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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을 살고 난 뒤에도, 새롭게 시작될 사랑

존 버거의 『A가 X에게』와 가브리엘라의 「Tren de la Medianoche/Ramb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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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자신만은 자신만의 이름으로 불리어지기를 소망한다. 또다른 사비에르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만은 특별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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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이 있어 며칠 제주에 머물렀다. 일정이 없는 낮 동안, 월정리와 함덕 등 북쪽 해변을 전전하며 존 버거의 소설 『A가 X에게』를 읽었다. 내가 머무는 동안 제주의 대기는 불안정해 전혀 예상치 못한 시간에 소나기를 퍼붓곤 했다. 빗소리가 들리면 저절로 눈이 창밖을 향했다. 그럴 때면 어쩔 수 없이 감옥에 갇힌 터키 시인 나짐 히크메트가 떠올랐다. 인생의 절반을 그는 감옥이나 망명지에서 보냈다. 열아홉 살이 될 때까지의 성장기를 제외한다면, 그의 삶에 평범한 일상은 없었다. 그에게 이 세계란 고통과 투쟁으로 점철된 곳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감옥에 갇힌 나짐 히크메트는 이런 시를 썼다.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진정한 여행」 중에서

 

북쪽 바다를 바라보며 나는 감옥에 갇혀서도 아직 씌어지지 않은 가장 훌륭한 시를, 아직 살아보지 않은 최고의 날을, 가장 넓은 바다를 궁금해하는 한 남자를 떠올렸다. 그의 얼굴을, 수염과 입술을, 그리고 숨소리와 눈동자를 상상했다. 그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런 얼굴은 한 개인의 것이 아니니까. 삶의 절망에 갇혀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모든 시인들의 것이니까. 하이네, 마야코프스키, 로르카, 네루다의 얼굴이니까. 그렇다면 그 얼굴을 만지고 싶었던 여자라면 어떨까? 그녀의 얼굴을 상상하는 것이라면? 그것 역시 어렵지 않았다. 제주의 비는 곧 그쳤고, 나는 다시 책을 펼쳤다. 거기에 A, 그러니까 그 남자의 얼굴을 사랑한 여자의 말들이 남아 있다.

 

 

사랑의 여러 이름으로 그를 부르는 이유

 

A는 아이다, 곧 한 여자의 이름이다. X는 사비에르, 즉 감옥에 갇힌 한 남자의 이름이다. 사비에르는 수제라는 도시의 중심부에 있는 교도소의 73호 감방에 갇혀 있다. 그는 테러리스트 단체를 결성한 혐의로 이중종신형, 곧 먼저 종신형이 집행되고 나면, 그 후에도 죽을 때 나이만큼의 기간 동안 시신을 감옥에 가둬두는 형벌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A가 X를, 비록 그게 죽은 몸일지라도 볼 수 있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둘은 법적인 부부가 아니라 면회도 불가능하니까. 둘 사이를 연결하는 건 편지뿐이다. 존 버거는 서두에서 새 교도소가 만들어지면서 폐쇄된 옛 교도소 감방에서 A가 X에게 보낸 편지 뭉치를 발견했다고 설명한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존 버거는 책이 출간된 뒤 진짜 이 편지 뭉치를 발견한 게 맞는지, 아니면 꾸며낸 이야기인지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보기에 그건 중요하지 않은 문제인 것 같다고 덧붙인다. 맞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수제가 실재하는 도시인지, 아이다와 사비에르가 실존 인물인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제주의 해변에서 내가 상상한 나짐 히크메트의 얼굴처럼, 사비에르라는 이름은 이 고통스러운 삶이 존재하는데 과연 그럴듯한 이유가 있는 것인지 알기 위해 투쟁한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보통명사이기 때문이다. 아이다는 이런 의문에 맞서다 감방에 갇힌 사람을 오직 사랑의 이름만으로 부른다.


다음은 그녀가 사비에르를 지칭한 다른 이름의 목록들이다.

 

카멜레온, 그리스어로 ‘(나의) 엎드린 사자’
미 구아포, 스페인어로 ‘나의 멋쟁이’
하비비, 아랍어로 ‘내 사랑’
카나딤, 터키어로 ‘(비행기의) 날개’인 ‘카나트’에서 따온 애칭
미 소플레테, 스페인어로 ‘나의 횃불’
야 누르, 이집트의 춤곡에 나오는 사랑의 표현

 

이런 사랑의 말들을 둘러싼 세계는 아파치 헬리콥터와 탱크가 사람들을 죽이러 다니는 잔혹한 곳이다. 아파치가 아보르 구역의 오래된 담배 공장 위를 선회할 때, 거기 숨어 있는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이웃에 사는 여인들이 폭격을 막는 인간 방패가 되겠다고 나섰다. 아이다가 가보니 스무 명 남짓한 여인들이 흰색 스카프를 흔들며 평평한 지붕 위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일층에서는 여인들이 줄을 맞춰 서서 등을 벽에 기댄 채 건물 전체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한 대에 5천만 달러인 아파치가 그들을 겨냥하며 나타났다. 그렇게 헬기가 공장 지붕 위를 선회하는 동안, 그들이 한 일은 서로 손을 잡은 채 가끔씩 서로의 이름을 반복해 부른 일이다.


사실 아이다의 편지에 등장하는 모든 이름은 가명이다. 그건 자신의 편지가 교도소 당국에 의해 모두 검열된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 버거를 흉내내자면, 내가 보기에 그건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성장하는 게 맞다면, 이제쯤 우리는 마땅히 다른 이름으로 불리어져야만 할 것이다. 내가 나의 이름으로만 불리어질 때, 검열관들은 나와 사비에르를 구분하고 결국 사비에르를 죽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 역시 사비에르라고 불리어진다면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알아볼 수 있을까? 나를 사랑하는 사람마저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만한 고통이 따로 있을까? 바로 여기, 누군가에게 나만의 이름으로 불리어지기를 바라는 욕망과 나 역시 사비에르로 불리어야만 그를 살릴 수 있다는 사실 사이에 타인의 고통을 마주하는 인간의 고뇌가 있다.

 

 

세상 속에 있다는 것은 고통이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여덟 살 때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포르투갈로 이주해 살면서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파두 음악에 푹 빠진 소녀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가브리엘라 마로네. 1974년 그녀는 군부독재하의 아르헨티나에서 데뷔앨범 <Gabriela>를 발표하지만 저항가수로 간주되어 곤란을 겪다 결국에는 조국을 떠나고 말았다. 가브리엘라가 아르헨티나로 돌아간 것은 1992년이었다. 그리고 몇 년 뒤, 재즈 기타리스트 빌 프리셀의 연주곡 「Ramble」에 반한 그녀는 그 곡에 스페인어 가사를 붙여 노래한 데모테이프를 그에게 보냈다. 빌 프리셀의 기타와 그녀의 목소리가 서로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듯한 앨범 <태양의 저편(Detras Del Sol)>은 그런 인연으로 만들어졌다. 이 앨범에서 그 곡은 「Tren de la Medianoche/Rambler」로 재탄생했다.


빌 프리셀의 기타 선율은 서정적이고 가브리엘라의 목소리는 감미롭지만, 이 노래는 이별의 고통을 노래하고 있다. 자정의 기차를 타고 내가 사랑하는 한 소녀가 떠나가고 있다는 것, 그래서 나는 너무나 슬프고 외롭다는 것, 내게 내일은 없으며 나는 심장을 잃어버렸다는 것. “모든 사랑은 반복을 좋아해요. 그것은 시간을 거부하는 것이니까요. 당신과 내가 하는 것처럼 말이에요.”라는 아이다의 말처럼 당연히 『A가 X에게』에도 이와 유사한 고통이 등장한다. 그건 아이다가 지붕에서 만나는 열아홉 살 아마의 사랑 이야기다. 아마는 라미라는 이름의, 열 살 정도 많은 남자를 사랑했는데, 그는 경비대에 끌려가 총살당했다. 그 사실 앞에서도 그녀는 차분했다. 마치 가브리엘라의 목소리처럼.


그런 아마가 비명을 지르며 눈물을 쏟아낸 건 그로부터 넉 달 뒤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흔한 아르헨티나 영화 속에서 라미와 똑같이 생긴 배우를 보면서다. 아마는 지붕 위에서 비명을 질렀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요!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어떻게 두 명의 라미가 존재하는 게 가능하냔 말이에요! 그가, 그가 유일무이한 사람이 아니라면, 제가 어떻게 그를 애도할 수 있겠어요? 그리고 얼마 뒤, 아마는 라미의 형에게서 자신의 이름이 적힌 라미의 시집을 한 권 받는다. 베잔 마투르라는, 젊은 터키 여성 시인의. 아마는 지붕을 가로질러 가 책을 들고 와서는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마치 기도를 드릴 때처럼 큰 소리로 시를 읽는다.

 

기다리는 법을 아는 피는
또한 돌이 되는 법도 알고 있다
세상 속에 있다는 것은 고통이다
이것이 내가 배운 것이다

 

책을 덮은 뒤, 아마는 말한다. “왜 이렇게 고통이 많은 걸까요. 온통 고통뿐이잖아요, 왜 그런 거예요? 사람들이 서로를 갈기갈기 찢는 일을 멈추지 않잖아요. 말 좀 해주세요. 정말 이유를 알고 싶어요. 어쩌다가 우리는 단지 아파하기 위해 태어난 걸까요. 제가 배운 건 그거예요. 정말 이유를 알고 싶어요.” 그러나 아이다는 이유를 말하는 대신에 붉은 콩이 담긴 대야에 손을 넣어 손가락 사이로 콩을 쓸어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가을이 가기 전에 하루 정해서 이것들을 일곱 시간 동안 삶아야 해요, 요리하기 전에는 소금 치지 말고. 라임-라임이 레몬보다 나아요-도 좀 구해야 할 거예요. 그리고 달걀도 아주 단단하게 삶아야죠. 적어도 여섯 시간 이상 양파 껍질과 함께 넣어 삶고, 물이 끓어서 증발하는 걸 막기 위해 올리브기름 한 숟갈 넣는 것도 잊으면 안 돼요. 알았죠?”

 

 

모든 사랑은 반복을 좋아한다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일단 계속해보자. 우리 모두는 자신만은 자신만의 이름으로 불리어지기를 소망한다. 또다른 사비에르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만은 특별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이 소설에는 그게 바로 이 세상에 그토록 많은 고통을 만든 원인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세 가지 아름다운 이야기가 나온다.

 

1. “아니, 우리는 누군가를 따라잡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항상 앞으로 나아가는 것, 밤이나 낮이나, 동료 인간들과 함께, 모든 인간들과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그 행렬이 앞뒤로 너무 길어지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뒤에 선 사람들이 앞에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더 이상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점점 더 드물게 만나고, 점점 더 드물게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32쪽 

- 나는 모든 인류와 정확하게 나란히 걸어야만 한다.

 

2. 구스타보라는 신발장수가 나이가 들어서 죽어요. 가게에서 샌들을 고치다가 죽은 거죠. 어떤 천사가 천국까지 그와 동행하는데, 가던 중에 천사가 이렇게 말해요. 원한다면, 지금 아래를 내려다보면 당신이 일생 동안 남겨놓은 발자국을 볼 수 있을 겁니다. 노인은 아래를 내려다보죠. 그리고 자신이 남겨놓은 긴 발자국의 흔적을 봐요. 그런데 눈에 들어온 그 흔적들이 그를 혼란스럽게 해요. 어째서, 그가 물었죠, 발자국 흔적이 두세 군데에서, 아주 길게, 멈춰 있는 겁니까? 마치 그때 내 인생이 끝나서 죽은 것처럼 말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죠? 천사는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죠. 저건 제가 당신을 데리고 다녔던 시간들입니다! 173쪽

 

- 내가 사라질 때, 나는 천사의 등에 업혀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이다.

 

3. 단추와 콩은 공통점이 있어요. 그게 뭔지 알아요? 힌트를 줄게요. 당신 손을 한번 보세요! 내가 보낸 손 그림들을 창문 바로 아래 붙여놓았다고 했죠. 그렇게 하면 바람이 불 때마다 그림들이 제멋대로 흔들린다고요. 그 손들은 당신을 만지고 싶은 거예요. 당신이 먼 곳을 보고 싶을 때 당신의 고개를 돌려주고, 당신을 웃게 해주고 싶은 거라고요. 갓 태어난 아기들이 울음 대신 웃음을 터뜨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상한 질문이죠. 우린 삶이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내 인생에서 나의 손은 당신을 웃게 해주고 싶었어요. 당신 엄지를 한번 봐요! 그게 단추와 콩을 이어주는 고리예요. 콩을 까거나 단추를 풀 때, 엄지손가락 동작이 거의 똑같잖아요. 167쪽


-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은 아래 P.S.에.

 

P.S.
책을 덮은 뒤, 아마는 말한다. “왜 이렇게 고통이 많은 걸까요. 온통 고통뿐이잖아요, 왜 그런 거예요? 사람들이 서로를 갈기갈기 찢는 일을 멈추지 않잖아요. 말 좀 해주세요. 정말 이유를 알고 싶어요. 어쩌다가 우리는 단지 아파하기 위해 태어난 걸까요. 제가 배운 건 그거예요. 정말 이유를 알고 싶어요.” 그러나 아이다는 이유를 말하는 대신에 붉은 콩이 담긴 대야에 손을 넣어 손가락 사이로 콩을 쓸어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가을이 가기 전에 하루 정해서 이것들을 일곱 시간 동안 삶아야 해요, 요리하기 전에는 소금 치지 말고. 라임-라임이 레몬보다 나아요-도 좀 구해야 할 거예요. 그리고 달걀도 아주 단단하게 삶아야죠. 적어도 여섯 시간 이상 양파 껍질과 함께 넣어 삶고, 물이 끓어서 증발하는 걸 막기 위해 올리브기름 한 숟갈 넣는 것도 잊으면 안 돼요. 알았죠?”

 

- 나 같은 열등생을 위해서 한 번 더 반복하는 아이다의 친절한 물음.

 

 

내가 그토록 많은 것들을 사랑한다는 걸

 

1924년에 공산당에 입당한 뒤, 1937년 체포돼 1950년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던 나짐 히크메트는 1962년 3월 28일 프라하와 베를린을 잇는 기차 창가에 앉아 ‘내가 사랑한다는 걸 모르고 있었던 것들’이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전략)


내가 길들을 사랑한다는 걸 나는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아스팔트 길도
바퀴 뒤로 보이는 길을 사랑한다는 걸
우리 두 사람은 닫힌 상자 안에 있었고
세상은 양쪽에서 말없이 멀어져갔다
어떤 이유에선지 꽃들이 생각난다
양귀비, 선인장, 노란 수선화
이스탄불 카디코이의 노란 수선화 정원에서 마리카와 입맞췄었다
그녀의 숨결에서는 신선한 아몬드 향이 났다
나는 열일곱 살이었다
내 가슴은 그네를 타고 하늘에 닿았다
내가 꽃을 사랑한다는 걸 나는 모르고 있었다
감옥에 있을 때 친구들이 붉은 카네이션 세 송이를 보내주었는데도


지금 막 별들이 생각났다
나는 별들도 사랑한다
내가 아래쪽에서 별들을 보며 누워 있든
별들이 있는 곳으로 날아가든
내 눈앞에서 반짝이며 눈이 흩날린다
꾸준히 내리는, 젖어서 무거운 눈과 소용돌이치는 마른 눈발
내가 눈을 사랑한다는 걸 나는 모르고 있었다
지금처럼 체리 열매 같이 붉은 석양을 보면서도
내가 태양을 사랑한다는 걸 나는 몰랐었다
가끔 그림엽서에서 볼 때가 있지만
아무도 저런 식으로 그림을 그릴 수는 없다
내가 바다를 사랑한다는 걸 몰랐었다
아조프 해를 빼고는


내가 구름을 사랑한다는 걸 나는 모르고 있었다
내가 구름 아래 있든 구름 위에 있든
구름이 거인처럼 보이든 털북숭이 짐승처럼 보이든


내가 비를 좋아한다는 걸 나는 모르고 있었다
촘촘한 그물처럼 내리든 유리창을 세차게 때리든
내 가슴은 나를 비의 그물에 뒤엉키게 하거나 빗방울 속에 가둔다
미지의 나라들을 향해 떠나며 내가 비를 사랑한다는 걸 모르고 있었지만
프라하-베를린 간 기차 창가에 앉아
갑자기 이 모든 열정을 발견한 것은
내가 여섯 번째 담배에 불을 붙였기 때문이다

기차가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가르며 흔들린다
내가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좋아했다는 걸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엔진에서 불꽃이 튄다
불꽃을 사랑한다는 걸 나는 몰랐었다
내가 그토록 많은 것들을 사랑한다는 걸 나는 모르고 있었다
예순 살이 되어 프라하-베를린 간 기차 창가에 앉아 그것을 발견할 때까지
마치 돌아오지 못할 여행처럼 세상이 사라져가는 걸 지켜보면서
(류시화 번역. 전문은 여기)

 

이 시를 썼을 때, 나짐 히크메트는 예순 살의 노인, 여전히 고국을 떠난 망명자였다. 그럼에도 그는 고통이 아니라 사랑에 대해서, 그것도 이제 막 알게 된 새로운 사랑에 대해서 노래한다. 이 세상에 사는 게 고통이라는 걸 몰라서 그랬던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이듬해 그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나짐 히크메트의 시를 다시 읽으니, 이제 조금은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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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가 X에게존 버거 저/김현우 역 | 열화당
사비에르와 아이다, 두 사람은 각자가 처한 현실에 맞서 자신들의 일상에 대한 저항과 사유의 발견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아이다는 사람들의 상처를 보고 듣고 어루만지면서, 사비에르는 감옥 안에서 듣는 소식 또는 기억을 통해 이 세계의 불평등과 폭력성에 대해 잊지 않고 되새기기 위해 메모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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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연수(소설가)

전통적 소설 문법의 자장 안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소설적 상상력을 실험하고 허구와 진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가이다. 1993년 『작가세계』 여름호에 시를 발표하고 이듬해 장편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제3회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나섰다. 대표작에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 『7번 국도』 『꾿빠이, 이상』 『사랑이라니, 선영아』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밤은 노래한다』 소설집 『스무 살』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산문집 『청춘의 문장들』 『여행할 권리』 등이 있다.

A가 X에게

<존 버거> 저/<김현우> 역16,000원(0% + 3%)

소설의 주인공인 사비에르와 아이다, 두 사람은 각자가 처한 폭압적 현실에 맞서 자신들의 일상에 대한 저항과 사유의 발견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아이다는 약제사로서 사람들의 상처를 보고 듣고 어루만지면서, 사비에르는 감옥 안에서 듣는 바깥의 소식을 통해 또는 기억을 통해 이 세계의 불평등과 세계화, 자본주의, 제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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