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되지 않은 역사 체증의 소화제 <암살>
<암살>
역사적으로 큰 잘못을 저지른 수많은 사람들이 단죄되지 않고 여전히 기득권으로 살아가면서 우리의 역사는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악순환 되어 왔다. 그런 역사의 유령들, 이 땅에 여전히 발을 딛고 서서 현재로 되돌아오고야 마는 청산되지 않은 과거의 유물들을 말끔하게 정리해야 한다는 <암살>의 메시지는 단호하고 강렬하면서 청량하다.
※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인정한다는 맛집을 굳이 찾아가지 않는 편이다. 누가 먹어도 맛있는 음식보다는 투박해도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이 좋다. ‘입맛’에 대한 이런 취향은 영화를 고르는데도 적용된다. 솔직히 블록버스터 자체에 흥미가 없는 편이다. 때를 놓쳐 못 본 영화가 천만을 향해 나아가는 순간, 영화에 대한 관심은 급감해서 굳이 안 봐도 된다면 안보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암살>은 좀 달랐다. 물론 이것도 취향의 문제긴 하지만, 최동훈 감독의 영화를 워낙 좋아하는데다 제작사 ‘케이퍼 필름’이 가지고 있는 일관성과 변하지 않는 특성도 좋아한다. 그래서 천만을 향해가는 시점에서도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하게도 <암살>은 최고의 재료로 최고의 요리사들이 모여 만들어낸 만찬 같은 영화로, 굳이 그 맛이 나쁠 수가 없는 영화다. 당연히 2시간 20분이라는 긴 상영시간도 지루하지 않았고, 잘 짜인 이야기와 풍성한 인물들, 부족함 없는 배우들의 연기, 부담스럽지 않은 민족주의와 그 메시지, 그 와중에 영화적 재미를 놓치지 않는 연출력까지 어느 하나 딱히 꼬집어낼 단점이 없다. 한마디로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도 많더라, 할 만하다. 하지만, 포만감이 들지 않아 자꾸 내가 뭘 먹었는지 되짚어 보게 된다.
<암살>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줄거리도 딱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다. 한마디로 <암살>은 1930년대 경성을 배경으로 조선독립군의 활약상을 그린 영화다. 여기에 <도둑들>을 통해 천만 관객을 동원한 흥행 감독으로서 최동훈의 여러 장기들이 쫀쫀하게 녹아들어 있다. 2004년 <범죄의 재구성>을 시작으로 최동훈 감독은 아주 많은 등장인물을 사건의 현장으로 끌어들여, 속고 속이고 다시 속이는 복잡한 이야기를 놀라울 정도로 조직적이고 흐트러짐 없게 만들어냈다. 이러한 장기는 <암살>에도 제대로 살아나 장르 영화의 쾌감과 특성, 많은 등장인물들에도 불구하고 어수선하지 않은 이야기의 흐름을 만들어 낸다. 여전히 영화는 세련된 스타일로 가득하고, 고전 서부영화 같은 장르적 풍미도 자아낸다. 여기에 전지현이라는 여배우를 내세워, 한국형 블록버스터에서 처음으로 중심에 우뚝 선 독보적인 여전사 캐릭터를 만들어 낸다. 1930년대의 상해나 경성의 풍경을 고증을 통해 정교하게 되살리고, 역사적 사실과 픽션을 무리 없이 녹여내 김구, 김원봉 같은 실존인물 사이에 안옥윤, 염석진 같은 허구의 인물을 묘하게 뒤섞어 꽤 사실감 있는 팩션 영화를 만들어 낸다.
더불어 <암살>이라는 영화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은 민족주의라는 거대하고 묵직한 이즘에 갇히지 않고, 오히려 명확한 메시지 하나를 향해 나아간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암살>은 민족주의라는 신파에 빠져 감정의 과잉을 만들어내기 보다는,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침략과 학살의 역사를 비난하고 거기에 관여한 사람들에 대한 단죄가 필요하다는 일관된 정서를 유지한다. 그렇게 <암살>은 무조건적인 반일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오염된 역사 속에서 자기의 이익을 위해 선량한 사람들을 속이고 해한 사람들에 대한 단죄를 이야기 한다. 벌 받아야 할 사람이라면 한국 사람이건 일본 사람이건 상관없이 벌을 받아야 하고, 무고한 사람이라면 일본 사람이라 해도 보호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뚝심 있고 올바르게 여겨진다. 더불어 새로운 여성상을 창조하고 보여준다. 여성 독립운동가인 안옥윤(전지현)과 아네모네 마담(김혜숙)을 통해 근대화 속 한국 여성의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 낸다. 소비문화의 주체로만 그려지던 경성의 모던 걸에서 벗어나 역사의식을 가지고 실천하는 여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쌍둥이라는 설정을 통해 부르주아적 신여성 미츠코와 여성 독립운동가 안옥윤을 대비시킨 것도 무척 흥미로운 설정이다. 여기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아내와 친딸까지도 희생시키는 강인국(이경영)은 경제개발 논리로 수많은 희생자를 만들어낸 우리나라 친일 역사의 극단적인 상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하와이 피스톨(하정우)과 염석진(이정재)이라는 복잡한 캐릭터가 딱히 동정을 받거나 미움을 받지 못하고 겉도는 점은 아쉽다. 돈만 주면 아무나 죽이는 하와이 피스톨이 변심을 하고 안옥윤을 도와주는 당위성이나, 독립운동을 하던 염석진이 밀정이 되는 과정에 딱히 동정하거나 비난할만한 당위성이 입체감 있게 표현되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그렇게 맛있게 먹었는데 뭘 먹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고 더부룩해지려했다.
하지만 <암살>은 끝내 더부룩한 속을 풀어줄 소화제도 그 말미에 준비하고 있다. <암살>이 지키려한 뚝심 있는 메시지 하나가 청량하게 에필로그에 등장한다. 어떤 변명과 권력으로 비호되고 있더라도, 비록 그 방법이 암살이라는 극단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염석진에 대한 단죄는 거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큰 잘못을 저지른 수많은 사람들이 단죄되지 않고 여전히 기득권으로 살아가면서 우리의 역사는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악순환 되어 왔다. 그런 역사의 유령들, 이 땅에 여전히 발을 딛고 서서 현재로 되돌아오고야 마는 청산되지 않은 과거의 유물들을 말끔하게 정리해야 한다는 <암살>의 메시지는 단호하고 강렬하면서 청량하다. 광복 70주년을 맞이한 시점에서 우리는 여전히 청산되지 않은 과거의 체증 앞에 답답함을 느낀다. 사과 받지 못한 일본과의 관계, 친일 기득권층이 내뱉는 망언들, 그리고 <암살>의 흥행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을 보자면 그 ‘단죄’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되짚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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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