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최민석의 영사기(映思記)
영화적인 현실 <브이 포 벤데타>
스크린 안과 밖의 세계는 얼마나 다른가?
이처럼, 이 영화속의 현실은 너무나 영화적이다. 하지만, 어쩐지 우리의 현실은 영화적이다.
먼저, 세월호 침몰로 인한 희생에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아시다시피, 이 칼럼은 매주 우스개를 섞어서 영화 이야기를 합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영화 이야기로 출발하여, 정치,경제,사회, 문화, 삶 등 그 종착역을 어디에도 규정하지 않고 나아갑니다. 비록 갈팡질팡하며 뻗어나가는 이야기지만, 그래도 그 우왕좌왕하는 모습에는 나름의 색채를 띠고 있습니다. 소소한 유머가 그것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온 세상이 비탄에 빠져 있을 때엔 저는 그야말로 한 자(字)도 쓰고 싶지 않은 심정이 됩니다. 저 역시 애도에 동참하며, 묵묵히 세월 속에 상처를 보듬으며 지내고 싶습니다. 하지만, 연재라는 게 일회성 이벤트도 아니고, 축제도 아닌 이상, 제 편의대로 독자와의 약속을 저버릴 순 없습니다. 이럴 땐 실로 깊은 우울에 빠져 글을 씁니다.
슬픔의 깊이가 바닥까지 내려오더라도 필자의 본분을 잊을 수 없듯, 여러분도 각자의 자리에서 그러하리라 믿습니다. 여하튼 지금 이시기에 과연 이번호 <영사기>에는 어떤 영화가 좋을까, 오래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떠오른 영화는 바로 <브이 포 벤데타>였습니다. 자, 그럼 슬프지만, 이번호 영사기를 돌립니다.
<브이 포 벤데타> 스틸컷
<브이 포 벤데타>에서 정부는 국민들을 억압하고 통제하기 위해 존재한다.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수준에서 말하자면, 위정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위협’이라는 수단으로 국민들을 통제한다. 배경은 연도를 알 수 없는 가까운 미래의 영국. 미국은 전쟁중이고, 영국은 전염병으로 상당지역이 격리돼있다. 그렇기에, 시민들은 일부 통제된 지역에서만 살아간다. 외부의 전쟁과 전염병은 국민들을 더욱 제한된 지역에서 생활하게 하고, 더욱 정부의 통제 아래 살아가게 한다. 통행금지도 있고, 치즈나 우유 같은 일부 식품도 소비가 제한돼 있다. 경찰들은 차를 타고 다니며 시민들의 대화를 임의로 감청한다. 뉴스는 국가의 안보와 국민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정부가 제공하는 정보에 의존해 있다.
이런 상황에 과거 정부로부터 희생당했던 한 남자, 즉 주인공 V가 한 성벽을 폭파하게 된다. 정부는 재빠르게 성벽 지역을 격리시키고, 목격자들을 통제하고, 긴급회의를 소집한다. 그리고 언론에는 자신들이 오래된 성벽을 철거하는 작업을 했다고 알린다. 이제 영화에는 BBC처럼 거대한 방송사가 등장한다. 런던 시내에 거대한 철탑을 쌓고 있는 BTN이라는 이 방송사는 정부의 발표대로 보도를 한다. 이때, 이 뉴스를 중계하는 한 직원이 선배에게 묻는다.
"사람들이 이걸 믿을까요?"
선배는 후배에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한다.
"왜 안 믿겠어? BTN인데. 우리의 일은 뉴스를 보도하는 것이지, 꾸며대는 게 아니잖아."
그러더니, 자신도 탐탁지 않은 듯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여 후배에게 말한다.
"그건 정부가 하는 일이지. "
이 대목의 대사, 즉 ‘우리의 일은 뉴스를 보도하는 것이지, 꾸며대는 게 아니잖아’의 원문은 이렇다.
“Our job is to report the new, not fabricate.”
내가 본 영화의 자막에서 ‘report'라는 단어는 ‘보도’라는 옷을 입고 있었다. 물론, 영어권에서 일상적으로 쓰이는 ‘뉴스를 보도한다’는 말은 ‘report the news'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 말하자면, 번역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의 대사, 즉 ‘그건(즉, 꾸며대는 건) 정부가 하는 일이지’라는 언어와 조응을 이루면, 마치 이 ‘report’가 ‘보도(報道)’가 아니라, ‘보고(報告)’와 같은 느낌이 든다. 알다시피, report에는 보도하다는 뜻뿐만 아니라, ‘전하다, 알리다, 발표하다’라는 뜻도 있다. 내가 비록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작가는 아니지만, 나는 내 멋대로 아마 작가는 관객이 이런 식으로 독해해주길 바라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우리는 뉴스를 전할 뿐이지, 만들어내진 않잖아. 그건 정부가 할 일이지.”
이처럼, 이 영화속의 현실은 너무나 영화적이다. 하지만, 어쩐지 우리의 현실은 영화적이다. TV 화면 한 구석에 걸린 박스에서 유독 숫자가 변하지 않는 한 칸을 멍하니 바라보며, 저게 단지 영화 속의 대사일 뿐이길 간절히 바라는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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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
<앨런 무어> 글/<데이비드 로이드> 그림/<정지욱> 역14,400원(10% + 5%)
자유와 독자성을 잃어버린 소름끼칠 만큼 사실적인 전체주의 세계를 상정하여 풀어 낸 두렵고도 파괴적인 내용의 『브이 포 벤데타』는 그래픽 노블이라는 매체의 역사에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작품 중 하나이며 앨런 무어와 데이비드 로이드라는 작가를 대변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파시즘에 무릎을 꿇은 가상 미래의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