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 없기에 더욱 믿는 삶

김상혁의 두 번째 시집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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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이 모든 비관적 전망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삶을 믿을 수 있는 것 역시 이런 까닭 아닐까. 그의 세계에서 그는 혼자 사는 게 아니니까. 함께 살아야만 하니까. 그렇기에 이 시집은 끊임없이 삶의 더 나은 형태를 상상하고, 전망하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더 나은 삶이 오리라 애써 믿는다. 사랑하기 때문에, 계속 사랑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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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신문에서 한국인의 60%가 자신의 미래에 대해 부정적 전망을 갖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그렇고, 내 주변의 다른 이들 역시 그러하다. 이 전망 자체가 지금 우리가 당면한 위기다. 예술은 더 나은 삶을 믿기에 가능해진다. 인류의 진보에 대한 순정한 믿음이 없다면 예술이 스스로를 갱신하는 일은 불가능하리라. 예술의 가치란 더 나은 삶의 형식을 발명할 수 있다는, 그리하여 우리의 삶이 조금은 더욱 나은 것이 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서 오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시를 비롯한 많은 예술 양식들이 일종의 정체 현상을 겪고 있는 것은 아마 이런 상황 때문이리라. 나 역시 시를 쓰는 일과 읽는 일이 갈수록 괴롭다. 삶에 대한 희망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문학으로 표현하는 일이 점차 어렵게 느껴지니까. 내 마음이 그렇지 못하니까.

 

내가 김상혁의 두 번째 시집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를 읽으며 감동한 것은 그런 연유였다. 그의 시는 삶과 문학에 대한 순정한 믿음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순진한 낙관도, 기만적인 정언명령도 아니었다. ‘진정한’ 운운하는 말을 그토록 싫어하는데도, 나는 이 시집이 그리는 삶의 태도를 인간에 대한 진정한 믿음이라고 밖에는 표현하지 못하겠다.

 

그렇대도 기쁜 영혼이 돌아올 수 있는 기쁜 생활 같은 건 있었으면 좋겠다. 부모가 가방에 챙겨준 물건들이 하나 둘 망가지는 동안 기쁜 아이는 자라 많은 아이들이 되었다. 그들이 끝없이 퍼져 바다 건너까지 닿았다, 거기서는 기쁜 나무를 심었으면 좋겠다.

 

그것은 그곳의 기쁨이다.
먹는 기쁨, 보는 기쁨, 옛날 사람을 떠올리는 기쁨.
죽은 사람의 기쁨 같은 것은 없다.
그렇대도 기쁜 영혼이 돌아올 수 있는 기쁜 생각 같은 건 있었으면 좋겠다. 기쁜 생각으로 바라보는 기쁜 물결이 있었으면 좋겠다.
-「기쁨의 왕」 부분

 

이 시에서는 기쁨이 불가능한 것을 이미 아는 자가, 그럼에도 기쁨이 가능하리라 믿으며, ‘일부러’ 순진한 전망을 애써 드러내고 있다. 기쁨을 믿지 않기에 기쁨을 더욱 믿는 것, 그러한 역설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삶. 그것이 이 시가 그리는 ‘기쁨의 왕’의 삶이자, 우리의 삶이다. 부모로부터 아이로 이어져 점차로 퍼져나가는 이 삶의 궤적을 의심이 없다는 듯 그리는 것 역시 시인이 보여주는 삶의 낙관이리라.

 

그러나 이 낙관은 ‘괜찮아, 잘 될 거야’라거나, ‘아프니까 청춘’이라거나 하는 공허한 위로가 아니라 진정으로 삶이 계속되어야만 한다는, 기쁨을 이어가야만 한다는 믿음으로 가능해지는 것일 터이다. 기쁨이 불가능한 세계에서 기쁨의 형식을 궁구하는 것. 그것이 예술의 가장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이니까 말이다.

 

나는 나보다 슬픈 사람을 다섯이나 알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몽유병자, 주정꾼, 어린 자식을 둘이나 잃은 부인도 있어요 나는 그들을 다 병원에서 봤습니다


(중략)

 

너무 슬플 땐 무서운 게 없더라네요 아무래도 내겐 공포를 지나칠 수 있는 슬픔 같은 건 없으니까, 내가 무언가를 말해도 되는 걸까, 나의 멀쩡한 집과 가족을 어떻게 설명할까

 

의사가 미소 짓습니다 괜찮으니 이제는 제 이야기를 해보라네요 그냥 슬픔의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중인데, 이야기 속에서 나는 얼마든지 기뻐할 수 있는데요
-「슬픔의 왕」 부분

 

그 기쁨이란 세상에 넘쳐나는 슬픔을 알기에 가능한 것이다. 시인이 다만 이야기만 남았노라 말하는 까닭은 이처럼 세계가 슬픔과 고통으로 넘쳐나기에, 그 슬픔과 고통을 이겨낼 이야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의 인용이 은근히 암시하듯, 시인은 그 이야기라는 것의 무력함과 허망함 역시 잘 안다.

 

어쨌든 지금은 너무 길고 좋은
그 이야기가 그녀를 언제 놓아줄지 생각하는 것이다
나도 아내만큼 이야기에 빠져 있지만
사람들은 햇빛 속에서도 얼마든지 불행해 보이고
이야기를 몰라도 이야기처럼 산다
뒤늦게 극장을 나올 그녀에게 들어야 할는지?
그래서 이야기 속 여자가 영원히 행복해졌다면
우리에게 다시 극장을 찾게 하는 힘은 무엇이겠는지
-「영화관」 부분

 

그럼에도 이야기가 계속되어야 한다고, 기쁨의 형식을 찾아야 한다고 시인이 말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시인은 아마 그 답을 사랑에서 찾은 것 아닐까 한다.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에서는 고독하고 자기파멸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완결시키는 시인의 모습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그의 시적 주체는 언제나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그에게 손을 내밀고, 그와 함께 살아가리라 믿으며, 완결이 아니라 지속을 이야기한다. 이야기란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있기에 성립하는 것이니까. 이야기의 주고받음을 통해 대화가, 관계가 계속 이어지는 것이니까.

 

그가 이 모든 비관적 전망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삶을 믿을 수 있는 것 역시 이런 까닭 아닐까. 그의 세계에서 그는 혼자 사는 게 아니니까. 함께 살아야만 하니까. 그렇기에 이 시집은 끊임없이 삶의 더 나은 형태를 상상하고, 전망하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더 나은 삶이 오리라 애써 믿는다. 사랑하기 때문에, 계속 사랑하기 위하여.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 김상혁 저 | 문학동네
2009년 『세계의 문학』으로 데뷔하여 첫 시집 『이 집에서 슬픔은 안 된다』를 펴낸 바 있는 김상혁 시인이 3년 만에 두번째 시집을 선보인다.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는 그가 각고의 노력 끝에 완성해낸 독특하면서도 개성 넘치는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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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황인찬(시인)

시인. 시집 『구관조 씻기기』, 『희지의 세계』, 『사랑을 위한 되풀이』와 산문집 『읽는 슬픔, 말하는 사랑』 등을 썼다.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

<김상혁> 저9,000원(10% + 5%)

편집자의 책 소개 2009년 『세계의 문학』으로 데뷔하여 첫 시집 『이 집에서 슬픔은 안 된다』를 펴낸 바 있는 김상혁 시인이 3년 만에 두번째 시집을 선보인다.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는 그가 각고의 노력 끝에 완성해낸 독특하면서도 개성 넘치는 새집이다. 신작을 꺼내들 때의 시인들이란 기존과는 사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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