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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소년을 품은 사람들에게
『소년』 이성표 작가를 만나다
이 책에서 파랑의 여러 표정이 드러나길 바랐습니다. 따뜻함, 청결함, 고귀함, 사색, 고요, 그리움 같은 것들이요.
시인 윤동주가 1939년에 쓴 시 「소년」이 2016년 한 권의 그림책이 됐다. 이성표 작가가 그린 동명의 그림책 『소년』. 오랫동안 파란색에 미쳐 있었던 작가는 시구("가만히 하늘을 들여다 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 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든다") 하나를 읽고는 선뜻 붓을 잡았다. 그림책을 펼치면, 머리에 단풍잎 한 장을 걸친 소년이 청명한 표정으로 독자를 이끈다. 시구를 따라 그림을 따라 천천히 책을 읽다 보면 소년의 마음이 흠씬 다가온다. 내 손금에도 맑은 강물이 흐를까? 떠올려보며, 소년처럼 눈을 감고 보고픈 이를 불러본다. 여느 그림책보다 찬찬히 읽으면 좋을 『소년』이다.
『소년』을 그린 이성표 작가는 홍익대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후 <중앙일보> 출판국 미술기자로 일하다 1982년에 데뷔했다. 여러 신문, 잡지, 단행본, 그림책 등에 작품을 발표하며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했고, 『빠빠라기』 『마음의 습관』 등의 북 일러스트레이션, 『야, 비 온다』 『별이 좋아』 『도마뱀아 도마뱀아 비를 내려라』, 『보석』 등의 책에 그림을 그렸다.
『소년』을 그리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왜 윤동주의 시를 택하셨는지요?
편집진이 먼저 연락을 해 왔습니다. 제 생각엔, 시에 쓰여있는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 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 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든다." 같은 시구가 저를 불렀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지난 5,6년 간 파란색에 미쳐 있었거든요. 편집자는 그걸 알고 있었음에 틀림 없습니다. 제안을 받고 저는 1초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이 시야 말로 제가 그려야 할 시라는 확신이 들었지요. 스케치를 시작하며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어떤 도구로 그림을 그리셨나요?
종이에 아크릴릭 물감으로 그렸습니다. 물을 많이 써서 파란색이 흰 종이에 엷게, 부드럽게 입혀지도록 애썼습니다. 대부분의 그림을 밑그림 없이 바로 작업했습니다. 붓이 내는 형상, 붓이 빚어내는 선과 면을 그대로 살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망치면 무조건 다시 그려야 하는, 좀 위험한 방식이긴 했습니다만, 그런 즉흥성이 그림을 다소간 경쾌하게 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고르기 어려우시겠지만, 『소년』에서 가장 좋아하는 그림은 무엇인가요?
맨 앞 장, 소년들이 서 있는 페이지 입니다. 그 장면을 그리고서야 이 책을 완성할 자신이 생겼습니다. 시를 읽으며 떠오른 여러 단상들이 그 그림을 통해 비로소 자유롭게 유영하기 시작했다고나 할까요? 작업 초기에 편집진을 만나 몇 장의 작업을 보여주었을 때, 그들은 이 그림을 바로 알아봤습니다. 제멋대로 그렸다는 것, 편히 그렸다는 것을 알아채더라고요. 윤동주의 시, 한 권의 책, 독자의 반응 등 여러 중압감을 떨칠 수 있던 시발점이었습니다.
파란색을 주로 사용하셨는데요. 느낌이 따뜻합니다. 색을 어떻게 표현하시고자 하셨나요?
파란색이 차갑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파란색은 마음을 헤아리는 색, 기다려 주는 색 같습니다. 눈을 감으면 앞이 파랗지 않은가요? 파랑은 다정하고, 느리고, 여유가 있습니다. 하늘의 파란색은 우주의 색입니다. 파랑은 마치 동정심 가득한 큰 사랑 같아요. 아주 멀리까지 가면서도 바로 옆에 붙어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저는 이 책에서 파랑의 여러 표정이 드러나길 바랐습니다. 따뜻함, 청결함, 고귀함, 사색, 고요, 그리움 같은 것들이요.
표지가 특히 예쁩니다. 그림과 어울리는 종이를 사용해서 책에 관한 기대감이 더 생기고요. 그림책 표지는 어떠해야 한다는 철학이 있으신가요?
그렇진 않습니다. 표지란 책 안의 내용을 대표하는 것인데, 과연 어떤 그림이 내용을 제대로 대표할는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린 사람에게는 그린 사람의 생각이 있을 뿐입니다. 독자가 어떻게 볼 지를 알 수 없지요. 저는 표지의 결정을 편집진에게 맡겼습니다. 그래도 그분들이 저보다는 객관적이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러고도 자꾸 말을 건네긴 했지만요.
표지 그림을 고를 때는 고민의 여지가 없었나요?
별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표지에 쓸 그림이 많았거든요. 보림 편집진이 이 그림을 골랐을 때, 바로 골랐다 싶었습니다. 편집진이 마케터들에게도 의견을 구했다고 했는데, 그 분들 안목이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이제 와서 보니 더욱 그래요. 아마도 표지의 호소력 덕에 책이 잘 나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미술기자로 일하다 일러스트레이터로도 활동하셨는데요. 그림책을 그리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신문사에서 일하면서도 퇴근 후에는 일러스트레이션 일을 했습니다. 주로 정기 간행물에 기고하면서 메시지가 있는 텍스트를 일러스트레이션 했습니다. 그림책은 너무 어려워서 감히 엄두를 못 내다가 1980년대 말에 보림출판사의 권유로 시작하게 되었지요. 그 동안 몇 권 내긴 했어도 사실 아직 그림책을 충분히 모릅니다. 윤동주 선생님 이름 덕분에 이렇게 나오게 된 것이지, 그림책 분야엔 초보와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일러스트레이션학교(hills)에서 ‘내 목소리로 말하기’를 강의하고 있으신데요. 어떤 내용의 강의인지 궁금합니다.
'내 목소리'란 타고난 본래의 목소리를 뜻합니다. 갑자기 어깨를 부딪혔을 때 내는 외마디 소리, 목욕탕에서 혼자 노래할 때의 목소리 말입니다. 교육받고 길들여진 소리 말고, 본연의 내 목소리로 그림을 그려보자는 클래스입니다. 유치원 때처럼 모두들 '천재'가 되어 그림을 실컷 그리게 하는 것이 저의 강의 목표입니다. 무엇이든 그릴 수 있음을, 어떻게 그려도 "네 옳다"고 말해주는 교실입니다.
또 다른 시를 그림책으로 표현한다면요?
삶을 사유한 부드러운 시라면 좋겠습니다. 볼프 에를브루흐의 「커다란 질문」 같은 시 어디 없을까요?
예스24 독자 리뷰 중 이 글을(//blog.86chu.com/document/9054626) 보셨는지요? 작가로서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많은 위로를 받았음을 고백합니다. 다정한 시각들, 꼼꼼히 이해해 주시는 마음들이 참 고맙습니다. 한편 독자와 작가의 관심이 다른 것도 확인이 되어 재미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저는 마지막 바로 전 장면, 바다의 푸른 커튼에서 소년이 나오는 장면에 힘을 많이 주었는데, 그 장면을 거론하는 독자가 없더군요. (웃음)
아무래도 부모들은 아이를 키우면서 그림책을 접하게 됩니다. 그림책을 어떻게 읽으라고 권해주고 싶으신지요?
아이의 눈높이를 상정하고 읽거나, 아이에게 추천할 의도로 그림책을 보시지 말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그 책이 진솔하게 가슴에 와 닿는지, 나도 기쁘게 저자의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살피시면 좋을 듯 합니다. 왜냐하면 책을 읽는 순간 그 책은 당신을 위한 책이기 때문이지요.
좋아하는 그림책을 한 권만 추천해주세요.
하하. 100권 이상을 추천하라면 할 수 있습니다만, 1권은 추천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좋은 그림책이 정말, 너무 많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그림책은 무엇일까요?
좋은 그림책은 행복과 깨달음을 주면서도 거만하지 않습니다. 즉 약간의 글과 아름다운 그림으로 쉽고 편안하게 말하지요.
지금 작가님께 『소년』이 딱 한 권이 있습니다. 어떤 독자에게 선물하고 싶나요?
마음에 소년을 품은 사람들. 중년의 사내들에게 소년을 선물하고 싶습니다. 40대 중반 일하는 아버지들께 이 책을 바칩니다.
*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했습니다
소년윤동주 글/이성표 그림 | 보림
문학사를 넘어 우리 역사와 마음에 고요히 빛나는, 시인 윤동주. 그가 1939년에 썼으며, 1941년 우리말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時』를 출간하고자 했을 때 19편 중 한 편이었던 『소년』이 한 권의 그림책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