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자신과 갈등하며 여행한 사람, 이사벨라 버드

그녀의 절정기는 60대 이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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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일부 사람들은 나이 든 여자는 가치 없다고 말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각자에게는 각자의 페이스가 따로 있는 법, 나이와 상관없이 나를 찾아, 내 길을 찾아 갈 때 나 역시 이사벨라 언니처럼 60년 후 지구 반대편의 천재 시인에게까지 영감을 주는 매력적인 존재가 될지도 모르는 것을!

창피한 고백이지만, 지난날 성차별에 대해 나는 좀 예민하고 어리석게 반응했다. 차이도 있고 차별도 있는 것이 현실이긴 하다. 지금 생각하면 어차피 어울려 사는 세상인데 좀더 부드럽게 문제 제기하고 풀어갈 것을, 하고 후회되는 일이 꽤 있다. 그래도 이제는 성차별적 발언을 우아하게 웃어 넘기는 여유도 생겼다. 나이가 주는 지혜 덕분이다.

그러나 산 너머 산이랄까, 나이 들어감에 따라 이제 ‘연령 차별’이란 새로운 차별을 예민하게 느끼게 되었으니, 이를 어쩐담. 아무리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해도, 세상은 젊고 건강한 사람들에게 더 친절하다. 그리고, 세상은 같은 나이라도 나이든 여자보다 나이 든 남자에게 더 관대하다. 능력을 발휘할 기회도 더 많이 준다. 혹시 여자들의 20대는 29살에 끝나지만 남자들의 20대는 49살에 끝난다는 법조항이 있는데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

성별, 인종, 빈부, 계급, 시대, 연령. 우리 인간들은 살면서 얼마나 많은 벽을 만나게 되는 것일까. 그 벽을 넘어 자신의 길을 간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것일까. 책을 읽다 개인적 조건의 제약이나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고 위업을 이룬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저절로 입을 딱 벌리고 침 튀기며 감탄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워낙 어려서부터 훌륭했고 굳건한 의지로 초지일관 자신의 꿈을 향해 갔던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나같이 늘 또래들보다 뒤처지곤 하는 늦된 사람은 어려서부터 두각을 드러내신 분들의 천편일률적인 찬란함에 그만 기가 죽어버린다. 그만 책 읽다 아쉽게 침 닦고 입을 닫아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사벨라, 이 대담한 늦깎이 언니를 만나기 전까지는.


중국 여행 중 만주복을 입은 이사벨라 버드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 여행가들

우리나라에는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의 저자로 알려진 이사벨라 버드는 빅토리아 시대(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통치하던 1837년부터 1901년)의 여행 작가다. 잠깐, 빅토리아 시대라고? 그 시기는 대영제국의 남성들이 전 세계로 나아가 자신의 능력을 맘껏 시험해 볼 수 있었던 반면, 여성에 대해서는 극도의 제약이 있었던 시대가 아닌가? 우리가 아는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들은 낭만적 결혼만 꿈꾸며 집 안에 않았던가? 제인 오스틴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처럼. 어떻게 그 시대의 영국 여성이 지구 반대편 우리나라까지 올 수 있었을까?

의외로 그 시절 영국에는 세계여행을 한 여성 여행가들이 이미 많이 있었다. 영국에는 여행을 통해 교양을 쌓는 ‘그랑 투르(grand tour)’라는 전통이 있었다. 19세기 들어 낭만주의의 영향으로 역사 유적 탐방이 유행했으며, 산업혁명으로 축적된 부는 중상층에게 장기간의 여행 경비를 제공했다. 결정적인 것은 대영 제국의 침략행위였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식민지에는 늘 관리와 군인이 이동했다. 그들의 가족도 따라 이동했다. 교육자, 선교사, 하녀, 매춘부 등등이 뒤따랐다. 이제 남성들 뿐만 아니라 여성들의 여행도 어렵지 않게 되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여성들은 그들의 경험을 책으로 써 냈다. 수입을 얻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여행 목적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 책을 읽고 더 많은 여성들이 용기를 얻어 여행에 나서게 되었다.

이들 영국 여성들은 여행으로 빅토리아 시대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신의 숨겨져 있던 재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열악해 보이는 아시아 지역 여성들의 처지와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면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놀라운 사실은,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 여행가들이 다 발랄하고 건강한 젊은 아가씨들만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외로 이들 중에는 나이가 든 후 자신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한 중년과 노년 여성들이 많았다.
여성의 폐경은 여성에게 있어 중요한 자극제가 되면서도 여성의 약점을 없애주었을지도 모른다. 노후에 여행한 많은 여성들이 어떻게 그렇게 침착하게 여행을 했는지에 대한 해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폐경에 관한 이야기도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버드가 페르시아를 여행했을 때의 나이는 거의 60이었다.

이사벨라 버드가 조선 여행 중 휴대했던 여권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이사벨라 역시 그랬다. 그녀는 젊지도, 건강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떠났다. 자신을 가두던 고국과 시대와 편견으로부터. 아니, 무엇보다 환경과 자신 사이에서 갈등을 겪던 자기자신으로부터. 그녀는 일생동안 늘 떠났다.


병 때문에 떠난 첫 여행

이사벨라 루시 버드(Isabella Lucy Bird)는 1831년 영국 요크셔에서 성공회 목사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몸이 약했으며 원인 불명의 두통, 불면증, 등의 통증과 신경쇠약에 평생 시달렸다. 지금이야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 억압으로 인한 심리적 요인으로 인해 발병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지만 당시에 그녀의 병은 원인도 몰랐으며 치료법도 없었다. 18세에는 척추수술까지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의사는 그 당시 치료법의 일종이었던 ‘공기를 바꿀 것’, 즉 요양 여행을 제안했다. 1854년, 당시 23세이던 이사벨라는 아버지께 받은 100파운드를 들고 혼자 미국으로 첫 여행을 떠났다. 가족의 이해와 그녀의 의지가 합쳐진 결과였다.

그녀의 건강에 도움이 된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었다. 가족의 이러한 태도가 훗날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사회적 규범들에 얽매이지 않고 평생 여행을 다닐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그것은 또한 그녀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정신적 육체적으로 움직이게 된 열쇠였다. 물론 자신을 관철하는 힘, 자기 의식, 무조건적 의지와 같은 몇 가지 확고한 성격상의 특징들이 있기에 그녀는 영원한 환자로 머물지 않은 것이다. 상황에 굴복했다면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인생은 기껏해야 부차적 역할, 즉 엄격한 신앙심을 가진 영국 중류 가정의 병약하고 자비심 많은 주부의 역할에 머무르고 말았을 것이다.-『길들일 수 없는 자유』 (pp.72~73)

보호자 없이 150센티미터도 안 되는 키 작은 미혼 여성이 혼자 여행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지병까지 있지 않았는가. 그러나 신기하게도 여행하는 동안, 이사벨라는 전혀 아프지 않았다. 그녀는 미국 서부의 거친 사람들에게, 자유로운 삶에 마음을 빼앗겼다. 뉴욕에서 영국행 배를 타는 순간, 자신이 이제 예전처럼 살 수 없으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이사벨라는 집에 돌아오자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돌아온 이사벨라는 여행기를 출간했다. 그녀의 첫 책 『미국에 간 영국 여인 (The Englishwoman in America, 1856)』 은 반응이 좋았다. 자신감을 얻어 병을 핑계로 다시 미국 여행을 계획했다. 그러던 중 1858년, 이사벨라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팔 년 후,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죄책감에 빠진 이사벨라는 차마 여행을 꿈꿀 수 없었다. 여동생 헨리에타와 함께 불우한 이웃을 돌보며 지냈지만 불안과 불면, 등과 허리의 통증이 끊이지 않았다. 그녀는 행복하지 않은 것이었다. 베개에서 머리를 들 수 없을 정도로 통증에 시달리다 마침내 이사벨라는 다시 여행에 나서게 된다. 1872년, 오스트레일리아로 향하는 배의 갑판에 섰을 때, 그녀는 마흔 살이 넘은 나이였다.


더 이상 예전처럼 살 수 없어 여행을 떠나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를 여행하는 동안, 이사벨라의 병세는 여전했다. 그러나 하와이(당시 샌드위치 섬)에 도착하여 아름다운 자연과 야성의 삶과 대면하자, 그녀는 급격히 몸이 좋아졌다. 이사벨라는 하와이 원주민 여성들이 당당하게 남자처럼 다리를 벌리고 말을 타는 모습에 감격했다. 영국에서는 여자들이 말을 탈 때도 스커트를 입고 숙녀용 안장에서 한쪽으로 다리를 모아 타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여자가 남자처럼 말을 타는 것은 음란하고 부도덕한 행위였다. 이사벨라는 이 승마자세가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의 활동에 제약을 가하려는 의도임을 알아차리고, 과감히 자세를 바꾸었다. 그녀는 남자처럼 말을 타고 높이 4000미터의 활화산 분화구까지 올라갔다. 이사벨라는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했다. 더불어 40년 간 그녀를 괴롭힌 만성 통증에서도 자유로워졌다. 후에 이 하와이 여행 경험을 다룬 책이 출간되었다. 1875년, 그녀의 두 번째 책이었다.


승마복을 입은 이사벨라 버드를 그린 삽화 [출처: 위키피디아]

이사벨라는 한껏 들떠서 하와이의 즐거움을 적은 편지를 여동생 헨리에타에게 보냈다. 헨리에타는 자신도 하와이에 가겠다고 답장했다. 깜짝 놀란 이사벨라는 여동생을 말리는 편지를 보내고 황급히 하와이를 떠났다. 자신의 분신처럼 여동생을 사랑하지만, 이사벨라는 결코 여동생과 같이 여행하기를 원치 않았다. 하와이를 떠난 이사벨라는 미국 콜로라도 주의 로키 산맥으로 갔다. 이번에도 그녀는 말을 타고 거침없이 달렸다. 외부와 단절된 농장에서 겨울을 보내는 동안 이사벨라는 그 지역의 악명 높은 무법자인 짐 누전트와 사랑에 빠졌다. 겨울도 사랑도 둘 다 혹독하고 힘들었지만, 그녀는 잘 견뎌 냈다. 여행을 마친 후 이사벨라는 『로키 산맥 속 어느 숙녀의 삶 (A Lady's Life in the Rocky Mountains, 1879)』 을 출간했다. 자신의 평판을 망가뜨릴 무법자 짐과의 사랑이야기는 빼고 낸 책이었다. 그녀는 여행지에서는 과감하고 자유로운 여행가였지만, 영국에 돌아와서는 빅토리아 시대 목사의 딸로서 처신했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이후 이사벨라의 여행 경비를 책임졌다.

영국으로 돌아간 후 이사벨라는 여동생과 함께 있었다. 여동생의 주치의인 존 비숍이 그녀에게 여러 번 청혼을 했다. 이사벨라는 자신은 결혼할 여자가 아니라고 거절하고 다음 여행을 계획했다. 그녀는 비숍에게 호감은 있었지만, 결혼해서 남편과 같이 여행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전에 하와이에 여동생이 온다는 편지를 받고 서둘러 하와이를 떠나버린 적이 있듯, 그녀는 천성적으로 혼자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1878년, 그녀는 여동생 헨리에타와 비숍의 배웅을 받으며 일본으로 떠났다. 마흔 일곱이었다.

“나는 두려움이나 불운을 웃어넘길 수 있다. 여행가라면 반드시 자신의 경험에 대한 값을 치러야 한다. 여행에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대부분 그 사람의 개인적 특성에 달려 있다.”
그녀는 여행이 힘들 것이라는 얘기를 이미 들어 알고 있었고, 불편함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 『이사벨라 버드』 (p.186)


일본에 도착한 그녀는 편한 개항장 주변이나 대도시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이전 여행과 달리 영어가 통하지 않는 곳에 온 그녀는 이토라는 통역 겸 안내인을 고용하고 홋카이도로 가서 아이누 원주민 마을에 머물렀다. 자연과 풍물에 대한 다소 과장된 감탄은 여전했지만, 이번 여행부터 그녀는 인류학자처럼 자세히 관찰하고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 일본 여행과 돌아오는 길에 들린 말레이시아의 경험을 담아 『일본 미답의 길 (Unbeaten Tracks in Japan, 1880)』『황금 반도(The Golden Chersonese, 1883)』 라는 두 권의 여행기가 탄생했다.


연이은 불행과 죄책감을 딛고 다시 떠나다

지쳐 귀국한 지 얼마 후 여동생 헨리에타가 티푸스로 사망했다. 이사벨라는 나 자신이 죽은 것 같다며 너무도 고통스러워했다. 여행에 대한 열정조차 잃어버렸다. 비록 여동생과 떨어져서 혼자 여행다니곤 했지만, 이사벨라의 여행기는 헨리에타가 없었으면 출간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이사벨라는 여행 도중에 느낀 생생한 감상을 바로바로 적어 동생에게 편지로 보냈다. 고국에 돌아와서는 글을 다듬어 책으로 냈다. 헨리에타가 없으니, 혼자 남겨진 여동생을 위해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저절로 재치있고 생동감있게 썼던 여행기는 이제 더이상 쓸 수가 없었다. 실제로 연구자들은 여동생 사망 이후의 그녀의 여행기는 개성을 잃고 객관적 관찰 위주의 기록이 되었다고 평한다. 이사벨라, 그녀는 변했다. 부모의 사망 때처럼 그녀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동생이 생전에 하던 지역 봉사 일을 대신 해보려고도 했지만, 성녀로 불리던 동생과 비교되곤 했다. 그리고 그 일은 중요한 일이지만, 이사벨라가 잘 하는 분야의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좌절했다.


이사벨라의 결혼식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존 비숍이 다시 그녀에게 청혼했다. 존은 이사벨라보다 10세 연하지만 신중한 성격이었다. 이사벨라는 존이 그녀의 인간적 허점을 보완해 주고 외로운 자신을 돌봐주리라 기대하며 청혼을 수락했다. 하지만 신부인 그녀는 상복을 입고 결혼식을 올리겠노라고 우겼다. 여동생 헨리에타에 대한 그리움과 죄의식 때문이었다. 결국 이사벨라는 살아있는 신랑보다 죽은 동생을 위해 상복을 입고 결혼식을 올렸다. 이 일은, 그녀에게 또다른 죄책감을 안겨 주게 되었다. 5년 후 1886년, 결혼기념일을 며칠 앞두고 존 비숍이 세상을 떠나 그들의 결혼기념일이 장례식 날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이사벨라는 존의 죽음이 전부 자기탓인 것만 같았다. 괴로웠다.

이제 홀로 남겨진 이사벨라는 자책감과 자기 연민, 지병과 외롭게 싸워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꺾이지 않았다. 이사벨라는 부모, 여동생, 남편에 대한 죄책감을 덜기위해 그들의 이름으로 아시아 지역에 자선 병원을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의료 선교 여행을 하기위해 60세가 다 되어가는 나이에 의학을 새로 배웠다. 자신이 잘 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자신을 자신답게 살게 해 주는지를 이사벨라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평생 그랬다. 그녀에게 나이는 자신의 한계가 아니었다.


그녀의 절정기는 60대 이후부터였다

1889년 2월, 이사벨라는 인도에 도착하였지만 이미 너무도 영국적이었던 인도에 흥미를 잃었다. 그녀는 티베트 고원을 넘어 라다크 왕국을 방문했다. 페르시아를 거쳐 돌아오는 길은 너무도 위험했다. 할 수 없이 그녀는 영국군 소령인 허버트 소여 일행과 동행하여 바그다드에서 테헤란까지 여행했다. 터키, 페르시아와 쿠르디스탄을 거치는 춥고 힘든 여정동안 이사벨라는 쉬지도 못하고 구급약을 나눠주고 현지인들을 치료했다.

영국에 돌아온 이사벨라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이제 그녀는 여행가가 아니라 존경받는 학자였다. 1892년, 그녀는 영국 왕립 지리학협회(Royal Geographic Society)에 최초의 여성회원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사벨라는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했기에, 담담히 다음 여행을 계획했을 뿐이었다. 이번에는 사진을 배웠다. 곧 지난 여행을 담은 두 권의 여행기가 나왔다. 『페르시아와 쿠르디스탄 여행 (Journeys in Persia and Kurdistan, 1891)』『티베트 사람들 사이에서 (Among the Tibetans, 1894)』 였다.

1894년부터 3년에 걸쳐 이사벨라는 한국, 일본, 중국을 여행했다. 이 여행의 기록은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Korea and Her Neighbours, 1898)』 로 출간되었는데 현재 우리나라 고교 교과서에 그 일부가 수록되어 있다. 그녀는 이 책에서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 을미사변기의 정세와 19세기 말 조선의 풍습을 세세히 기록했다. 특히 다른 외국인 남성들은 기록하지 않던 조선 여성들의 생활과 의식주 노동현장을 여성의 시각으로 생생하게 기록하여 민속학적 가치가 높다. 게다가 사진과 이를 토대로 직접 그린 동판화 삽화를 통해 당시 풍경을 현재의 우리에게 전달해 주기도 한다. 출간 당시 영국에서도 그 가치를 높이 인정받았다는데, 90년 뒤인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낸 선물이 바로 이 책의 1898년도 판이라고 한다.

남편들이 계속 흰 옷을 고집하는 한 빨래는 한국 여인들의 신산한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이런 냄새 나는 하천에서, 궁궐 후원의 우물에서, 전국 방방곡곡의 모든 물웅덩이에서, 아니 주택 밖 실오라기만한 개울이라도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한국의 여인들은 빨래를 하고 있다. (중략) 한국의 여인들은 빨래의 노예다.-『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p.60)

이사벨라는 더욱 과감하게 중국 내륙으로 여행했다. 반외세 운동이 벌어지던 청나라 말 시기였다. 그녀는 총을 들고 폭도들과 대치하는 위험도 무릅쓰는 한편, 부모, 여동생과 남편의 이름으로 중국에 병원을 세우는 일도 잊지 않았다. 1897년 영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양자강을 가로질러 중국을 보다(The Yangtze Valley and Beyond, 1899)』 를 출간했다. 이후의 중국 사진집과 모로코 여행 노트를 제외하면, 이 책은 여행기로는 그녀의 마지막 책이었다. 너무도 몸이 허약해진 이사벨라는 일흔이 넘은 나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중국으로 갈 여행 계획을 세우던 중, 그녀 인생의 마지막 여행,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여행을 떠났다. 1904년, 73세였다.


평생 자신과 갈등하며 여행한 사람

이사벨라의 일생을 살펴보면, 참 독특한 점이 보인다. 그녀는 일관된 성격을 지닌 타고난 여행가는 아니었다. 그녀는 모국어가 통하는 지역만 여행하기를 거부하는 모험가이면서 한편 무법자 짐과의 사랑을 지레 포기하고, 그 사랑이 사람들에게 알려질까 걱정하는 소심한 면이 있었다. 모험과 거친 세계, 야성의 남자에게 끌리면서도 목사 딸로서 내면화된 도덕 규범을 스스로 준수했던 것이다. 이사벨라는 여행지에서는 남자처럼 다리를 벌리고 말을 타며 자유를 만끽했지만 영국에 돌아와서는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워 다시 다소곳이 다리를 옆으로 하고 말을 탔다. 바지를 입고 말을 탔다는 신문보도에 모욕감을 느끼고 거세게 항의하기도 했다. 또 그녀는 가족을 사랑하면서도 혼자 독립적으로 여행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 자신의 이기심과 여행에 대한 욕망 때문에 죄의식을 느끼기도 했다. 자신의 욕구를 가난한 이웃에 대한 봉사로 전환시키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힘들어했다. 그녀는 자유로운 여행가였지만, 인습에 얽매인 빅토리아 시대 여성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동시대 다른 여행자들에 비해 그녀가 쓴 여행기에는 서구권 외 지역에 대한 편견이나 제국주의적 시선이 적은 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책에는 종교나 인종 편견 없이 호의적으로 서술했지만 개인적인 자리, 특히 종교 집회에서는 자신의 편견을 담은 과격한 발언을 종종 했다. 페르시아 여행 당시, 소여 소령의 보호 아래 여행을 계속하면서 그의 조수 노릇을 하고 여행 명분을 빌려주어 ‘그레이트 게임(당시 중앙 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벌어지던 영국과 러시아 간의 첩보전)’ 중이던 소여 소령의 비밀 임무를 도운 셈이 되었지만 별 문제의식을 느끼지는 못했다. 아시아 지역을 여행하면서도 조국과 영일동맹을 맺은 일본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그녀 역시 대영제국의 여행가란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페르시아 여행 중 텐트 앞에 선 이사벨라 버드. (오른쪽 키 작은 여성) [출처: 위키피디아]

그녀는 이렇게 평생 모순적인 존재였다. 중요한 것은, 이사벨라는 그런 자신과 평생 갈등하느라 심신의 병에 시달리면서도 늘 떠났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었기에. 비록 20대의 첫 여행 때 자신의 재능을 발견한 후 즉시 떠나지 못하고 오래 갈등하다가 40이 넘어 다시 떠났지만, 이후 그녀는 평생 꾸준히 여행을 떠났다. 그녀 인생의 주요 업적으로 여겨지는 여행은 다 60세 이후에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 그녀는 혼자 여행하는 나이 많은 여성이라고, 외국인은 물론 같은 서구인 남성들에게도 무시당한 적이 많았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여행을 계속했다. 그게 이사벨라, 그녀였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페이스가 있다

그러니, 이사벨라 버드, 이 언니를 보라. 이렇게 평생 자기 자신과 환경과 시대와 갈등하느라 뒤늦게 자신의 길을 찾는 사람도 있다. 이룩해 놓은 업적 결과만 보면 아무리 대단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들여다보면 이렇게 모순 덩어리일 수도 있다. 그래도 이 언니를 보라, 이렇게 그녀처럼 자기 자신과 싸워가며 계속 가다 보면 어느덧 자신의 등 뒤에 길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가. 중요한 것은 늦게라도 자신이 잘하는 것을 알아내어 오래 하는 것, 그리고 모든 제약과 차별에 일찍 지쳐 지레 포기하지 않는 것!

세상의 일부 사람들은 나이 든 여자는 가치 없다고 말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각자에게는 각자의 페이스가 따로 있는 법, 나이와 상관없이 나를 찾아, 내 길을 찾아 갈 때 나 역시 이사벨라 언니처럼 60년 후 지구 반대편의 천재 시인에게까지 영감을 주는 매력적인 존재가 될지도 모르는 것을!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1989년도 초판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나는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4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왕립지리학협회 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김수영, 『거대한 뿌리』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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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미실, 이 언니의 사랑과 욕망을 보라.
-레이디 고다이버, 이 언니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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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신영

한글을 뗀 이후로 책 읽고 글 끄적거린 것 외에는 한 일이 없다. 《소년중앙》과 계몽사 세계 명작 동화 전집, 삼중당 문고와 창비 시선, 문학과 지성사 시선을 통해 세상을 배웠다. 숙명여대 국문과 입학 후 대하 역사소설을 쓰겠다는 커다란 꿈을 품고 사학을 부전공했다. 그러나 신춘문예에 몇 번 떨어진 이후 그동안의 과대망상과 능력 부족을 깨닫고 겸허하게 독자로 돌아가기로 결심, 한동안 조용히 책 읽고 밥벌이를 하며 살았다. 그렇게 혼자 놀다 보니 너무 심심해서 블로그()에 ‘껌정드레스’라는 닉네임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 무작정 읽고 쓰다 보면 언젠가는 되겠지’라는 게으른 배짱으로 역사를 공부하며 독서 기록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기록들이 모여 어느새 한 권의 책이 되었다. 그 책이 2013년 1월 출간한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이다.지금까지 문학, 역사, 인간이라는 세 개의 열쇠로 세상을 여는 역사 에세이를 쓰는 데 주력해 왔다. 앞으로도 익숙한 이야기들에 낯선 질문을 던지는 즐거운 탐험을 계속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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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끝자락에서 발견한 생의 의미

서른둘 젊은 호스피스 간호사의 에세이. 환자들의 마지막 여정을 함께하며 겪고 느낀 경험을 전한다. 죽음을 앞둔 이들과 나눈 이야기는 지금 이순간 우리가 간직하고 살아야 할 마음은 무엇일지 되묻게 한다. 기꺼이 놓아주는 것의 의미, 사랑을 통해 생의 마지막을 돕는 진정한 치유의 기록을 담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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