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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연극적 체험을 놓치는 건 아깝다 <나는 나의 아내다>

35명의 목소리로, 한 사람을 보여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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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35역이라니! 처음에는 이 묘기에 가까운 설정을 보고, 한 배우의 얼굴에서 얼마나 다양한 얼굴을 뽑아낼 수 있는지에 관한 실험인 건가, 기록적인 멀티맨 변신을 자랑하려는 건가 싶었다. 그렇게 기술적인 측면에 호기심을 가지고 관람했지만, 1인 35역이라는 설정은 외적인 것보다 내용적인 측면에서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공연이 시작되면, 객석의 조명이 꺼지기도 전에, 배우가 무대 위로 쭈뼛거리며 나타난다. 객석과 무대가 밀착된 소극장. 아직 서로 친해지지 않은 관객과 배우가 소리 없이 마주 보고 있는 이 상황은 얼마나 긴장되는 순간인가. 관객으로 앉아 있어도 그 공기가 굉장히 압박인데 배우에게는 오죽하랴. 순식간에 치솟는 긴장감을 뚫고, 검은색 원피스에 진주 목걸이까지 걸고 나온 지현준이 수줍게 손 인사를 건넨다. 그제야 객석에 웃음이 돌고, 긴장감은 베를린 장벽처럼 무너진다. 소극장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공기의 밀도다.

배우는 객석과 무대 사이에 놓여있던 긴장감의 벽이 무너진 걸 누구보다 영민하게 알아차릴 테다. 입을 열기 시작한 배우는 쉴 새 없이 대사를 쏟아낸다. 재봉틀의 역사에서부터, 박물관 소개를 하더니, 금세 그 박물관장인 샤로테를 취재하려는 기자 존이 되어 편지를 쓴다. 그리고 다시 샤로테가 되어 대답한다. “그러죠.” 배우 지현준은 이 연극<나는 나의 아내다>에서 1인 35역을 해낸다.




35명의 목소리로, 한 사람을 보여주다

1인 35역이라니! 처음에는 이 묘기에 가까운 설정을 보고, 한 배우의 얼굴에서 얼마나 다양한 얼굴을 뽑아낼 수 있는지에 관한 실험인 건가, 기록적인 멀티맨 변신을 자랑하려는 건가 싶었다. 그렇게 기술적인 측면에 호기심을 가지고 관람했지만, 1인 35역이라는 설정은 외적인 것보다 내용적인 측면에서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배우는 35명의 배역을 모두 1인칭으로 연기한다. 그리고 이 35명의 인물은 이 작품의 주인공 샤로테를, 샤로테의 인생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사람들이다. 35명 중에 어떤 사람은 그녀를 15살 때부터 여장을 하고 다닌 트렌스젠더 혹은 미스테리한 박물관장으로 기억하고, 어떤 이들은 그녀를 지고지순한 우정을 간직한 친구로 기억한다. 어떤 이들에게 샤로테를 아버지를 죽인 범죄자, 권력에 빌붙었던 소련의 스파이로 기억한다.

진실은 무엇일까? 그들 중 누가 그녀의 진실을 알까? 연출가는 우리에게 그녀와 관계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려주고 보여주며, 샤로테라는 사람을, 그녀의 삶을 상상하게 한다.

지현준은 구부정한 자세와 느릿느릿한 말투, 간간이 보이는 애교 섞인 동작으로 칠순 먹은 샤롯데 부인을 연기하는데, 수십 명의 캐릭터를 혼자 연기하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다. 배우의 단단한 내공이 무대 위에서 빛을 발한다. 단순히 목소리나 표정을 달리해 연기하는 척하기보다는, 그 사람마다 다른 걸음걸이, 독특한 습관을 내보이며, 무대 위에서 아주 다른 35명의 캐릭터를 만나는 경험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천연덕스럽게 연기하고, 변신하는 배우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극 중 샤로테는 동베를린에 태어나 나치 치하, 공산주의 정권, 독일의 통일 등 역사적 굴곡을 온몸으로 겪어낸 샤로테 폰 마르스도르프(Charlotte von Mahlsdorf)라는 실재 인물을 모델로 하고 있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시절 속에서 가구, 시계, 축음기 등의 물건을 수집했고, 지금은 그륀더자이트(Gruenderzeit)라는 사설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의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된 미국인 기자 존은 그녀를 취재해 그녀의 삶을 희곡으로 만들려고 한다. 헌데 “내가 나 자신의 아내”라고 말하는 그녀에 관해 알면 알게 될수록 커지는 의문들에 존은 혼란스러워진다.

90분에 달하는 이 모노드라마의 가장 큰 미덕은, 이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다는 점이다. 한 배우가 35개의 색다른 캐릭터로 변신하는 기예보다도, 한 사람의 인생을 이렇게 다층적으로 표현해내는 연출보다도, 이렇게 우아한 화법으로 이야기하면서도 지루함 없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데에 박수를 보낸다.

객석에서는 간간이 웃음이 터져나온다. 모노드라마가 훌륭하기는 (오히려) 쉬워도, 재미있기는 어려운 법인데 말이다. 대사도 연출도 근사했지만, 이 극이 관객들과 원활하게 소통했던 건, 결국 지현준의 1인 35역의 연기가 설득력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행여나 예술미 풍기는 우아한 포스터 때문에 지레 겁을 먹은 관객이 있을까 노파심에서 하는 얘기다.)

퓰리처상, 토니상, 드라마데스크, 오비상 최고 작품상 등을 휩쓸며 평단에 인정을 받았고 1년 동안 브로드웨이에서 장기 공연을 펼치며 관객에게도 사랑받았던 연극이다. 6월 29일까지 두산 아트센터 space111에서 공연한다.

50대 배우 남명렬과 30대 배우 지현준이 더블 캐스팅됐다. 더그 라이트 원작으로 올해 <칼집 속의 아버지>로 관객을 만났던 강량원 연출가가 만들었고, 감각적인 무대미술로 주목받고 있는 여신동 미술감독이 빚어낸 무대 역시 또 하나의 볼거리다. 당신이 공연이라는 장르를 좋아한다면, 이런 체험을 놓치기는 정말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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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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