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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쉼표가 내게 말을 건넨다

난주 『문장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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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쉼표가 내게 말을 건넨다. 쉬어도 좋다. 삶은 점의 연속이니까, 점이 선이 되길 기다리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이니까 지금은 잠시 쉬어가도 좋다. 이 순간만큼은 잠시, 안녕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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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즈음으로 기억한다. 나는 우연히 인터넷에서 한 화가의 그림을 발견하고 감탄했다. 화가의 그림을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다. 찾아보니 화가는 싸이월드와 개인 홈페이지를 운영 중이었다. 현재 인사동에서 전시회를 하고 있다는 말에, 짤막하게 가겠다고 방명록을 남기고 찾아갔다. 그렇게 만난 화가는 너무나 다정한 사람이었다. 나는 아직도 화가가 내게 건넨 말을 기억한다.

 

“내 그림에서 튀어나온 사람인 줄 알았어요!”

 

나는 지금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2년간 우울증을 앓았다. 몸무게가 계속 줄어 뼈밖에 남지 않았다. 척박해진 삶을 달래려고 긴 머리를 싹둑 잘랐다. 머리카락과 나를 지치게 만든 것들을 모두 쓸어내리려고 부산으로 여행을 떠나던 길이었다. 그런 내게 화가는 자신의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 붉은 머리의 개구쟁이 같은 숏컷이 나와 닮았다고 말했다. 그 한 마디가 오랜만에 내 인생에 쉼표를 찍어주었다. 화가를 꽉 끌어안아 주고 싶었으나 이상해 보일까 봐 참았다. 대신, 내가 반한 그림과 화가를 함께 한 장의 사진으로 남겼다. 나의 절망을 해맑음으로 달래준 그녀가 스타가 되길 바랐다. 내 소망은 이뤄졌다. 그 화가는, 육심원이다.

 

나는 그 후로도 비슷한 경험을 많이 했다.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만나면, 훗날 그 분이 엄청나게 유명해진다. 최근에도 이런 감탄으로 한 화가를 제 발로 찾아가 만났으니, 뜨개질이 취미인 친구 한 명이 월차까지 내고 국회의사당 앞으로 뛰어나간 날이었다. 이 날, 나는 화가 난주를 만나러 홍대 앞으로 향했다.

 

우리가 촛불로 광장을 물들였듯 화가 난주는 색색의 점을 펜촉으로 찍어 그림을 그린다. 코앞에 갖다 대고 그림을 보면 점이지만 멀리서 보면 하나의 그림이다. 한 장 한 장 그림마다 마침표, 쉼표, 물음표, 느낌표가 숨어 있고, 그것들은 각기 씨앗이 되었다가 피어 오르는 꽃이 되었다가 개미가 몰고 다니는 씨앗으로 탈바꿈했다가 마침내는 나비로 변한다. 이윽고 하늘을 나는 나비들 아래로 흐드러지게 제비꽃이 핀다. 꽃잎 사이사이 마침표, 쉼표, 물음표, 느낌표가 곳곳에 숨어 있다. 인간들처럼 다양한 문장부호들이 각기 그 자리에서 제 책임을 다 하기에 우리의 삶은 의미가 있다고 속삭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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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는 자신의 책에 사인을 해줬다. 펜을 몇 개고 골라 꺼내기에 뭘 쓰려고 저러나 봤더니, “작가님은 제가 특별히 개미를 두 마리 그려드릴게요.”하고는 낙관 찍듯 개미 두 마리를 그린다. 천천히 잇는 볼펜의 선이 감사하기 짝이 없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여전히 인터넷에서는 대통령 탄핵소추안 이야기가 연달아 나왔다. 나는 그 뉴스를 눈으로 훑다가 한숨을 깊게 내쉰다. 대신 화가의 책 『문장부호』를 한 장 한 장 넘겨보기로 한다. 각각의 문장부호들 중 어쩐지 쉼표에 한없이 눈길이 가서 손가락으로 쉼표를 쓸어본다.

 

오늘따라 쉼표가 내게 말을 건넨다. 쉬어도 좋다. 삶은 점의 연속이니까, 점이 선이 되길 기다리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이니까 지금은 잠시 쉬어가도 좋다. 이 순간만큼은 잠시, 안녕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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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조영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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