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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 아내의 연어덮밥

여전히,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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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돈키호테』의 2권마저 덮었다. 이제 독서의 근육이 조금 붙은 것 같다. 애초에 ‘절도일기’를 시작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독서의 근육을 기르자. 하지만 아직 뇌의 근육은 작다. 더 키워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육체의 근육 역시 다져야한다. 일단, 지방부터 빼자. 방송 녹화 이틀 전, 드디어 ‘48시간 헐리우드 다이어트’를 감행한다.

19화-사진(아내의-연어덮밥).jpg

 

 

10. 4. 

 

 고전을 읽는다고 해서 삶이 달라질까? 아니, 책 한 권 읽는다고 해서 인생이 달라질까?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나는 경험칙으로 이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하긴, 책을 읽을 때마다 인생이 바뀌어버린다면 그것 역시 곤란하다. 어제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모두 기부했는데, 오늘은 주식 투자서를 읽고 어제의 일을 통곡한다면 곤란하다. 그러므로, 바람직한 독서법이라는 것은 책 자체가 주는 재미를 온전히 즐기는 것이다. 감동과 깨달음은 그 다음이다. 이마저 얻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재미가 있었다면 그것으로도 읽을 가치는 충분한 것이다. 이상은 독서에 임하는 나의 간단한 태도법 같은 것이다. 그런데, 『돈키호테』를 2주째 붙잡고 있는 내 태도가 흔들리고 있다. 간단히 재미만 얻어도 된다고 생각하기에는, 책이 너무나 두껍다. 피곤할 때 누워서 읽다가, 잠에 빠져버리면 들고 있던 책에 목을 강타당해 이승과 작별할 수 만큼 두껍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런 고전을 읽을 때마다 ‘아아. 책을 통해 반드시 뭔가를 얻어야해!’라는 마음가짐을 갖게 되는 것이다. 1500페이지나 읽고 나서, 책이 그저 나열된 장광설의 연속이었다는 게 밝혀지면 허탈에 빠지는 것이다.
좀 더 참아보자. 오늘도 스스로에게 다시 말한다.
‘소설가니까 『돈키호테』 쯤은 완독해봐야지.’

 


10. 5. 


 아내가 『돈키호테』를 다룰 책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위해서 다이어트를 해야 되는 게 아니냐며 ‘헐리우드 48시간 다이어트’라는 제품을 주문했다. 48시간 동안 음식은 일절 섭취 않고, 이 주스 같은 제품만 마시는 것이다. 우선은 운동으로 살을 빼기로 한다. 영혼의 살은 찌우고, 육체의 살은 빼야한다니. 소설가로서 살아남기도 만만치 않다. 오늘은 8km를 달렸다.

 


10. 6.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마치 서부 개척시대에 누군가가 한 “저곳에 금이 있다!”라고 외치면, 그 말을 믿고 끊임 없이 달려가는 여정과 같지 않을까. 흙먼지 날리는 광야를 계속 달려야 하듯, 무수한 페이지를 넘기며 난무하는 문장과 수사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 이 길을 다 달리고 나면 광맥을 만날 것이라는 신념 하에, 졸음과 요통에 항거하며 끊임없이 문장을 이해하고 책장을 넘기는 것, 그것이 아닐까. 
 쉽지 않다. 오늘도 8km를 달렸다.

 


10. 7. 


 영화 <올드보이>에서 15년간 오대수를 감금한 이우진은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대수는요, 말이 많아요. 너무 많아요.”
 아아, 세르반테스는 말이 많다. 너무 많다. 그가 만약 450년 뒤에 태어나 영화  <올드보이>를 보았더라면, 『돈키호테』는 지금보다 훨씬 담백하고, 간결해졌으리라.
 그나저나, 달리기를 한 달째 계속하고 있지만, 살이 좀처럼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도 8km를 달렸다. 

 

 

 10. 8. 


 무려 800 페이지를 읽고 서야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소설은 아무래도 간결하게 쓰는 게 좋다. 작가에게나 독자에게나, 심지어 후손들에게도 유익하다. 450 여년 뒤에 고생할 이름 모를 한 변방 필자를 위해서도 말이다. 게다가, 세르반테스는 혼신의 힘을 기울여 2권을 (1권보다 무려 200페이지 길게) 쓴 후, 1년 뒤 사망하지 않았던가. 짧은 소설의 중요성을 고전을 통해 다시 깨닫는다.
 달리기가 소용없는 것 같아, 오늘은 수영을 한 시간 했다. 

 

 

 10. 9. 


 2권의 53 장(章)은 이렇게 시작한다.
 “삶에 있어서 모든 것이 늘 같은 상태로 지속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부질없는 것이다. 오히려 삶은 모두 원을 그리며 흘러가는 듯하다. 말하자면 중심에다 한 점을 놓고 그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모양이다.”
 고전을 읽는 이유는 아마, 당대에 범람하는 서사 방식의 효시를 발견하는 기쁨이 아닐까. 무수한 현대소설은 금언(金言)으로 시작하고, 이에 해당하는 자세한 에피소드를 서술한다. 즉, 다르게 시작하기 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의 원류가 『돈키호테』에 있다니. 고전을 읽는 보람을 비로소 하나 찾았다.
 수영도 약한 것 같아, 수영을 한 시간하고, 달리기도 8km 했다. 

 


 10. 10. 


 세르반테스는 1권을 쓰고 난 후, 무려 10년이 지난 후 2권을 집필했다. 그것도 9년 째 되는 해, 어떤 필명 작가가 『돈키호테』 2권이라며 위작을 발표하여, 이에 대한 혼란을 불식시키기 위해 1년만에 2권을 집필한 것이다.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결과적으로, 2권이 훨씬 좋다. 작가 세르반테스로서의 문학적 성장 뿐 아니라, 인간 세르반테스로서의 철학적 성장까지 깃들어 있다. 이로 인해 대문호 역시 오랜 세월 동안 가슴 속에 쌓아두고, 응축한 데서 수작을 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이런 측면에서 글은 쓰는 시간만큼이나, 쓰기 전의 시간 역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수영도 달리기도 소용없는 것 같아, 결국은 ‘48시간 헐리우드 다이어트’를 하기로 했다. 

 


 10. 15. 


 마침내 『돈키호테』의 2권마저 덮었다. 이제 독서의 근육이 조금 붙은 것 같다. 애초에 ‘절도일기’를 시작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독서의 근육을 기르자. 하지만 아직 뇌의 근육은 작다. 더 키워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육체의 근육 역시 다져야한다. 일단, 지방부터 빼자. 방송 녹화 이틀 전, 드디어 ‘48시간 헐리우드 다이어트’를 감행한다.

 


10. 21. 


 다이어트를 시작하기 전 현재 내 몸무게는 72.5kg. 제품 설명에 의하면 이틀 안에 적게는 2kg, 많게는 5kg 감량이 가능하다고 한다. 단, 48시간 동안 물과 이 제품을 탄 주스만 마셔야한다. 나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온종일 음식 섭취를 금한 체, 물과 주스만을 마셨다. 간간이 소금도 입술에 찍어 발랐다. 장모님이 집에 오셔서 육개장을 끓이셨지만, 사위다운 미소를 지은 채, 강인하게 방안으로 들어갔다.
 대신 방안에서 소리 내지 않고 울었다. 엉엉.

 


10. 22. 


 이글을 쓰고 있는 시각은 다이어트를 시작한 지 34시간째, 마라톤으로 치자면 마의 지점인 35km를 통과하고 있는 것과 같다. 나는 강인한 작가 정신으로, 물과 주스와 소금으로 34시간을 버티고 있는데... 부엌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 궁금하다. 참을 수 없이 궁금하다.
 맙소사. 부엌에 가보니, 아내가 “여보가 아무것도 먹지 않으니, 저도 그만 식욕이 사라져 요리를 좀 해보았어요. 저라도 잘 먹어야 우리 애를 키우죠”라며 보기에도 너무나 근사한 연어 덮밥을 하고 있다. 큼직한 사발에, 듬뿍 담은 흰 쌀밥, 그 위에 원형으로 곱게 정렬된 두툼한 노르웨이산 연어, 게다가 일본 장인이 만들었다는 겨자에, 곱게 채 썰은 양파와 무순까지!
 나는 “어. 여보 잘 먹어”라고 말한뒤, 다시 서재로 들어와 문을 잠갔다.
 그리고 허기를 잊기 위해 지금 미친 듯이 키보드를 치며 이 원고를 쓰고 있다.
 아아, 그나저나 내 키보드는 방수가 되겠지!
 하지만 48시간이 지난 내일이면, 나는 새로운 인간이 될 것이다.
 100일간 마늘만 먹고 버텼던 웅녀만이 내 심정을 이해할 것이다.

 


10. 23. 


 대망의 48시간 다이어트가 끝났다. 다이어트를 시작하기 전의 내 몸무게는 72.5kg. 아아, 설렌다. 과연 체중계는 ‘최 작가! 고생했어. 이게 네 눈물의 결과야!’라며 얼마나 나를 깜짝 놀라게 할까. 두근두근. 마침내 한 발을 올리고, 두 발을 올리고, 심호흡을 한 뒤 온전히 저울에 섰다.
 극한의 48시간 다이어트를 한 내 몸무게는…… 72.3kg.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저울이 고장 난 건가?
 하지만 다시 올라서도 72.3kg. 그렇다. 나는 이틀을 굶어 300g을 뺀 것이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게 진정 인생이란 말인가. 허탈하고, 허무하고, 공허하다. 나는 더 이상 ‘노력’이란 단어를 믿지 않는다.
 나는 또 한 번 내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아내가 방문을 두드렸다. 아내의 물음에 내가 답했다.
 “아냐. 여보 우는 거 아니래두……그냥……갑자기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각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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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최민석(소설가)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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