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 놀이터

봉준호의 <설국열차> 관객님, 많이 당황하셨어요?

기대의 오류에 관하여 소문난 잔치 드립 혹은 기대이상이니 기대이하니 하는 평가를 접고 그냥 <설국열차>라는 영화만 놓고 봤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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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작을 기다렸다가 후다닥 보는 편이 아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강렬한 블록버스터 자체에 흥미가 없는 편인데다, 초반의 과열된 분위기 속에 끼어드는 것도 내켜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작품의 흥행 성적이 천만이 넘어가는 순간 그 영화에 대한 관심은 급감해서 대부분 관람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이건 정말 영화의 대중성을 폄하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 취향의 만족도가 떨어진다는 의미에서이다. <설국열차>는 내게 개봉 첫날 보기에 부담스러운 영화였다. 이미 개봉관을 거의 독식하고, 대규모의 홍보전에 언론까지 가담해서 흥행은 초고속 열차만큼이나 가속도가 붙었기에 그 과열된 현상에서 관객 천만의 분위기를 이미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국열차>를 보고 난 후 느낌은 좀 달랐다.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 사이를 헤집고 나오면서도 솔직히 천만은 힘들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기사를 보니 지난 5일간 전국 누적 관객수는 330만 명.

* 이 기사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봉준호답지 않다는 것, 봉준호답다는 것


2000년 어느 날, 텅 빈 극장에서 <플란다스의 개>를 보았던 기억이 난다. 강아지 실종 사건을 둘러싼 서민 아파트 주민들의 소동을 그린 이 코미디는 사람들의 비루한 욕구를 코미디에 담아낸다. 솔직히는 지독한 농담 같은 영화라고 생각했다. 낄낄대고 웃다가, 대체 내가 왜 웃고 있는 거지, 반문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2003년 <살인의 추억>은 장르의 어떤 규칙과도 손을 잡지 않은 봉준호 스타일로 밀어붙인다. 형사와 살인범 사이의 두뇌 싸움도, 관객과의 미스터리한 줄다리기도 없다. 주먹구구라도 밖에 볼 수 없는 시골 형사의 무리한 수사와 일상의 풍경에는 쓸쓸함이 묻어나고, 영화는 연쇄살인사건이 아니라 80년대라는 시대를 들여다본다. 그래서 살인범을 잡지 못한 그들의 현실이 시대적 패배와 연결되어진 것처럼 보인다. 2006년 <괴물>은 괴물영화 장르 속에 불편한 할리우드식 영웅주의가 아닌, 한국적 가족애를 담아내는데, 도시 전체를 파괴해 버릴 만큼의 위용을 가지지 못한 자그마한(?) 괴물 캐릭터가 특이하고 측은해 보인다. 괴물의 탄생 원인이 된 미군 혹은 미국의 존재는 반미감정을 담은 정치적 함의라기보다는 현재 우리가 옴짝달싹할 수 없는 미국의 영향권 안에 놓여있다는 현실의 풍자 정도로 보였다. 2009년 <마더>는 좀 더 서늘하고 잔인한 시선으로 현실을 본다. 무능한 경찰과 공권력에 기댈 수 없는 엄마는 자신의 모자란 아들이 살인범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엄마의 모성은 치열하지만, 살인범을 찾아가는 과정이 치밀할 리 없다. 엄마는 잔인하면서도 무관심한 현실과 부딪힌다. 홀로 증거를 찾아가는 과정에 어미로서 감당해야 하는 짙은 고독의 정서가 묻어난다. 


살인의 추억 포스터.jpg

 영화 <살인의 추억> 포스터


지구상의 모든 생명이 멸종하고, 오직 1년에 지구 한 바퀴를 도는 기차에 탑승한 이들은 유일한 생존자들이다. 17년째 같은 궤도를 돌기만 하는 이 열차 속 인간들은 철저한 계급 구조 속에서 유지된다. 가장 하층 계급은 좁고 더러운 꼬리 칸에서 살아가고 있다. 인류의 멸망 속 ‘노아의 방주’를 탄 생존으로만 만족할 수 없는 이들은 커티스(크리스 에반스)의 주도로 폭동을 일으킨다. 칸칸을 켜켜이 가로막고 있는 두터운 물을 열기 위해 열차의 보안설계가 남궁민수(송강호)와 그의 딸 요나(고아성)과 함께 한다. 이들은 열차의 우두머리인 윌포드(에드 해리스)에게서 열차의 엔진을 탈취하기 위해서 칸칸을 이동하며 나아간다. 생존자들이 탑승한 열차는 이미 극명화된 세계와 계층의 축소판이다. 단, 열차 바깥은 얼어붙은 세계이기 때문에  오직 열차 안에서만 생존이 가능하다. 보통은 수직 구조인 계층 관계를 수평구조로 나열한 열차의 구조는 그 자체로 역설이며 흥미로운 점이라 하겠다. 커티스의 선동에 따라 앞 칸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발견되는 현실은 사실 지금 자신들이 처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류의 종말 앞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생존’은 그 자체로 이미 축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국열차 스틸컷.jpg

출처 : 설국열차 스틸컷


2000년, 2003년, 2006년, 2009년. 매 3년마다 찾아오던 규칙대로라면 1년이 늦긴 했지만 봉준호의 필모그래피만 쭉 훑어보면 봉준호 감독의 5번째 장편 영화 <설국열차>에 대한 관객과 평론가의 기대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봉준호답지 않다거나, 그래서 기대 이하라는 평가는 수긍하기 어렵다. 영화는 권력과 계층 구조에 대해 꼼꼼하고 알기 쉽게 나열하며 충분히 설명적이고 논리적이다. 그리고 이 무국적 혹은 다국적 영화의 정체성을 놓고 볼 때, 비평의 관점을 전작들과의 연계 고리에서 찾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설국열차> 속 수많은 인종들을 봉합하는 과정에서 그의 전작들에서 발견되는 한국이라는 지극히 국지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비틀린 사회상이 만들어내는 블랙 유머와 정서가 파고들 틈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밝힐 순 없지만 강한 속도감으로 밀어붙인 <설국열차>의 평가에 호불호가 갈리는 건, 예상하지 못했던 엔딩 장면 때문이기도 한데, 개인적으로는 ‘노아의 방주’가 ‘에덴동산’으로 변화하는 것처럼 보였다. 앞선 영화들에서 봉준호는 늘 영화의 시작보다 더 나빠진 세상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삶이 어떨지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설국열차>의 결말은 조금 더 낙관적이다. 미지의 세계로 한 걸음 더 나아가 두려움을 딛어야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수 있다는 메시지는 그 자체로 강렬한 힘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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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설국열차 스틸컷


<설국열차>의 유머코드가 봉준호 감독의 이전 영화와 다른 건 확실하다. 지극히 한국적 정서에서만 웃고 즐길 수 있는 디테일에서 벗어나, 세계적인 정서와 시스템이라는 조금 더 큰 그릇을 고민한다. 그리고 혁명과 그 실현이라는 전복적 이야기의 쾌감보다는 폐쇄된 공간에서 발현되는 정서의 흐름에 더 집중한다. 워낙 흔들림 없이 지속적으로 수준 이상의 영화를 만들어온 봉준호에 대한 기대가 너무 과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거대자본을 쏟아 부은 <설국열차>가 오롯이 작가주의 영화로 남아야한다는 건 지나친 족쇄이며, 그렇다고 철저한 오락영화로 만들어지길 바라는 것도 봉준호라는 이름 앞에서 선뜻 할 수 있는 제안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폭동과 계층이라는 가시적이고 정치적인 이슈가 만들어낼 수 있는 정서적 층위에도 불구하고 감동이 덜하다는 느낌은 분명하다. 국지적인 배경 속에 서민들의 정서를 켜켜이 쌓아 블랙 유머의 공감대를 형성한 봉준호 감독의 이전 영화들에 비해 정서적 감흥이 덜하다는 의미일 수 있겠다. 역으로 이미 틀에 짜인 정치, 사회적 시스템 혹은 맞서 싸워야 하는 거대권력 앞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늘 치열한 ‘사투’라는 씁쓸한 현실 인식의 측면에서 본다면 <설국열차>의 논조는 봉준호스럽기도 하다. <설국열차>를 보세요 라거나, 보지 마세요라거나 하는 결론대신 평론가와 관객평점에 의지하지 않고 <설국열차>를 보길 권해본다. 봉준호 감독의 열렬한 팬이 그의 모든 장편 연출작을 다 봤다 해도 이제 고작 다섯 편이다. 그러니 우리가 봉준호라는 감독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는가와 그 실망을 논하기 보다는 <설국열차>와는 또 다른 다음 작품은 무엇일지 기대해 보는 것이 조금 더 온전하다고 본다. 단, <설국열차>가 봉준호 감독의 필모그래피의 최상위 리스트에 오르지는 않으리란 건 어느 정도 확실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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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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