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 놀이터

베트남 ‘호 아저씨’ 호찌민의 일생

‘베트남 국민의 가슴에 독립과 자유만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호찌민(호치민)은 베트남의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이며 정치인이다. 원래 이름은 응우옌신꿍이다. 호찌민이라는 이름은 깨우치는 자라는 뜻을 지녔다. 호치민은 가명과 필명이 160여 개가 넘는다. 호찌민은 베트남 독립 운동의 주요 인물로 베트남 공산당, 베트남 독립연맹 등을 창건하였다. 1945년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선포하고 총리와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베트남 여행 도시 중 하나인 호찌민에 가면 거리 곳곳에서 호찌민의 동상이나 벽화 등을 볼 수 있다. 오늘은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국민적인 영웅이자 ‘호 아저씨’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호찌민이 사망한 날(1969년 9월 2일)이다.

호찌민(호치민)은 베트남의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이며 정치인이다. 원래 이름은 응우옌신꿍이다. 호찌민이라는 이름은 깨우치는 자라는 뜻을 지녔다. 호치민은 가명과 필명이 160여 개가 넘는다. 호찌민은 베트남 독립 운동의 주요 인물로 베트남 공산당, 베트남 독립연맹 등을 창건하였다. 1945년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선포하고 총리와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

1946년경에 찍은 호찌민 사진 (출처: 위키백과)

호찌민은 1920년대 초 사이공에서 프랑스 선적의 배에 선원으로 취직하여 미국을 거쳐 프랑스로 가 유학하던 중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30년에는 중국에서 베트남 공산당(현 베트남 노동당의 전신)을 창건하여 이끌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베트남으로 돌아가 항일 독립 전쟁을 하였다. 전쟁이 종결된 1945년 9월 2일 프랑스의 괴뢰로 전락한 응우옌 왕조의 황제 바오다이를 폐위시키고 독립을 선언하였다. 1946년, 프랑스와 독립 협상을 추진하였으나 프랑스가 협상 전에 베트남 남부에 임시 정부를 설치한 뒤 이를 코친차이나 공화국으로 발전시키자 이에 반발, 협상을 결렬시킨 뒤 반프랑스 전쟁을 감행하였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최종 승리하여 프랑스군을 몰아냈다. 그러나 미국, 소련 등이 가담하면서 베트남 전쟁이 벌어지면서 북베트남의 최고 지휘관으로서 전쟁을 지속하였다. 호찌민은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9년 9월 2일 베트남의 통일을 보지 못한 채 심장질환으로 사망하였다. 호찌민은 가장 영향력 있는 20세기 피식민지 국가의 정치지도자의 한 사람이자 저명한 사회주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베트남어뿐만 아니라 영어, 중국어의 여러 방언과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으며 타이어, 스페인어, 독일어, 러시아어에도 능했다.


호찌민의 일생

호찌민은 프랑스가 식민 지배를 하던 시기인 1890년 5월 19일 베트남 북중부 지방의 응에안 성 호앙쭈(Hoang Tru)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밑에서 한자와 유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가난한 집안형편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어려서부터 많은 책을 읽는 습관을 들인 탓에 정식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는데도 역사와 고전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였다. 베트남인 관리를 양성하는 프랑스-베트남학교에 입학했지만, 반프랑스 민족주의적 사상을 가졌다고 하여 퇴학당하였다. 성인이 되어서는 프랑스와 영국, 미국 등을 돌며 요리사와 하인, 견습공, 정원사, 청소부, 노동자, 웨이터, 댄서, 사진 수정자, 요리집의 화부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였다. 밑바닥 인생을 전전했지만 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정치적 시야와 사회 부조리에 대한 비판 의식은 갈수록 성장하였다. 1917년 파리로 갔고 그 해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은 그의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19년에는 프랑스 사회당에 입당하여 정치활동에 나선다. 1919년 1월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파리 강화회의에 베트남의 독립을 청원하였으나 거절당했다. 파리 체류 시절 그는 응우옌 아이꾸옥(阮愛國)이라는 가명을 썼다. 이때 쓴 아이꾸옥이라는 이름은 후일 그의 호가 되었다. 그는 그곳에 사는 베트남인들을 조직화했고, 청결함과 신뢰를 쌓을 것, 집 주변 청소 정리 등을 하고 질서의식을 가질 것을 호소하였다. 1920년 호찌민은 마르크스주의를 배워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고, 재프랑스 베트남인 애국자단을 조직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1919년 호찌민은 파리 강화 회의가 열리고 있는 베르사유 사무국에 애국단을 대표해 출석하였다. 그는 "베트남인과 프랑스인을 법적으로 동등하게 대우할 것, 프랑스 의회에 베트남 대표가 참석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할 것" 등 8개 항으로 이루어진 《베트남 인민의 요구서》라는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대표단이 그랬던 것처럼 이 요구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호찌민은 회담장 복도에서 쫓겨났다. 이때, 그는 제국주의자들은 절대 스스로 식민지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얻고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소련에 호의를 가지게 되었다.

1921년 프랑스 공산당의 지원으로 프랑스 식민지 인민연맹을 결성하고, 인민연맹의 기관지 《르 파리아(Le Paria)》를 편집ㆍ발행의 책임을 맡았다. 《르 파리아》에서 그는 프랑스, 독일, 영국의 식민지 정책의 부당성과 프랑스의 베트남인 차별의 해악을 고발하였다. 호치민은 프랑스에서 노동자 계층의 많은 지도자들과 사귀었는데, 수년간 프랑스에서 반제국주의, 반식민지 투쟁활동을 벌이고나서 1923년말 모스크바로 갔다. 1923년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서 아시아 담당 상임위원에 선출되었다. 1924년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 출석, 동아시아 담당 상임위원이 되었고, 1925년까지 코민테른의 학교에서 공산주의 혁명사상을 익혔다.

1924년 1월 블라디미르 레닌이 병으로 죽은 뒤 그는 러시아의 공산당 기관지인 <프라우다 Pravda>지에 레닌에 대한 고별사를 실어서 주목받았다. 1924년 제5차 공산당 인터내셔널 대회에 적극 참여하여 프랑스 공산당이 식민주의 정책을 좀더 맹렬히 반대하지 않는다며 비판했다. 1924년 중국 광둥 성 광저우(廣州)로 가서는 베트남 혁명청년협회를 조직하고 사회주의적 민족운동가들에 대한 교육을 시작했다. 이 협회의 회원들은 프랑스 식민통치에 대한 반감을 가진 인사들과 식민지하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은 인사들, 정치적 신념 때문에 인도차이나에서 추방되었던 청년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광저우를 중심으로 인도차이나 민족주의의 근거지를 마련했다. 그는 다시 소련으로 되돌아갔고 코민테른의 학교에서 사회주의 혁명 사상에 대한 공부를 계속했다.

1925년 다시 광저우로 돌아와 혁명청년협회의 일을 맡았다. 그러나 1926년부터 중국 국민당 군대의 사령관이었던 장제스(蔣介石)가 1927년 4월 광저우에서 중국 공산주의자들을 추방하자 호치민은 다시 소련으로 피신하였다. 1928년 브뤼셀과 파리를 거쳐 타이의 사이암으로 갔다. 사이암에서 체류하며 그는 태국의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활동, 이때는 소련에서 그를 동남아시아 공산당 인터내셔널 대표로 임명하여 2년 동안 이 직함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추종자들은 중국 남부에 남아서 활동을 전개했고 그 근거지를 윈난성 쪽으로 서서히 이동해갔다.

1928년 베트남 혁명청년협회의 단원들은 1929년 5월 홍콩에 모여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그는 하노이나 휴, 사이공 같은 베트남의 대도시에 청년 운동가들을 파견, 적극적인 조직활동을 펴기 시작했으나 호치민의 부관들 가운데 몇 사람은 지도자의 부재 속에 소극적으로 임했다. 이때 호치민은 모스크바로부터 전폭적인 신임을 받고 있었으나, 자금의 부족과 중국 국민당, 일본군, 프랑스 총독부 행정기관 등의 단속과 방해로 활동은 순조롭지 않았다.

혁명가로서 자질을 배운 그는 코민테른으로부터 지령을 받고 중국 남부 및 타이로 파견되었으며 베트남의 주변에서 혁명운동을 계속하였다. 중화민국에서 《제1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어 북벌이 시작되면서, 그도 광둥 성으로 가서, 《베트남 청년혁명동지회》를 창립했다. 1930년 1월 호치민은 사이암에서 베트남으로 돌아온 후 공산당 창당을 주관했다.

1930년 2월 3일에 영국령 홍콩에서 그때까지 조직되었던 3개의 공산주의 조직의 대표를 모아 하나로 묶어 《베트남 공산당》을 창립했다. 처음에는 베트남 공산당이라고 이름을 붙였으나 지나치게 소시민적이고 민족주의적이라는 스탈린의 충고를 받아들여 당 이름을 1930년 10월 인도차이나 공산당(PCI)으로 고쳤다. 그가 스탈린의 조언을 받아들인 것은 베트남 공산당이라는 이전 이름에 내포된 소시민계급 민족주의의 인상을 피하기 위해서였으며, 국제적으로 더 폭넓게 인정받는 계기가 된다.

PCI는 베트남의 폭력적인 반란운동과 동시에 발족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탄압은 잔인했다. 공산당 인사들에 대한 무차별 사살과 고문 등의 행위를 가했고, 무력 충돌과 인력 손실이 계속되었다. 홍콩 체류 중 그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로부터 폭력 혁명분자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해 말 코민테른에 의하여 권한을 부여받고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 개칭하였다. 중국 서남부에서 베트남 혁명청년동지회를 결성하였고 중국 서남부와 베트남 북부지역까지 근거지와 연락소를 두었다. 《청년》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면서 조직을 홍보, 프랑스 식민통치 하에서 가난에 찌든 젊은이들이 동조하면서 이들을 포섭, 점점 당의 세력을 강화해 나갔다.

중국 서남부의 본부에서 훈련받은 베트남인들을 인도차이나 지하조직으로 파견하였다. 1931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검거 탄압을 피해 홍콩으로 피신하였다. 1931년 6월 6일 홍콩 체류 중 영국 경찰에게 체포되었다가 1933년 그곳 프랑스 경찰이 도망범 인도에 대한 승인을 영국 정부로부터 받자 친구들의 도움으로 그곳을 빠져나와 상하이(上海)로 도망쳤다. 1933년 여름 오랫동안 은신해 있다가 그해 가을 열차편으로 소련의 모스크바로 갔다.

193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7차 공산당 인터내셔널 대회에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수석대표로 참석했다. 이 대회에서는 1930년대 초부터 호치민이 오랫동안 주장했던 프랑스 인민전선(Popular Front, 파시즘에 대항하는 비공산당 좌파와의 동맹)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는 인도차이나 공산당원들에게 민족 해방을 위해서는 비공산당 좌파, 개량주의자들과도 연대해야 하고 온건 성향의 우파들까지도 끌어들여야 된다고 주장했다. 그가 직접 키우고 훈련시킨 당원들로부터도 의심과 오해를 샀으나 결국 1936년 인도차이나의 공산당원들은 호찌민의 설득과 권고를 받아들여 자신들의 반식민주의 입장과 강경 투쟁론에서 한발 물러나 비공산당 좌파는 물론 온건 우파를 포함한 ‘반파시즘 식민주의자들’과의 협력을 고려했다.

1936년 프랑스 총리인 레옹 블룸(Leon Blum)의 프랑스 인민전선 정부는 인도차이나 반도에 있는 좌파 세력들이 좀더 자유롭고 적극적인 활동을 벌일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그러나 호치민은 1930년에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법정에서 받은 사형선고 때문에 베트남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계속 망명생활을 하였다. 1937년 중순에 귀환을 계획했으나 1937년 블룸의 인민전선 정부가 무너지자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인도차이나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이 되살아났다. 1938년에 이르러 인민전선은 완전히 해체되었고 악조건에서 싸우게 되었다. 1938년 호치민은 중국으로 돌아가 화북 지방으로 가, 옌안(延安)에서 마오쩌둥(毛澤東) 등과 2개월 정도 같이 생활하였다.

1939년 프랑스와 독일이 전쟁 중일 때, 프랑스의 패배를 예상, 호치민과 그의 부하인 보 구엔 지아프, 팜 반 동은 이 절호의 기회를 이용해 자신들의 이상을 진척시킬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고 프랑스가 독일에 패하였다. 1940년부터 중국 윈난성 쿤밍에서 중국 공산당 조직과 함께 활동하며 본국을 향해 홍보, 선전 전술을 활용하였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기 때문에, 프랑스의 식민지인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독일 정부와 손잡은 일본 정부는 남방진출의 일환으로 1940년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북부에, 1941년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남부에 진주했다. 친독일 비시 정권과의 좋은 관계 유지를 위해 그는 기존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부와 공동 통치 체제를 폈다.

호찌민 우체국 내부 모습

호찌민은 1941년 1월 3인조ㆍ5인조 동지들을 국경을 넘어 베트남으로 파견하여 지하 조직을 구성하고, 각 지역의 청년 당원들을 모집하게 하고, 한편 지식인들을 포섭하게 하였다. 호찌민은 홍콩, 모스크바, 옌안(중화민국), 윈난 성 등에서 활동하고 있었지만 인도차이나 정세의 급변으로 1941년 2월, 윈난 성에서 국경을 넘어 조국 베트남의 까오방 성으로 들어왔다. 그는 여기서,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중심으로 베트남 독립을 위한 통일전선 조직인 《베트남 독립동맹》을 조직하고, 즉시 일본군에 대한 무장투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어 민족해방을 위한 독립 총봉기를 목표로 단원을 모집하고 세력을 키웠다. 그는 이때부터 응우옌 아이 꾸옥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호치민이라는 필명을 정식 이름을 사용하였다. 베트민이 결성되면서 베트남 고유의 민족주의가 다시 강조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와 영국, 일본 등 제국주의 세력과의 전쟁을 위해 부득이 무장세력을 많이 보유한 중국 장제스 정부의 도움과 지원을 받아야 했다. 2차 대전 후반 하와이 진주만 공습을 보고 일본의 패배를 예상한 그는 사회주의 성향을 철저히 숨기고, 중국과 미국에 전략적으로 접근하여 지원을 받아낸다. 1942년 중국 국민당의 간부를 만나기 위해 중국 쓰촨 성 충칭을 방문하였다가 프랑스와 일본의 스파이로 오인되어 중국 국민당 특무대에 의해 체포, 감금되었다.

장제스는 공산주의자인 호찌민을 믿지 않았고 그는 18개월간 구금당한다. 수감 시절 그는 매일 일기를 쓰는 한편, 《옥중 서신 (Notebook from Prison)》이라는 책을 집필했는데, 이것은 전통적인 한문 단편 시들의 모음집으로 우울한 단상, 금욕적인 사고, 혁명을 주창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문에도 능했던 그는 혁명활동의 차질을 받았으나 침착하게 대응, 중국 국민당 측을 설득했다. 그는 동료들이 중국 남부의 최고 사령관인 장 파쿠에이와의 타협을 통해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에 반대하고 장 파쿠에이의 권익을 지지하겠다는 조건에 동의해 그의 석방을 이끌어냈다. 장 파쿠에이는 장제스를 설득했고 그는 1943년 9월에 석방되었다.

이때 그는 베트민이 단순히 프랑스나 일본과 싸우는 독립운동 단체가 아니라 임시 과도정부이며 지지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프랑스와 영국,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한편 민주주의에 입각한 정부 수립을 약속, 그의 설득이 통하여 그는 중국과 미국을 상대로 월맹이 임시과도정부임을 승인받았다. 미국의 극동군 사령부에서는 특별히 낙하산 부대까지 투입하여 월맹의 활동을 지원하였는데 이는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프랑스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호치민은 미국이 프랑스, 스페인과 갈등하고 있다는 상황을 잘 이용하였고 미국의 지원으로 독립 전쟁을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되었다.

1944년말 그는 미국 군대와 접촉하여 일본에 대항하는 미국의 첩보기관 미 전략사무국와도 협력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의 베트남 독립동맹의 게릴라들이 중국 남부 산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 그러나 1945년 프랑스 측에서 미국측과 교섭, 그가 공산주의자임을 들어 후원 중단을 요청하자 미국은 베트민의 지원을 중단한다.

1945년 1월부터 호찌민은 특별 기습부대를 지휘하며 서서히 베트남과 중국의 국경지대를 넘어 1945년 봄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 비밀리에 잠입하였다. 군사적으로 일본에 비해 열세인 편이었기 때문에 1942년, 중국 국민당군의 지원을 요구하려고 중화민국에 들어갔다. 하지만 공산당의 세력 확대를 싫어하는 국민당의 지방 군벌 정권에 의해 체포되어 13개월간 각지 감옥을 전전하다가 석방되어 1944년말에 간신히 근거지로 돌아갔다. 그러나 일본군이 인도차이나를 점령하면서 모든 프랑스 관리들을 투옥하거나 처형했다. 그는 다시 기회를 찾기 위해 노력하며 전황과 동태를 수시로 파악하였다.

1945년 8월초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호치민은 자신을 의장으로 하는 민족해방위원회가 결성하고 일본, 프랑스에 대한 전쟁을 선언하고 궐기하였다. 1945년 8월 10일 일본의 패전으로 태평양전쟁이 끝나자 민족해방위원회는 지상으로 올라와 총봉기하였다. 하노이, 훼에서 연일 시위가 일어났으며 월맹은 베트남 중부와 북부 지역을 빠르게 장악하였다. 일본군이 항복한 1945년 8월 13일 호찌민은 전국민에 총봉기를 호소했다. 4일 후 8월 17일에는 비엣민 주도하에 전국적인 민중봉기(베트남 8월 혁명)가 일어나 비엣민 군이 하노이에 입성했다. 그리고 일본 정부가 항복문서에 조인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그 해 9월 2일, 호찌민은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베트남의 중부와 남부에는 여전히 프랑스의 세력이 강했다. 1945년 9월 2일 호치민은 바오다이 황제의 폐위와 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하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선포하였으며, 바로 호치민은 정부의 국가 주석으로 취임하였다. 연합군의 협정조항 중에는 중국의 장졔스의 중국 국민당 군대가 일본군을 대신하여 16?선 북쪽을 장악하고, 남부는 프랑스가 혼란을 수습할 때까지 당분간 맡는 조항이 있었다. 그는 이에 반발하였지만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식하자 고민하기 시작했다. 샤를 드골 장군이 집권한 프랑스는 베트남의 독립을 순순히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베트남의 지배권을 다시 주장하였다. 10월 6일 드골은 자크 르클레르 장군을 사이공에 급히 파견, 중무장한 프랑스군 기갑사단이 코친차이나 지역에 도착했다.

호치민은 남베트남을 장악했으나 프랑스 기갑사단의 출현으로 퇴각했다. 호치민은 프랑스 군대를 이용, 북쪽에 있는 중국 군대를 퇴각시키게 하고 나서 독립의 승인, 르 클레르 군대의 철수, 베트남의 재통일을 보증할 프랑스와의 협약을 맺는 데 주력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부 사회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협상을 강행, 1945년 10월 말부터 대표단을 보내 프랑스와의 협상을 시작했다.

프랑스 정부가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정식 정부로 인정하지 않고 군을 증파하자 호찌민은 프랑스 정부와 끈질긴 교섭을 통해 1946년 3월 하노이 협정을 성립시켜며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받게 되었다. 본 협정 조인을 위해 프랑스로 간 그는 프랑스 정부가 코친차이나를 분리하고 그곳에 친프랑스적인 정권을 수립시킨 사실을 알고 타결 직전에 교섭을 결렬시켰다. 1946년 3월 대치 상태가 다소 풀리자 호치민 편에서는 프랑스군에 제시한 요구에 대해 보다 폭넓은 지지기반을 얻으려는 생각에서 베트남 독립동맹 이외의 당들도 새로운 정부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와 동시에 프랑스 쪽에서는 중국 군대의 철수를 얻어내기 위해 외교사절단을 중국에 보냈다.

중국 국민당군이 베트남 북부에서 철수하자 르클레르 군대 일부도 북쪽 하이퐁에서 물러났다. 호치민은 3월 6일 중국 군대의 철수가 확정된 뒤 프랑스군과의 협정에 조인했다. 협정조항에 따르면 베트남은 ‘자치정부ㆍ군대ㆍ재원을 가진 자유국’으로 인정되었으나, 계속해서 파리 시에 있는 프랑스 정부가 주도적인 역할을 행사하는 프랑스 연방에 통합되어 있었다.

르클레르는 프랑스 군대를 이끌고 하노이로 들어갔고 군대는 제한구역에서만 활동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서히 퇴각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러나 베트남과 프랑스의 극단주의자들과 베트남의 민족주의자들은 그 협정에 대해 불만스럽게 생각했고, 호찌민이 식민통치를 연장하려 한다 또는 사적인 욕심으로 음모를 꾸민다는 등의 비방이 계속되었다. 1946년 6월부터 9월의 프랑스 정부에서 주재한 2차 협정에 참석하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갔고 파리에서 프랑스 정부와 2차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우연히 하이퐁에서 발생한 우발적인 사고로 결렬되었다. 그해 11월 하이퐁에서 프랑스 군대와 베트남 군대 사이에 충돌이 있은 후 프랑스 순양함은 하이퐁에 포격을 가했다. 거의 8천 명의 베트남인이 포격으로 죽는 바람에 우호적인 화해에 대한 기대도 무너졌다.

희생 현장에 대한 보고를 받은 후 하이퐁을 방문한 호찌민은 분개했다. 이 무렵부터 심장질환 등으로 고생하던 그는 병든 몸에 환멸을 느끼면서 좀더 호전적으로 보복하자고 나서는 추종자들의 요구를 즉각 수용한다. 12월 19일 그는 전쟁을 선언했고 이로써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되었다. 1946년 12월 퐁텐블로 회의가 결렬되자 프랑스에 대한 항전(抗戰)을 직접 지휘하였으며, 코친차이나 공화국과 그 후신인 베트남국이 프랑스의 괴뢰 정권임을 강조, 양심적인 지식인들의 협력, 협조를 요청하였다.

프랑스군은 하이퐁에서 베트남 민주공화군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므로, 12월 19일 호찌민은 《전국민에 항전을 호소한다!》라는 담화문을 발표하고 철저한 항전에 돌입하였다. 이것이 7년간에 걸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시작이다. 베트남군은 평야에서 철수하여 북부 산악 지대에 틀어박여 저항을 계속하였고 보응우옌잡이 인솔하는 게릴라 부대는 장비가 우수한 프랑스군을 압도하였다. 그는 북베트남의 산악 지대에서 은신하면서 전쟁을 지휘하였다. 1947년 중반 북베트남의 어느 야산에 피신해 있던 호치민은 다시 파리와 접촉, 일시적으로 휴전하였으나 파리에서 제시한 조건은 황실의 복원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의 코친차이나 공화국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했고, 그 후신인 베트남국을 지원했다.

1948년 프랑스 정부는 1945년 8월에 혁명을 지지하여 사임했던 전 응우옌 왕조 안남 제국의 황제 바오다이를 다시 안남의 황제에 앉혀주겠다고 제안했다. 프랑스가 바오다이의 복위를 조건으로 낸 것은 베트남의 전통 지배계층을 지지하여 월맹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황제와 귀족들의 복귀와 신분제 사회는 있을 수 없다며 호찌민은 반발했고, 그는 3차 협상은 전면 백지화했다. 이어 지압의 지휘를 받는 베트민 군대에 유격 게릴라 전쟁을 명령, 게릴라 전법과 테러 행위를 동원해 프랑스군과 바오다이의 군대를 봉쇄하거나 기습작전으로 승리하였다.

1953년말 베트남의 중부와 북부 지방 대부분은 베트민에게 장악되었고 좀더 큰 도시들도 사실상 포위상태에 있었다. 또한 베트남 남부에도 베트민이 심어둔 첩자들이 암약하면서 프랑스의 정책을 방해, 교란했다.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기습공격으로 승리, 프랑스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그 결과 제네바 협정이 체결되고 프랑스군이 철수함으로써 베트남은 80년에 걸친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소련과 중공의 내정 간섭과 프랑스, 미국의 막후 개입으로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는 못했다.

결국 제네바 회담에서 베트남은 17도 선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분할되었다. 그는 이에 반발하였으나 소련과 중공이 개입한 것을 알게 되면서 침묵하였다. 이후 그는 ‘우리는 폭격 위험 아래서는 절대로 협상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결사 항전의 뜻을 밝혔다. 1954년 5월 말부터 7월 21일까지 8개국 대표들이 베트남 독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베트남 대표들과 함께 제네바에 모였다. 이때 베트남 대표는 2개 대표단이 파견되었는데 호찌민 지지자들로 구성된 팜반동의 북베트남의 대표단과 바오다이와 그 지지자들로 구성된 남베트남의 대표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남베트남은 이미 1945년부터 프랑스의 지원으로 코친차이나 공화국이 수립된 이래 프랑스와 미국의 영향력하에 사실상의 정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54년 5월부터 2개월간의 회의 끝에 8개국 대표들은 베트남이 따르기로 되어 있는 1가지 협정을 체결하고서 회의를 끝냈다. 협정에서 1956년에 실시하기로 예정된 선거 전까지는 베트남을 17?선의 경계로 나누었다가 선거 후에는 베트남인들이 통일된 정부를 세우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팜반동 등은 즉시 독립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한 바오다이의 지지자들도 공산 정부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함으로써 통일 정부에 대한 결론을 보지 못한다.

또한 이 조약에서는 1946년 프랑스와의 협정에 조인했던 호치민이 이 조약을 받아들이고 프랑스나 미국, 일본 등 어느 나라에 대해서든 저항을 중단해야 된다는 조건부가 달렸다. 그러나 협상 막판에 베트남 총선거에 대해 바오다이의 지지자들과 미국, 프랑스는 부정적이었고, 결국 미국과 남베트남의 선거기한 연기 주장이 관철되면서 그의 뜻은 관철되지 못한다. 그는 베트남 공산당 내부의 트로츠키 주의자들에 대한 숙청을 감행하였고,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친일파, 친프랑스파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과 항일, 항프랑스 전쟁에 가담했던 민족주의자들에 대해서도 공개비판을 가한 뒤 무자비한 숙청과 처형을 지시했다.

호찌민과 그의 동료들이 장악한 북베트남은 남쪽의 광대한 농업지역과는 단절된 지역이었고, 수산업 외에는 자원이나 유산이 빈약하였다. 경제 건설을 목적으로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자 호찌민은 중국과 소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소련에서도 소극적이었고, 중국에서도 다소 소극적이었다. 불리한 상황에서 호치민은 더욱 탄압적이고 철저히 전체주의적인 통치를 계속해 나가게 되었다.

1955년부터 1956년 농지 개혁을 통해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면서 다시 탄압과 숙청이 계속되었다. 북베트남인들에게 ‘호 아저씨’로 알려진 것처럼 이미지 홍보 효과와 독립운동을 통해서 인심을 얻은 호치민은 마음만 먹으면 대단한 인기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제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그는 부득이 지주와 부르주아 민족주의자, 구 왕당파까지 숙청하는 등의 공포정치를 감행한다.

그는 소련과의 관계가 긴밀했지만 아시아 혁명 당시 중국이 맡았던 초기 역할을 잊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아시아에서 중공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소련과의 관계를 더 돈독히 하는 한편, 소련과의 관계를 활용하는 일에 몰두하였으며, 베트남인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였다. 강대한 공산주의 두 동맹국 사이에서 능숙하게 균형을 유지하면서 1955년 모스크바와 베이징을 방문하는 한편 1958년에는 중립국이던 인도의 뉴델리와 자카르타를 방문하여 외교 관계를 형성하였다. 중국과 소련과의 갈등이 계속되자 호치민은 1960년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소련과 중국 사이의 중재를 하기도 했다. 또한 한쪽 편을 들지 않고 중, 소 양쪽을 중재하는 한편 양쪽 모두를 지지한다고 하는 등 협상을 시도하였다. 또한 주변의 인도, 캄보디아 등과의 외교에도 각별히 신경 썼다. 결국 그는 두 공산주의 강대국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고, 그결과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을 때 그는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전폭적인 원조를 받았다.

1959년 북베트남에서 다시 전쟁에 개입했고 남베트남에서도 고 딘 디엠 정권에 대한 게릴라(베트콩)들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미 프랑스가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에서 철수했지만, 당시 프랑스와 일본에 이어 베트남에 진출할 계획을 가지고 있던 미국은 제네바 협정에 서명하는 대신 남부 베트남에 친미적인 정권인 베트남 공화국을 수립하고 적극적인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시작했다.

그러나 베트남 공화국 정부가 제네바 협정에 따라 정해진 통일 선거를 보이콧하면서 반대파에 가혹한 탄압을 가하자, 남베트남 정부에 대한 독재 정치에 대한 저항이 확산되어 1960년 《남베트남 해방민족전선》이 결성되었다. 해방전선은 베트남 노동당의 지원 아래 부패한 남베트남 정부와 격렬한 싸움을 시작했다. 남베트남의 정치적 불안정과 계속되는 해방전선의 투쟁에 베트남이 공산화가 될 것을 우려한 미국은 1964년 8월 2일에 발생한 통킹 만 사건을 구실로, 1965년 2월 7일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개시하며 베트남 전쟁을 시작했다.

전쟁 기간을 통틀어 미군은 베트남 민주 공화국군에 비해 우세한 화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당시 남베트남 정부의 독재와 부패로 베트남 공화국의 정치적 지지도가 추락하면서 베트남 민주 공화국과 남베트남 해방민족전선이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을 바탕으로 해방민족전선은 주요 도시와 간선도로를 제외한 농촌 지대를 거의 완전하게 그 세력하에 두어 베트남 공화국군과 베트남에 주둔해 있는 미군에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여기에 소련과 중국의 군사적 지원, 특히 케싼 전투와 1968년 구정 공세를 계기로 사실상 미군이 전쟁에서 주도권을 잃었다. 1969년 제37대 대통령에 취임한 리처드 닉슨은 베트남에서의 철수를 모색하기 시작하면서 베트남 민주공화국과 본격적으로 협상하기 시작했다.

1966년 7월 17일, 호찌민이 발표한 성명서 가운데 ‘베트남 국민의 가슴에 독립과 자유만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라는 구절은 북베트남인들의 통일전쟁에 대한 의지를 버리지 않는 구호가 되었다. 미군이 베트남과 협상을 시작하면서 전쟁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즈음인 1969년 9월 2일, 24번째 독립선언 기념일을 앞두고 호찌민은 갑작스런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79세가 되던 해였다.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고, 재를 3등분하여 도자기 상자에 담아 북부, 중부, 남부에 뿌려 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으나, 그의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 거대한 묘에 전시되었다. 베트남 국민은 7일간을 전국민 애도 기간을 정하고 그를 추모했다.

그가 죽을 당시 유산으로는 옷 몇 벌과 낡은 구두가 전부였다. 그가 죽은 지 6년 후인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1976년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이 성립되었고 남베트남의 수도였던 사이공은 호찌민 시로 개칭되었다. (출처: 위키백과, 예스24)



호찌민 관련 추천 도서


호치민 평전

윌리엄 J.듀이커 저/정영목 역 | 푸른숲

저자는 호치민이 베트남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비상하는 과정, 쉰 번이나 이름을 바꿔가며 혁명을 배우고 주석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극심하게 분열되곤 하던 동료들을 화해시키고 그들에게 영감을 불어넣던 모습을 놀라울 정도로 세밀하게 그려낸다. 호치민은 헌신적인 공산주의자이자 민족 독립을 열망한 민족주의자였으며, 국제정치의 복잡성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행동할 줄 아는 냉철한 현실주의자였다. 듀이커는 그가 전쟁을 피하기 위해 머스크바, 베이징, 워싱턴과 끈질기게 협상함과 동시에 이들 강대국의 반목을 교뵤하게 이용하던 과정을 밀도높게 재구성하고 있다.





호찌민과 시클로

이지상 저 | 북하우스

여행가 이지상의 베트남 여행기. 일반적인 여행 가이드북에서는 만나지 못하는 역사와 인간에 대한 저자의 통찰이 담겨있다. 여행자의 시선으로 베트남전의 상처와 우리와의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되새기는 기회를 제공하며, 방 안에서 '자기만의 여행'을 떠나고자 하는 독자에게 조금 더 유용할 책. '식민지와 독립전쟁 속에서 발생했던 아픔과 고통, 통일 후 발생했던 남북 베트남의 갈등, 보트 피플의 울분, 통일 공산 정권 하에서의 가난과 빈곤, 그리고 돈에 오염되어가는 현실, 그러나 다시 도약하려는 의지... 이 베트남 여행기에는 그런 것들이 많이 담겨 있다.' 고 저자는 말한다.





왜 호찌민인가?

송필경 저 | 에녹스

혁명가 호찌민이 대한민국 치과의사에게 전하는 메세지는 무엇일까? 베트남은 우리와 지구상에서 역사와 문화의 배경이 가장 많이 닮은 나라이다. 그러나 분단에서 민족 통일에 일는 과정을 사뭇 다르다. 완벽한 민족 통일을 이룬 베트남과 달리, 우리난 아직가지 같은 핏줄끼리 총부리를 겨누고 증오심을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고 있다. 이를 극복하려면 무엇보다 우리와 같은 질곡을 겪으면서도 민족 통일을 쟁취한 베트남의 투쟁 역사를 존중하고 소중한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 저자는 진정한 화해는 진실을 명확히 알지 못하고는 이룰 수 없으며, 진실은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모르고는 깨달을 수 없다고 믿는다. 베트남과 우리가 겪은 희열과 비애는, 이제는 지식이 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호찌민과 베트남 전쟁

김태완 글/주경훈 그림/손영운 기획 | 주니어김영사

중?고등학교 사회탐구영역 교과서에 나오는 세계 역사의 핵심사건을 뽑아 하나의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루는 「제대로 된 세계대역사」 시리즈 제33권 『호찌민과 베트남 전쟁』입니다. 20세기 최강대국인 미국이 패한 유일한 전쟁인 베트남 전쟁과 그 중심에 존재한 호찌민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의 마음속에 ‘국부’로 자리 잡고 있는 호찌민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이유와 베트남 사람들이 여전히 그를 따르는 이유 등을 그리고 있습니다.






호찌민 이야기

조영권 글/장호 그림 | 웅진주니어(웅진닷컴)

20세기 폭력과 전쟁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서 우리나라와 똑같이 희생되었던 베트남이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이루어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호찌민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망한 지 40년이 다 된 지금까지도 ‘호 아저씨’라는 친근한 이름으로 불리며 베트남의 모든 남녀노소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 호찌민의 삶 속에서 우리는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진심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또한 소박하고 검소한 그의 생활은 어린 독자들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 존경받는 지도자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그를 통해 살펴보자.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박노자 저 | 한겨레출판

승려는 왕에게 절해야 하는가? 국적포기자들은 매국노인가? 《독립신문》은 과연 민족지였는가? 화랑들이 동성애를 즐겼다는 것이 사실일까? 헤이그 밀사 이준은 항일전사인가? 세종대왕은 성군인가?……. '우리 시대의 반항아' 박노자가 동아시아의 근대역사 뒤집어보기를 시도했다.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는 우리 안에 아로새겨진 잘못된 역사인식을 바로 잡고, 근대화의 과정에서 기성 권력들이 편의상 역사의 뒤안길에 묻어버린 반란자들을 끄집어내어 바로 세운다. 그 과정에서 지금 되살려야 할 보배로운 휴머니즘의 계보를 추적하고, 21세기에 동아시아인으로서 추구해야 할 반란자적 모습과, 반란자로 살아가는 데 방해가 되는 국적, 애국심, 민족주의, 권위주의, 숭미(崇美)주의, 남성우월주의 등 버려야 할 악습들을 추궁한다.



[ebook] 호찌민의 옥중일기

호찌민 저/안경환 역 | 지만지

≪옥중일기≫는 베트남의 영웅 호찌민 주석이 비참하고도 혹독한 수감 생활을 하면서 시의 형태로 일기를 쓴 것이다. ≪옥중일기≫는 진실을 시로 이야기하고, 시로 기록했으며, 한자로 쓰였지만 내용과 스타일에 있어서는 베트남의 민족성이 농후하게 반영된 문학작품인 동시에 전 베트남 사람들에게 도덕적이고도 수준 높은 교육적 영향을 끼치고 있는 걸작이다. 시의 미적인 가치는 바로 호찌민 주석의 숭고한 인격과 아름다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린 파파야 향기

클래식라인(주)

1950년대 사이공, 부자집 하녀로 들어간 10살 시골소녀 무이는 그녀 또래의 말을 잃은 안주인의 보살핌으로 어렵지 않게 도시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주인아저씨의 무기력하고 나태한 태도로 집안은 서서히 기울어져간다. 10년후 무이는 젊은 피아니스트가 주인인 다른 가정으로 보내지고, 무이의 순수함에 끌린 그는 무이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서로는 격정적이지는 않지만 서서히 서로에게 이끌리게 된다. 신분이 다른 두사람이지만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주인은 무이에게 접근한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2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최경진

지구에 춤을 추러 온 화성인입니다. 여행과 영화 감상을 좋아하며, 책을 사보는 것도 좋아합니다. 잘 읽지는 못하고 쌓아만 둡니다.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춤을 추는 게 삶의 목표입니다.

ebook

<호찌민> 저/<안경환> 역11,200원(0% + 5%)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5,900원(40% + 1%)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오늘의 책

AI, 전혀 다른 세상의 시작일까

유발 하라리의 신작. 호모 사피엔스를 있게 한 원동력으로 '허구'를 꼽은 저자의 관점이 이번 책에서도 이어진다. 정보란 진실의 문제라기보다 연결과 관련 있다고 보는 그는 생성형 AI로 상징되는 새로운 정보 기술이 초래할 영향을 분석했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한국 문학의 지평을 더욱 넓혀 줄 이야기

등단 후 10년 이상 활동한 작가들이 1년간 발표한 단편소설 중 가장 독보적인 작품을 뽑아 선보이는 김승옥문학상. 2024년에는 조경란 작가의 「그들」을 포함한 총 일곱 편의 작품을 실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들과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한 권에 모두 담겨 있다.

주목받는 수익형 콘텐츠의 비밀

소셜 마케팅 전문가 게리 바이너척의 최신작. SNS 마케팅이 필수인 시대, 소셜 플랫폼의 진화와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콘텐츠 제작을 위한 6단계 마케팅 전략을 소개한다. 광고를 하지 않아도, 팔로워 수가 적어도 당신의 콘텐츠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다.

삶의 끝자락에서 발견한 생의 의미

서른둘 젊은 호스피스 간호사의 에세이. 환자들의 마지막 여정을 함께하며 겪고 느낀 경험을 전한다. 죽음을 앞둔 이들과 나눈 이야기는 지금 이순간 우리가 간직하고 살아야 할 마음은 무엇일지 되묻게 한다. 기꺼이 놓아주는 것의 의미, 사랑을 통해 생의 마지막을 돕는 진정한 치유의 기록을 담은 책.


PYCHYESWEB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