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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웃겨도, 괜찮아유

노안 이후 비로소 보이는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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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아저씨보다 공간과 여유를 가진 아저씨가 내가 생각하는 유머 있는 중년이니까.

노비 문장(안 이후 로소 보이는 문장)

 

빅터 프랭클 Victer Frankl의 말을 빌리자면 이렇다. “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이 공간에는 자신의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힘이 있다. 그리고 우리의 반응에 우리의 성장과 행복이 좌우된다.”

『너의 내면을 검색하라』 차드 멍 탄 지음

 

 

“생각보다 훨씬 진지하시네요.”

 

방송국 PD, 잡지사 기자, 내 책의 독자라는 사람들은 인터뷰나 미팅의 마무리에서 작별 인사처럼 그렇게 말했다. ‘패러디’ 또는 엽기’라는 단어를 유행시킨 회사 출신이라는 것과 글에 묻어나는 웃음기가 그들에게 어떤 선입견을 만들어 낸 것 같다. 말끝마다 비속어를 붙인다거나 눈치보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은 다 거침없이 한다거나 같은. 나는 딱히 다른 대답을 준비하지 못한 채 헤어지고는 했는데 중년이 되면서 부쩍 그런 말을 자주 듣게 되니 내가 너무 건조하고 딱딱하게 늙어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슬그머니 생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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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리어스 맨>의 한 장면

 

책이나 매스컴 등에서도 잘 늙는 법을 이야기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유머감각이다. 적절한 유머 한 마디는 자신의 주가를 높일 뿐 아니라 중년의 품격을 올려주는 성공한 인생의 필수 아이템이라고 말한다. 모범적인 예제로 오바마, 레이건, 처칠 등 유명인사의 유머 구사 사례가 주로 등장한다.

 

나를 포함해서, 침묵은 금이요, 말 많으면 공산당이라는 말을 듣고 자란 한국의 아저씨들은 이중 구속에 퐁당 빠진다. 유머라고는 젊어서 울궈먹은 참새 시리즈나 식인종 시리즈가 전부인데다, 갑(甲)님에 치이랴 돈(錢)님에 밟히랴 목청껏 웃어본 지가 백만 년도 더 된 중년들은 어떻게 하면 유머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 용기 내서 실천하면 아재 개그라고 구박 받고 오늘은 방언 터진 날이라며 진도 쭉쭉 빼다 보면 여직원은 울면서 뛰쳐나가고 김대리는 위험한 발언이라며 옆구리를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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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면초가의 상황 속에서 나는 중년의 유머에 대해 깊은 상념에 빠지는 척 한다. 우선, 젊은 사람들이 말하는 유머와 나이든 사람에게 기대하는 유머는 동어이의(同語異意)같다. 영맨들끼리는 마치 유재석이나 신동엽이 그런 것처럼 순발력 있고 재치 있는 드립력을 가지고 있을 때 유머 있다고 말한다. “어떤 남자가 좋아요?” 라고 물었을 때, “저는 유머 있는 남자가 좋아요” 라고 미스코리아가 답을 했다면 그것은 “나는 재미있는 남자가 좋아요” 라는 뜻이다. 올드맨들에게는 상황이 달라진다. 연설이나 강연의 자리라면야,  오바마처럼 유머를 준비해서 먹히든 안 먹히든 써먹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아저씨의 유머력은 어떻게 통할 수 있을까? 잃어버린 모자를 찾아준 역무원에게, “ 드디어 제가 모자 상봉했습니다.”라고 한다면 그 역무원은 나를 유머감각 넘치는 사람으로 기억할까? 아니면 비싼 밥 먹고 쉰 소리 하는 사람으로 기억할까? 아마도, 공무에 바빠 “ 네네, 다음부터 잘 챙기시고 안녕히 가세요” 할 확률이 99%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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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 중년의 유머가 통하는 사람은 하나도 안 웃긴데도 웃어주는 청중이 확보된 벌거벗은 임금님들 뿐이다

 

나는 휴대폰 연락처의 이름을 주르륵 훑으며, 족히 수백 명은 넘을 아저씨, 아줌마 중 과연 유머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를 검토해봤다. 서민 교수나 성석제씨 처럼 재미있는 글을 쓰는 사람 말고 이홍렬씨나 남희석씨처럼 전문적인 선수 출신 말고 민간인 중에 세속의 기준에서 유머 있는 중년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16배 속으로 돌리는 엔딩크래딧처럼 액정 속 이름은 빠르게 올라갔고, 유일하게 딱 한 명에게서 멈추었다. 그 사람은 태생적으로 잘 웃고 심각하지 않고 열등감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며 지루하지 않는 화법을 구사하는 인물이었다. 어쨌든 한 명이었다. 그 만큼 희소했다. 그렇다면 나이든 사람이 생활 속에서 수준 높은 유머를 구사하며 사회적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재능’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론 유머, 중요하다. 빅터프랭클은 심지어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까지 말했다.

 

“유머는 자기 보존을 위한 투쟁에 필요한 또 다른 무기였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유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능력과 초연함을 가져다 준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86쪽)

 

이 말이 나온 배경을 잠깐 보자.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정신과 의사이자 유태인이었던 빅터프랭클이 2차 대전 당시 3년 동안의  아유슈비츠 수감 생활을 직접 경험하면서 수감자의 심리를 기록한 책이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고, 실제로 언제든 죽어 나가는 지옥의 현장에서 분석자와 기록자로 남으려했던  빅터프랭클의 경이로운 직업병은 <로고테라피>라는 새로운 학파를 낳았고 이토록 값진 책을 후손에게  남겼다.

 

빅터 프랭클은 수감자 스스로 정신적 독립과 영적인 자유를 선택하려는 의지가 생과 사를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대량학살이 자행되는 수용소와 같은 시설에서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죽지 않아야 이 만행을 반드시 폭로하고 증언할 수 있다는 인간의 의지 때문이라고 강조하는 ‘테렌스 데 프레 Terrence Des Pres’ 의 생존자』와 흥미롭게 비교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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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슬픈 유머, <인생은 아름다워>의 명장면

 

죽음의 수용소에서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유머가 필요하다는 빅터 프랭클의 증언은, 유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지만 정작 내 스스로 중년의 유머에 대한 개념 정리를 할 수 있게 해준 것은 다른 책에서 본 빅터 프랭클의 말이다. 구글 엔지니어 출신인 ‘차드 멍 탄 Chade-Meong Tan‘ 이 쓴 『너의 내면을 검색하라』 에서 나는 내 인생 최고의 치유적 문장을 만났고 중년유머의 강박을 단번에 내려 놓을 수 있는 해법을 얻었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에는 자신의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힘이 있다. 그리고 우리의 반응에 우리의 성장과 행복이 좌우된다.“

 

살면서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수많은 자극을 받는다. 아이는 속을 썩이고 차는 끼어들고 상사는 잔소리를 하며 애인은 배신하고 믿었던 사람은 사기를 치기도 한다. 이 모든 자극에 우리는 고함과 분노, 좌절의 한숨과 자기 비하의 신음 등으로 반응한다. 그런데 그 중간에 공간이 있다고 한다. 한 템포를 죽이고 그 공간 속에서 호흡하고 자극에 대한 습관적 반응을 알아차리고 자기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 이것이 바로 치유의 핵심이며 행복의 열쇠라는 빅터 프랭크의 말.


이것이었다. 중년의 유머는 말장난이거나 개그가 아니라 순간과 순간을 잇는 여유였다. 사람 사이에 판단이라는 것을 배치하지 않고  그 공간에는 공감을 둔 채 상대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 꽃 병처럼 차분하고 편안한 기운을 내뿜는 사람, 다른 사람까지 편안함을 감염시키는 사람, 은근한 미소가 자연스럽고 고운 사람, 이 정도면 유머 있는 중년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비록 내 멋대로지만, 중년의 유머를 정리하고 나니 개운해졌다. 이제는 누군가, 생각보다 진지한데요 라고 말해도 조급하거나 초조하지 않을 것 같다. 재밌는 아저씨보다 공간과 여유를 가진 아저씨가 내가 생각하는 유머 있는 중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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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윤용인(<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저자, 노매드 대표이사)

<딴지일보> 편집장을 거쳐 현재 노매드 힐링트래블 대표를 맡고 있으며, 심리에세이 《어른의 발견》, 《심리학, 남자를 노크하다》, 《사장의 본심》, 《남편의 본심》, 여행서 <<시가 있는 여행> <발리> 등의 책을 썼다. 또한 주요 매체들에 ‘윤용인의 심리 사우나’, ‘아저씨 가라사대’, ‘남편들의 이구동성’ 등 주로 중년 남성들의 심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칼럼을 써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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