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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할 수 없는 제안 - 뮤지컬 <더 데빌>
기존의 문법을 파괴한 새로운 시도
현란하게 쏘아대는 조명 역시 인상적인 장면을 연출해냈고, 무엇보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멜로디의 음악이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더 데빌>의 거리감이 더욱 아쉽게만 다가온다. 조금만 더 친절했다면, 하늘이 아니라 좀 더 땅의 언어, 생활의 언어를 썼다면 어땠을까.
Hommage to Faust
티켓에 인쇄된 대로, 뮤지컬 <더 데빌>은 괴테의 『파우스트』의 오마주다. 오마주란, 존경의 표시로 다른 작품의 주요 장면이나 대사를 인용하는 용어다. 사전적 의미를 짚어보고 나니 뮤지컬 <더 데빌>이 『파우스트』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기보다 『파우스트』의 오마주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다. 이 뮤지컬에는 『파우스트』의 ‘이야기’를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욕망을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파우스트』의 모티브를 빌려왔을 뿐, 몇몇 대사도 캐릭터도 『파우스트』를 떠올리게 하지만, 크게 연관성을 갖지 않아도 무방하다.
<더 데빌>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게 아니라, 악마에게 영혼을 팔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절박함, 지옥 같은 현실에 휘청이고 악마에 휘둘리는 심리가 날카로운 기타와 바이올린 선율에 섞여 휘몰아치는 극이기 때문이다. 난해하다. 물론, 그만큼 기존의 문법을 파괴한 새로운 시도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지저스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서편제>, <헤드윅>의 이지나 연출, 마이클리, 한지상, 윤형렬, 차지연 등 화려한 캐스팅으로 올가을 최고 기대를 모았던 뮤지컬 <더 데빌>은 예고했던 그 새로움과 파격 때문에 팬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갈리고 있다.
<더 데빌>의 배경은 뉴욕 증권가인 월스트리트. ‘블랙 먼데이’에 모든 것을 잃은 주식 브로커 존 파우스트는 하루아침에 절망의 늪에 빠진다. 아무리 기도하고 갈구에도 신은 그에게 응답하지 않고, 재기할 기회를 도무지 주지 않는다. 그때 유혹처럼 다가오는 X, 삶의 나락에 빠진 사람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선사한다는 천사. 하지만 그 대가로 핏빛 심장을 원하는 악마인 X는 존 파우스트와 영혼을 건 거래를 한다.
여기까지는 꽤 매력적이다. 뉴욕 월스트리트를 철제 계단과 조명으로 미니멀하게 꾸며놓은 무대는 이야기의 기대감을 한껏 높인다. 왼쪽에 마련된 밴드와 오른쪽에, 약간은 구 세기적인 네 명의 싱어들도 흥미롭다. 더군다나 탐욕에 눈이 멀어 욕망에 영혼을 넘겨준다는 파우스트 박사가 월스트리트에 등장했다는 설정이 재미있다. 이득이 있다면, 중소기업의 목을 졸라 대기업을 불려주는 식의 인수합병으로 배를 채워가는 월가니까 말이다. 파우스트 박사가 X를 만나기에 더없이 매력적인 장소다. 하지만 흥미로운 부분은 여기까지다.
자본주의의 심장, 월가에 재현된 파우스트
존 파우스트 박사의 솔로 곡이 연달아 다섯 곡이 흐르는 동안, 그가 X의 유혹에 기꺼이 목을 내밀게 되는 상황을 보여주는데, 2층 계단 위에서 뒷모습의 그림자만 비치는 X는 존재감만으로도 긴장을 유발한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X가 등장할까! 서늘한 음악과 함께 그가 등장했다.
이제 X는 어떻게 존 파우스트 박사를 파멸시킬 것인가? 그의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여인 그레첸은 존 파우스트 곁에서 어떤 몰락을 겪게 될 것인가?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른 상황에서 뮤지컬 <더 데빌>은 좀체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X의 등장과 함께 존 파우스트는 악마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어떤 일인지 관객은 알 수가 없다. 그저 그레첸의 알 수 없는 외침에서 짐작할 따름이다. “존, 그가 널 파멸시킬 거야. 우리를 죽일 거야.” 여기서부터는 관객의 상상력이 많이 필요하다. 연출가는 더 이상의 이야기는 들려주지 않겠다고 각오라도 한 듯이 어떠한 정보도 관객에게 주지 않는다.
다만 아까와 달리 거만한 표정의 존 파우스트가 갑자기 그레첸에게 야멸차게 굴기 시작했고, 그레첸은 알 수 없는 환영에 시달린다. 그때마다 등장하는 X는 별다른 인상 없이 무대에서 등퇴장을 반복한다. 인물들의 혼란스러운 심리를 담은 노래들이 거친 록비트에 맞춰 쏟아져 흐르지만, 아 정말 감질나게도 도대체 무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저들은 왜 저렇게 소통하지 않고 괴로워하는지 알 수가 없다.
특히 존 파우스트의 순결한 연인으로 등장하는 그레첸은 X가 나타나자마자 끊임없이, 영문도 모른 채, 학대를 당하는데 배우 차지연의 열연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폭행을 당하고, 성적 능욕을 당하고, 눈물을 그칠 새가 없는 그녀의 고통은 객석에 충분히 전해지지만, 좀체 공감할 수 없는 상황이라 그저 객석과 배우는 쓸쓸히 마주앉게 되었다. 그레첸의 고통 끝에 이루는 구원 역시 맥락이 없으니 뜬금없이 다가올 뿐이었다.
꼭 극에 기승전결에 부합한 스토리를 들려달라는 건 아니다. 이 불친절한 이야기 가운데서도 몇 군데는 분명히 관객에게 말을 거는 대목들이 있다. 절망에 빠진 자가 신을 애타게 불러대지만, 신은 그저 위에서 바라만 볼 뿐 대답하지 않는다. 그때의 절망. 당신이 불신자건 종교가 있건 간에 이러한 고통은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봄직 한 일이다. 그때 다가오는 유혹은 얼마나 달콤한 것인지 누구라도 체감할 수 있다.
이렇게 감정적인 선이 닿을 때, 강렬하게 무대를 흔드는 기타 선율은 감동을 준다. 하지만 배우들의 연기도 노래도 객석까지 닿지 못할 때(심지어 밴드의 음향에 가사가 종종 묻히기도 했다), 저들이 왜 슬퍼하고 왜 괴로워하는지 관객이 마음으로 느끼지 못할 때, 그 황금 같은 대사와 별빛 같은 가사들은 허공에 허무하게 흩어진다. 선과 악, 사과나무, 구원, 악마 등등 시종일관 관념적인 단어만을 내뱉는 대사가 가장 문제였다. 도입부에서 본 월가의 배경은 난데없이 사라지고, 중세 악마와 신부의 대사처럼 난해한 말들이었다. 성경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뒷받침하는 에피소드가 단단하지 않아 추상적이고 모호한 의미만 남긴 말들이었다.
관념적인 대사, 불친절한 이야기, 공허해진 선과 악의 멜로디
큰 기대가 없었다면 큰 아쉬움도 없었을 텐데. 100 퍼센트의 기량을 무대에서 발산하는 배우들의 열연에 내 마음이 좀체 움직이지 않아서 발을 구를 만큼 안타까웠다. 현란하게 쏘아대는 조명 역시 인상적인 장면을 연출해냈고, 무엇보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멜로디의 음악이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더 데빌>의 거리감이 더욱 아쉽게만 다가온다. 조금만 더 친절했다면, 하늘이 아니라 좀 더 땅의 언어, 생활의 언어를 썼다면 어땠을까.
이런 일개 관객의 투정이야 실험적인 시도를 이해하지 못한 무지몽매함일 수도 있다. 만약 친절한 이야기보다는 틈새가 많아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이야기보다는 한 컷 한 컷의 장면이 주는 어떤 인상을 흥미롭게 여기는 관객이라면 기꺼이 도전할 만한 작품이다. 일단 무엇보다 믿고 보는 배우들이 포진해있으니 말이다. 연출가로부터 가장 월가 스타일이라는 칭찬을 받은 윤형렬은 멀쑥하고 바른 인상이 월가에 사는 존 파우스트 박사의 이미지를 가장 잘 재현해낸다. 그의 굵직한 음색이 X의 음산함과 대비되며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존재감만으로도 음산함이 느껴지는 모습을 기대했지만, X역 한지상의 왜소한 체격은 그렇게 위협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하지만 한지상 특유의 미성이 그 존재감을 불러일으킨다. 고음이 많은 노래인 데다가 감정선에 따라 소리의 강약, 음 고저의 변화가 많은 곡이었지만, 한지상의 여리고 때론 호기로운 목소리는 노래를 충분히 장악하고 있었다. 안쓰러운 그레첸 역의 차지연 역시 절대 쉽지 않은 노래임에도 불구 최고의 성량을 뽐낸다.
“그가 눈을 가리고 그가 너의 귀를 막고 그가 나의 손을 잡고 어두운 쪽으로 어두운 쪽으로 어두운 쪽으로.” 어두운 쪽으로 간다. 쓸쓸하고 어두운 길이고, 낯설고 미로 같은 길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낯선 길은 그 길을 택한 용감한 여행자에게 이전과 다른 것을 보여주는 법이다. 뮤지컬 <더 데빌>은 11월 2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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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태그: 더데빌, 송용진, 마이클리, 차지연, 한지상, 윤형렬, 괴테, 파우스트
인생이라는 무대의 주연답게 잘, 헤쳐나가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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