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계별 장르소설 읽기 프로젝트 - 심화 3편
독서 메모의 중요성 메모의 즐거움
집요하게 메모를 권하여 미안한데 진심이다. 미스터리만 아니라 다른 책도 기록을 남기며 읽어 손해 날 일이 어디 있겠나?
출판사에서 프랑스 작가 폴 알테르의 『네 번째 문』을 보내주었다. 일 때문에 통화하다가 ‘요즘 아는 이들과 『네 번째 문』을 읽고 있습니다.’라고 한 덕분이다. 각자 자기가 편한 언어로 읽고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불어를 전혀 몰라 일본어판과 이번에 얻은 한국어판으로 따라간다. 1987년에 코냑 상(코냑 미스터리 영화제의 일환으로 신인 발굴을 위해 1983년에 만들었다고 한다)을 받은 이 소설은 밀실살인을 비롯해 여러 수수께끼가 나오는 프랑스 본격 추리라고 한다. 먼저 읽은 분의 소개에 따르면 힌트와 복선이 상당히 많이 깔려 있다. 이 소설을 위해 작은 수첩을 한 권 새로 꺼냈다.
책을 읽어가며 사건 흐름을 따라 메모를 남기지만 등장인물은 늘 수첩이나 공책 맨 뒷장부터 거꾸로 정리한다. 외국 소설을 읽다 보면 등장인물 이름 때문에 자주 책을 앞뒤로 뒤적이게 되는데, 한곳에 몰아 적어놓으면 쉽게 찾을 수 있다. 대개 이름 옆에는 처음 등장한 페이지도 적어둔다.
사실 수첩이나 공책보다 책에 바로 적는 일이 잦다. 밑줄, 옆줄을 긋거나 짧은 생각을 적고, 독서용 기호를 남기며 책을 읽는다. 중요한 책은 메모와 표시가 페이지마다 가득하다. 외출 때 공책이나 수첩을 따로 챙기기 번거로워 빌린 책이 아니라면 소설류는 책에 직접 기록을 남기는 편이다. 출판사에서 읽어보라고 원서를 보내면 늘 ‘낙서하며 읽어도 됩니까?’라고 묻는다.
일본 소설은 속표지 다음에 제목이 조그맣게 적혀 있는 페이지가 있다. 공간이 넉넉해 등장인물을 적어두기 편하다. 이 페이지 오른쪽에 완전히 빈 페이지가 있어 꽤 복잡한 등장인물 관계도까지 그릴 수 있다. 수첩에 적건 책에 직접 적건 자기만의 독서 기호를 만들면 편하다. 힌트나 복선으로 보이는 부분, 중요하게 여겨지는 발언, 마음에 드는 표현 등에 그런 기호를 살짝 표시해두면 나중에 책을 다시 읽을 때 편하다. 깔끔한 독자로부터 책에 낙서한다고 핀잔을 듣기도 하지만 내겐 가장 편한 방법이다. 요즘은 전자책이 있는 작품이라면 거의 무조건 전자책으로 구입하니 점점 핀잔 들을 일도 줄어들 것이다.
독서용 기호는 상단에 주로 하고, 하단이나 좌우 여백에는 간단한 메모를 한다. 기호는 확장성이 있게 만들어야 한다. 즉 유사한 기호는 서로 비슷한 뜻을 지닌 표시여야 하며, 같은 계열의 기호를 계속 추가할 수 있어야 한다.
메모의 즐거움을 느꼈던 작품을 꼽겠다고 하면 얼른 본격 추리를 떠올릴 텐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 온다 리쿠의 특유의 분위기가 두드러진 『유지니아』가 그 좋은 예다. 한 번 읽은 분들도 다시 짚으며 읽어보면 다른 재미가 있다. 이 작품을 읽을 때는 스프레드시트를 써서 메모했다. 이쪽과 저쪽의 차이, 그때와 지금의 차이 등을 대조하며 읽다 보면 더욱 야릇한 세계 속을 산책하게 된다. 그림 솜씨가 있다면 『유지니아』 속 풍경이나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실제로 그려보아도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이다.
아비코 다케마루의 『살육에 이르는 병』 또한 독서 메모의 효용을 증명해주는 작품이다. 인터넷에서 가끔 ‘나는 범인을 알아챘다’고 하는 이들을 보는데, 논리적으로 그가 범인임을 증명해 내지 못하면 범인을 알아챈 게 아니라 ‘짐작’했을 뿐이다. 하지만 『살육에 이르는 병』에서 용의선상에 올릴 인물이 몇이나 되는가? 달랑 두 명이다. 50퍼센트의 확률로 찍고 ‘난 알아챘지’라고 자랑하면 입문자에게도 비웃음을 산다. 메모를 하고 결과를 정리하여 작가의 ‘계산’을 검산해보면 여러 곳에서 흥미로운 힌트와 복선을 발견할 수 있다. 시간 흐름에도 신경을 쓰기 바란다.
밀실에서 벌어진 사건을 다루는 작품들은 메모가 매우 중요하다. 밀실 상황에 대한 설명이 반복해서 나오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등장인물의 주장에 휘말려 자기 추리를 진행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 서툰 솜씨라도 평면도나 약도를 그리고 참고 사항을 적어둔다. 요코미조 세이시의 『혼진 살인사건』, 시마다 소지의 『기울어진 저택의 범죄』, 기시 유스케의 『유리망치』, 『자물쇠가 잠긴 방』, 『도깨비불의 집』, 아야츠지 유키토의 『미로관의 살인』, 『시계관의 살인』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46번째 밀실』 등을 골라 읽으며 밀실만 정리한 기록을 만들어보는 것도 ‘심화’ 단계쯤에서는 시작할 만한 작업이다.
여행이나 지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지명을 따로 메모한다. 하드보일드나 경찰 소설에 지명이 많이 나오는데 하라 료의 ‘사와자키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지명을 적어 인터넷을 통해 위치를 검색하고 주변 사진을 감상하다 보면 주인공의 모험에 동행하는 기분마저 느낄 수 있다. 다카무라 가오루, 기리노 나쓰오의 소설과 혼다 데쓰야의 경찰 소설에도 지명이 비교적 많이 나온다. 아직 남아 있는지 몰라도 일본의 어느 독자가 다카무라 가오루의 작품에 나오는 장소를 찾아다니며 소개하는 웹페이지를 정성스럽게 꾸민 것을 본 기억도 있다. 일본에는 아예 작품 속 범행 현장을 찾아가 소개한 『작가의 범행 현장』(아리스가와 아리스) 같은 책도 있다.
아야츠지 유키토의 『키리고에 저택 살인사건』은 앞부분에 길게 이어지는 사설에서 여러 힌트와 복선을 찾아내는 재미가 있고, 어쩌면 수수께끼의 핵심을 일찍 눈치 챌 수도 있다.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작품들도 그냥 피식피식 웃다 보면 끝나는 것 같지만 그 웃음 언저리에 폭탄이 묻혀 있다. 뭔가 어설픈 개그 한 판이 펼쳐지면 그 안이나 주변을 잘 살펴 위화감이 드는 요소를 점검하는 편이 좋다. 편한 마음으로 읽어야 할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소설들은 메모보다 새끼손가락만 한 포스트잇을 들고 툭툭 붙이는 정도로도 괜찮다.
책을 깨끗하게 보고 싶은 분이라면 포스트잇 같은 메모지에 적어 붙여두면 된다. 등장인물 정리도 포스트잇으로 해서 이리저리 옮겨 붙이며 생각을 정리할 수도 있는데,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떨어지는 바람에 자주 쓰지는 않는다.
포스트잇을 유용하게 쓰는 분들은 마술사 같다. 우표보다 조금 큰 포스트잇에 작은 글씨로 메모하며 책을 읽고, 나중에 그 메모를 바탕으로 공책에 정리한다. 책에 붙어 있던 포스트잇을 유리 탁자에 옮겨 붙이며 이리저리 위치를 바꾸는 모습이 마술 같았다. 그렇게 작성한 예쁜 독서 노트를 구경하기도 했지만 정성이 부족해 흉내도 내지 못하고 있다.
수첩을 이용하건 공책에 정리하건, 아니면 게을러서 책에 흔적을 남기건 각자 편한 방법을 선택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생각하며 읽는다’는 점이다. 어린이도 즐겨 읽는 셜록 홈스 이야기만 해도 그렇다.
『바스커빌가의 개』에는 이중의 수수께끼가 있다. 첫 번째 것은 살인자의 정체와 관계된 것이고, 두 번째 것은 책의 창작 상황과 코난 도일이 때로는 플롯에 무심하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그토록 많은 ‘사실임직하지 않은 사실’을 남겨둔 이유와 관계된 것이다. 내 생각에는 첫 번째 수수께끼를 해결하려면 두 번째 수수께끼부터 해결해야 한다.
이 문장은 어느 프랑스 사람이 쓴 글이다. 왜 나는 이런 독후감을 쓰지 못하는가, 라는 생각이 들면 메모는 필수다. 물론 메모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저렇게 쓸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메모 없이는 결코 저렇게 쓸 수 없다. 집요하게 메모를 권하여 미안한데 진심이다. 미스터리만 아니라 다른 책도 기록을 남기며 읽어 손해 날 일이 어디 있겠나?
다음 회부터는 ‘마니아 단계’다. 하지만 누가 나에게 ‘당신은 미스터리 마니아인가?’라고 물으면 ‘아니요’라고 답한다. 수십 년을 읽고도 왜 미스터리 마니아가 되지 못했는지, 별로 궁금하지 않을 그 비밀이 이어질 마니아편에서 밝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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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업 번역자. 중앙일보사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번역을 업으로 삼고 있다. ‘일본미스터리즐기기’ 카페 운영자이며 아직 창작은 하지 않지만 한국추리작가협회 회원이기도 하다.
아비코 다케마루의 《살육에 이르는 병》, 기리노 나쓰오의 《다크》, 《IN》, 에이드리언 코난 도일과 존 딕슨 카의 《셜록 홈즈의 미공개 사건》을 비롯해 히가시노 게이고, 미야베 미유키, 오리하라 이치 등의 작품을 우리말로 옮겼다. 또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 《나니와 몬스터》을 비롯한 가이도 다케루의 메디컬 엔터테인먼트, 와다 료의 《노보우의 성》, 《바람의 왼팔》을 비롯한 시대·역사소설을 번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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