보다 내가 낫기를 바라는 질투는 경박하다. 나의 욕망은 나에게조차 비밀일 때가 많다.

 

욕망은 어쩌다 터부Taboo가 되었을까. 제한된 자원 때문에? 개별화된 욕망이 공동체를 위협해 올 것이기 때문에? 나는 내게 주어진 금기 목록을 무사히 이수한 사회의 건강한 구성원으로서, 죽고 싶어 하지 않고 순순히 살기로 했다. 죽고 싶은 마음은 금기인데다, 죽고 싶다는 말의 심중에서 명확하게 감지되는 이생의 욕망이 내겐 너무나도 쑥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상과 현실의 부조화를 겪고 있노라고 한탄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며, 적어도 이 지경보다는 괜찮은 나를 욕망한다는 고백이 돼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죽고 싶은 마음 그러니까, 잘 살고 싶은 마음을 견딜 수가 없었다.

 

모자와 박쥐우산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어울리지 않는 물건 하나쯤은 누구에게나 있다
애완용 개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생명이 있다면
더 어울리지 않는다
내게는 딸이 없다, 나와 어울리지 않아서다

 

하지만 내 인생은 태어나지 않은 딸과 늘 동행하고 있다
웅덩이가 모자처럼 떨어져 있다 인생은
그 위를 지나가는 멀리서 온 구름이다

 

(중략)

 

처녀 시절 아내가 키우던 개가 죽었다
개는 죽기 직전 젖은 걸레 위로 올라갔고
자신의 똥 위로 올라갔고 이부자리 위로 올라갔고 나의 배 위로
올라갔다, 죽은 개는 나와 어울린다, 개가 죽고 문득
아들이 태어났다

 

―「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중
(박판식 ,『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 시인들 때문에. 시인들이 자꾸 이렇게 멋진 시를 쓰는 바람에. 나는 금기 목록 중에 한 줄을 지웠다. 내가 나이고자 하는 욕망, 원하는 모습의 나이고자 하는 욕망은 누구도 위협하지 않는다. 말장난 같지만 내가 나라면, 너는 너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단순한 명제를 시로 배운다. 나로 살기 위해 마음에 드는 나를 수집하는 기쁨 또한 이와 같은 시들이 알려주었다.

 

시인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것과 어울리는 것을 단호하게 분류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 시를 통해 우리가 또렷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분류의 대상도, 분류의 기준도 아니다. 시인은 삶이 어울리지 않는 것들과의 어색한 동행이자 어울리는 것들과의 조우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결국 ‘나’라는 구심점을 완성하고 있다. 생명이 있는 개는 나와 어울리지 않고, 죽은 개는 나와 어울린다. 때문에 아내의 애완용 개는 죽기 직전에 나에게 다가온다. 다가와서 나와 어울리는 아들로, 그러나 나와 어울리지 않는 생명을 가진 존재로 다시 환원한다. 영원히 나라고 믿었던 것들이 내게서 완전히 벗어나기도, 나와는 무관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내게로 와 단단히 뿌리내리기도 하는. 시인은 이것을 인생이라고 부른다. 나라는 존재 역시 웅덩이 위로 흘러가는 구름처럼, 끝없이 움직이고 변화를 거듭하는 무형의 존재라는 것.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 죽고 싶은 마음과 잘 살고 싶은 마음의 모호한 경계가 느껴지는 말이다. 시인은 나조차 나와 어울리지 않는 부조화를 절망하고 있을까 희망하고 있을까. 함부로 짐작할 수 없지만 이 시를 통해 엿보기로는 절망보다 희망에 가까운 상태인 것 같다. 적어도 재미있어 하는 것은 분명하다. 어울리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뒤섞이는 경험으로 시인의 ‘나’는 둘레를 넓히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더 복잡하고 다양한 ‘나’는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다. 얄궂은 점은 그렇게 태어난 ‘나’ 또한 나와 어울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 그것이 무한한 나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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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유계영(시인)

1985년 인천 출생.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10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하였으며, 시집 『온갖 것들의 낮』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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