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창정이라 다행이다 <창수>

사람답게 살고 싶었던 남자의 슬픈 목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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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아픔도 있었고, 더불어 불혹의 나이에 접어 든 임창정은 더욱 깊어졌다. 인생 그 자체는 하찮지만 진한 우정과 의리, 순애보가 살아있는 ‘창수’라는 캐릭터는 오직 임창정에게만 꼭 맞는 맞춤의상처럼 생생하게 살아난다. 가장 무거운 순간에도 웃길 수 있고, 가장 우스운 장면 속에서 울컥 마음을 흔들면서 이야기의 완급과 감정을 연기로 조절해 낸다.

임창정의 <창수>, <창수>의 임창정

정말 그런 영화가 있다. 배우 때문에 엉성한 이야기도 채워지고, 이상한 논리도 설득이 되고, 개연성 없는 이야기까지도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다고 믿게 되는, 그런 영화가 있다. 여러 장면이 아쉽지만, 되짚어 보면 배우의 그 절절한 연기와 슬픈 눈빛만 아련하게 떠오르는 그런 영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그 배우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싶은 그런 영화가 있다. 이덕희 감독의 <창수>도 어떤 점에서는 배우에게 큰 빚을 진 영화이다. 주인공 임창정이 아니었다면, 그냥 무난하게 볼 수 있는 정도의 이야기가 그를 만나 더 아프고, 가슴 절절한 멜로가 되었다. 한마디로 임창정이 신파의 벼락에 선 영화가 추락하지 않게 단단하게 양팔로 버티고 섰단 이야기다.



동인천 뒷골목의 삼류 건달 창수(임창정)는 제대로 된 건달도 못되고 다른 사람들의 징역을 대신 살아주는 징역살이 대행업을 하며 연명하듯 살아간다. 폭력조직 지성파 보스의 애인이지만, 지성파 보스가 감옥에 간 사이 지성파의 2인자인 도석(안내상)과도 내연관계를 이어가던 미연(손은서)은 도석과의 관계를 정리하려 한다. 창수는 길거리에서 도석에게 맞고 있는 미연을 구하다 첫눈에 반하게 되고, 미연과 함께 평범하고 착한 삶을 살아가길 꿈꾼다. 하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보스의 출소를 앞둔 도석은 미연과의 관계가 알려질 것이 두려워 미연을 죽이고 그 죄를 모두 창수에게 뒤집어씌운다.


<파이란>

이야기의 전개는 도식적일 만큼 예측 가능한 수순으로 이어지고, 파국을 향해 전개되는 이야기와 인물 구조도 이미 너무 많이 봐 온 이야기다. 이쯤 듣다 보면 영화를 보지 않았어도 딱 떠오르는 영화가 있는데, 바로 송해성 감독의 2001년 작품 <파이란>이다. 문제는 <파이란>의 속편 혹은 리메이크라 불러도 크게 다를 바 없을 만큼 인물구성, 이야기, 그리고 전개 방식이 무척 비슷하다는 점이다. 이유는 <창수>의 이덕희 감독이 <파이란>의 조연출이었다는데서 찾을 수 있을 텐데, 이덕희 감독은 <창수><파이란>의 유사성을 애써 감추려 하지 않고, <파이란> 속 최민식과 <창수>의 임창정을 오버랩 시킨다. 누구도 그 진심에 반할만한 열연을 펼친다는 점에서 두 배우는 캐릭터만큼이나 꽤 닮았다.


영화 <창수>의 포스터. 가득 채운 임창정의 얼굴 이외에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고 배우와 제목으로만 승부를 건다. <창수>의 승부수는 그 어떤 것도 아닌 ‘임창정’이기에 이 포스터는 꽤 정직하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창수>는 관객들을 뭉클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다. 순애보에 가까운 창수의 사랑은 복고적 감수성 속에 반짝 빛난다. 억지로 눈물을 짜내는 신파에서도 아슬아슬하게나마 벗어나 있다. 하지만 <창수>를 지탱하고 버티고, 그리고 감동하게 만드는 모든 지점에 감독의 연출보다는 배우의 연기가 앞서 있다는 점은 아쉽다. 임창정에게는 단순한 유쾌함을 넘어서는 페이소스를 만들어 내는 힘이 있다. 그래서 이미 너무 많이 보아온 것 같은 ‘순수 삼류 건달’의 캐릭터 자체는 신선하지 않지만, 임창정은 만나는 순간 창수라는 캐릭터는 독보적인 매력으로 빛난다. 특히나 영화 초반에 까불대고 가벼운 양아치의 모습에서, 도석과의 대치 국면에서부터 어둡고 음습한 느와르로 변하게 되는데 임창정이라는 배우가 얼마나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연기하는지를 한 번에 확인할 수 있다.

개인적인 아픔도 있었고, 더불어 불혹의 나이에 접어 든 임창정은 더욱 깊어졌다. 인생 그 자체는 하찮지만 진한 우정과 의리, 순애보가 살아있는 ‘창수’라는 캐릭터는 오직 임창정에게만 꼭 맞는 맞춤의상처럼 생생하게 살아난다. 가장 무거운 순간에도 웃길 수 있고, 가장 우스운 장면 속에서 울컥 마음을 흔들면서 이야기의 완급과 감정을 연기로 조절해 낸다. 창수라는 한 남자의 인생은 너무나 가련하고, 그 사랑은 눈물겹지만 <창수>는 안타깝게도 임창정이라는 배우 이외에 다른 흔적을 남기진 못했다. 하지만 임창정 덕분에 영화 참 좋다는 생각대신 영화가 전달하고 싶어 하는 그 아련하고 속 깊은 복고적 정서는 오롯이 남길 수 있었다.


진심과 순정의 아이콘, 임창정


<비트>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1997년 당시 임창정은 뛰어난 가창력으로 인정받는 발라드 가수였다. 물론 가수 이전에 그는 <남부군>, <게임의 법칙> 등에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연기자로 먼저 데뷔했었지만, 대중들은 가수 임창정을 먼저 알아봤다. 그런 그가 연기자로 주목받은 것은 1997년 정우성, 고소영 주연의 청춘 영화 <비트>에서였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건축학개론>의 납뜩이 조정석 같은 역할이었다. 무게 잡는 주인공들 사이에서 너무 찌질하지만 사랑스럽고 그래서 측은한 조연 환규였다. <비트>에서 가장 웃긴 순간과 가장 울컥하는 순간은 임창정을 통해 빛났다. 그리고 딱 1년 뒤 1998년 <비트>의 고소영과 함께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의 주인공이 되었다. 잘 나가는 스타를 사랑한 야구심판이라는 멜로 판타지에서 판타지를 생생하고 믿을만하게 끌고 가는 건 임창정이라는 배우가 보여주는 캐릭터의 순정, 그 진심에 있었다. <행복한 장의사>, <해적, 디스코 왕 되다> 이후 2002년에는 섹시 코미디의 열풍을 몰고 온 <색즉시공>에서 하지원과 함께 한다. 임창정은 단순한 섹스 코미디일 수도 있었던 <색즉시공>을 어느 순간 가슴 아픈 순애보로 확 바꿔놓는다. 그가 연기하면 주인공이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온 마음과 정성을 다 해 사랑하고 있다고 믿게 만들기 때문이다.


<1번가의 기적>


<공모자들>

<위대한 유산>, <1번가의 기적>, <만남의 광장> 등 코미디 영화에서 임창정은 인간미 물씬 풍기는 조금 모자란 캐릭터로 등장하는데, 2006년 <1번가의 기적>은 산뜻한 웃음과 함께 울컥하는 진심어린 감동까지 전달한다. 이 영화에는 임창정이라는 배우에게 기대하는 연기의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고 봐도 된다. 이후 임창정은 쉬지 않고 활발히 활동을 하긴 했지만, 기억에 남는 작품을 남기진 못했다. 2010년 할머니들의 은행털이 <육혈포강도단>에서도 인간미 넘치는 건달을 맡았지만 조연이었고, <청담보살>, <불량남녀><사랑이 무서워>에서의 임창정의 캐릭터는 어떤 점에서 동어반복이었다. 그런 점에서 2012년 <공모자들>은 배우 임창정을 다르게 발견한 영화였다. 웃음기를 지워낸 임창정의 낯선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그는 삶의 고단함과 그 무게를 표정과 몸으로 고스란히 녹여낸다. 장기매매라는 무거운 주제 속, 임창정은 하류 인생을 사는 악당이지만, 매표원(조윤희)를 향한 순애보를 절절하게 표현해 낸다.


2013년 개봉한 <창수>는 개봉 순서상으로는 <공모자들> 이후지만, 촬영 순서로 보면 <창수><공모자들> 보다 앞서 크랭크업 되었다고 한다. 코믹함과 애련함이 공존하는 <창수>에 이어 ‘코믹함’을 완전히 걷어낸 <공모자들>이 그의 가장 최근의 연기라 할 수 있다. 거칠지만 그 맘속에 순수한 사랑과 동료애를 품어내는 조금 모자란 캐릭터로 각인된 자신을 향한 기대와 요구라는 감옥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노력은 그의 연기로 빛난다. 임창정에게 ‘천의 얼굴’이라는 수식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돌이켜 보면 캐릭터와 연기 패턴, 성격, 유사한 감동이라는 공통분모가 꽤 크게 그려진다. 하지만 정작 관객들이 보지 못한 것은 임창정이라는 배우, 자신의 얼굴인지도 모른다. 캐릭터에서 벗어나 삶 그 자체가 지루하고 힘겹고 버거워 보이는 인간 임창정의 모습을 발견했다면 너무 억측일까? 배우의 진심은 어쩌면 웃음 뒤에 가려져 있는 법이라…….


[관련 기사]

-임창정의 느와르 도전작 <창수>
-임창정, <창수>에서 징역살이 대행업자로 변신
-명품발라더의 귀환 - 임창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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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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