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 놀이터

나만의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

분명 지금보다 더 재미 있게 살 수 있다고 믿는 어느 누군가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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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거나 행복하거나 분노하거나, 감정이 요동치던 때가 언제였나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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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pixabay

 

최근 내게 고민이 하나 있다면, 어떤 것에서도 크게 기쁘거나 슬프다는 감정을 크게 느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꽤나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나였기 때문에, 감정의 동요가 쉬이 느껴지지 않는 요즘의 내 모습은 퍽 낯설다. “이 정도면 살만은 한 것 같아”와 같은 짐작과 합리화가 나를 뒤덮고 있다.


어쩌면 나는 어릴 때부터 주인공이라는 의식이 강했는지도 모른다. 내 삶이 영화나 드라마처럼 매일 새로운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그 일들로 인해 내 감정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격동의 삶일 거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사실 아직 내 삶은 조금 더 ‘재미있어야’ 한다는 욕심이 내게 있는 게 아닐까. 여기서 말하는 ‘재미’는 슬프거나 행복하거나 우울하다는 등의 내 감정의 변화가 극명하게 일어나는 것에서 스스로가 느끼는 다채로움에 대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나를 내 기준에서 말하자면, 재미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누군가와의 관계가 무너지면 그 상대에게 쏟은 정만큼 슬퍼했고,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느냐고 화가 나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때로는 그 사람으로 인해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이 행복을 전하고 싶을 만큼 웃고 다니기도 했다. 감정을 숨기거나 절제하는 방법이라곤 전혀 모르던 사람이 바로 나였다. 감정이 흘러넘쳐서 비단 내 감정뿐만이 아니라 누군가의 슬픈 이야기를 들으면 덩달아 슬퍼져서 같이 눈물을 흘렸던 적도 있다. 너무도 당연한 경험이다.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하듯이.


과거형으로 말했다고 해서 지금 이 모든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런 내 감정은 아직 유효하다. 그러나 과거형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저렇게 감정이 흘러넘치던 때의 나는 내가 느끼는 감정이 내 삶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감정에 잠식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때가 있었고, 그 감정에 사로잡혀 일상을 일상답게 살아내지 못했던 사람이 바로 나였다. 남들 앞에서는 덤덤한 척, 그런 감정 따위 너무 사사로운 것 아니냐고 말하고 다녔을지 몰라도 나는 분명 감정에 사로잡히기 쉬운 사람이었다.


그랬던 내가 누군가와 관계가 단절되어도 그냥 아무렇지 않은 채 일상을 살아내고, 일찍 하늘로 떠나 보낸 친구를 생각해도 이제는 정말 떠난 사람이 맞구나 하고 인정을 하게 되었다. 누군가 나를 욕하고 다닌다고 해도 잠시 잠깐 화가 날 뿐, 무시한 채 살아가면 별문제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무얼 해도 무덤덤해지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내게 무덤덤해지고 담담해지고 있다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 감정 하나하나에 신경을 다 쏟고 살면 어떻게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느냐고 말하면서.


내게 감정에 담담해지는 것이 지극히 평범한 것이라고 말해준 이의 말처럼,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는다는 것은 평정심을 유지하며 일상을 잘 살아내고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앞서 감정에 큰 동요가 없는 것이 고민이라고 했다. 감정에 큰 동요가 없다 보니 공감 능력이 조금씩 떨어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 겉으로만 공감하는 척하면서 그에게 크게 감정을 쏟는 것마저 귀찮아져서 공감 불능의 상태로 대화를 이어나가는 때가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누구에게도 제대로 공감하지 못한 채 영혼 없는 대화만을 이어나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자를 씹듯이 음미하며 목소리로 내뱉는다. 계속 계속, 외울 때까지 계속, 같은 말을 여러번 되뇌면 말의 뜻이 흐릿해지는 대가 온다. 그러다 어느 순간 글자는 글자를 넘어서고, 단어는 단어를 넘어선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외계어처럼 들린다. 그럴 때면, 내가 헤아리기 힘든 사랑이니 영원이니 하는 것들이 오히려 가까이 다가온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나는 이 재밌는 놀이를 엄마에게 소개했다. 그러자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뭐든 여러 번 반복하면 의미가 없어지는 거야. 처음엔 발전하는 것처럼 보이고 조금 더 지난 뒤엔 변하거나 퇴색되는 것처럼 보이지. 그러다 결국 의미가 사라져 버린단다. 하얗게.
-『아몬드』 중에서

 

『아몬드』를 읽으면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선천성을 갖고 태어난 윤재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 나도 별다를 바 없는 감정 불능의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후천적인 감정 불능의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 상태. 심지어 자신의 감정에게도 솔직하지 못한 상태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 보는 것조차 귀찮아서 잠들기 전까지 휴대폰 속의 큰 의미 없는 소모성 정보들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이 감정 불능의 순간조차도 반복되다 보면 익숙해져서 '퇴색되는 것처럼 보일' 것이고, '그러다 결국 의미가 사라져'버리면 그땐 정말로 감정 불능의 상태가 지속될 것 같다며 치기 어린 걱정을 한다. 드라마처럼 살고 싶었는데, 감정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다면 내 삶은 이대로 재미없게 끝이 나고 말겠구나 하는 걱정도 함께 딸려 오면서. 원하는 대로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하는 게 사치인 세상일는지는 몰라도, 의미가 사라지는 삶을 살고 싶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이건 비단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삶에서의 재미를 포기한 사람은 있어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것만큼은 누구에게나 해당할 테니까.


내 삶에 대한 욕심에서 비롯되었을지 모르는 이 ‘재미있는 삶’에 대한 갈구가 감정의 평정에 의해 멈추어버린 지금, 하얗게 사라지기 전의 내 감정들을 조금이라도 붙잡아 내겠다는 의지를 붙들어 맬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기라도 하겠다. 조금 더 재미있게 살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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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나영(도서 PD)

가끔 쓰고 가끔 읽는 게으름을 꿈꿔요.

아몬드

<손원평> 저12,60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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