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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와 돼지는 도살장에서 자신의 죽음을 알아차릴까?

고통 없이 죽인 고기는 먹어도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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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을 고통 없이 기르고 죽일 수만 있다면 그런 고기는 먹어도 되지 않을까? 고기 때문에 생기는 질병이야 먹는 사람이 감당할 몫이고, 윤리적인 문젯거리는 동물에게 고통을 주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기르고 도살할 때 고통을 주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 동물을 먹어도 되지 않을까?

동물을 죽일 때 완전히 기절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산 채로 피를 뽑고 껍질을 벗기는 일이 다반사라니 실로 끔찍한 일이다. 또한 공장식 농장의 밀식 사육 역시 동물들에게 평생 계속되는 지루함과 함께 각종 질병과 비정상적인 체형 등 온갖 괴로움을 준다는 점에서 도살 과정과 다를 바 없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겠다. 동물을 고통 없이 기르고 죽일 수만 있다면 그런 고기는 먹어도 되지 않을까? 고기 때문에 생기는 질병이야 먹는 사람이 감당할 몫이고, 윤리적인 문젯거리는 동물에게 고통을 주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기르고 도살할 때 고통을 주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 동물을 먹어도 되지 않을까? 맞는 말이다.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기르고 자비로운 방법으로 도살한, 그래서 고통을 받은 적이 없는 고기만 먹는다면 윤리적으로 문제될 게 없을 것이다. 이른바 ‘윤리적 육식’이다.



도살당할 동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태연히 도살이 시행될 정도로 도축장에는 윤리적 배려가 없다.

이런 윤리적 육식을 옹호한 이가 마이클 폴란이다. 그는 『잡식동물의 딜레마』에서 동물들이 행복하게 사는 농장을 방문한 경험을 들려준다. 그 농장에서 암탉들은 소 방목지로 몰려나와 만족스럽게 소똥과 풀을 쪼아 먹고, 돼지들은 옥수수를 찾아 두꺼운 퇴비층에 코를 파묻는다. 폴란의 말마따나 동물의 권리를 옹호하는 사람들로서는 그런 농장마저도 “죽을 운명의 피조물이 처형 일자를 기다리는 일종의 중간역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지 모른다. 홀로코스트가 벌어지는 ‘죽음의 수용소’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런 비유는 적절하지 않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죽음을 예지하고 그로 인해 불안을 느끼지만 동물들은 그런 예지 능력이나 불안감이 없기 때문이다. 또 그 사람들은 ‘부자연스럽게’ 살지만 그런 농장의 동물들은 ‘자연스럽게’ 산다.

그러나 고통 없이 기르고 죽인 고기를 먹는 데는 여전히 복잡한 문제가 따른다. 하나는 현실적인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이론적인 문제이다. 먼저 현실적인 문제를 이야기해보자. 현실적으로 가장 큰 문제는 인도적인 사육 과정과 도살 과정을 거친 고기를 찾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가축을 식구처럼 기르던 과거의 가족농은 거의 없어졌고, 우리가 사먹는 고기는 대부분 공장식 농장에서 나온 것들이다. 외식을 할 때 먹는 고기가 바로 그런 고기들이다. 공장에서 나온 고기가 값도 싸고 맛도 훨씬 좋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내가 먹는 이 고기가 어떻게 사육이 되고 도살이 되었는지 확인할 방법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고기를 요리한 요리사도, 고기를 사온 식당 주인도, 고기를 파는 정육점 주인도 모른다. 이처럼 확신이 서지 않을 때는 ‘의심의 이득’(『실천 윤리학』에서 저자 피터 싱어는 사냥터를 예로 들어 의심의 이득을 설명한다. 사냥을 할 때 덤불 뒤에 움직이는 물체가 있는데 사슴인지 다른 사냥꾼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쏴야 할까 말아야 할까? 혹시 사람일까 의심이 든다면 당연히 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원칙에 따라, 고통을 받고 자란 동물의 고기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실제로도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나라 케이블 방송 중에 낚시 채널이 있는 것처럼 외국의 케이블 방송에는 사냥 채널이 있다. 커다란 눈망울을 한 사슴이 사냥꾼의 총에 쓰러지는 장면을 보면 잔인하기도 하고 섬뜩하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낚싯줄에 걸려 버둥대는 물고기나 총에 맞아 괴로워하는 사슴이나 큰 차이가 없을 것 같은데, 동물 사냥은 특히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총에 맞아 죽는 동물이 공장에서 사육되어 죽는 동물보다 훨씬 행복하다는 것을 아는 데는 그리 많은 생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냥 당하는 동물은 태어나면서부터 들과 산에서 천성대로 살다가 죽는 그 순간에만 고통을 당하지만, 사육되는 동물은 열악한 환경에서 평생토록 괴롭게 지내다가 죽기 때문이다. 재수가 없으면 죽을 때도 멀쩡하게 의식이 남은 채로 껍질이 벗겨지거나 뜨거운 물에 튀겨져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고기를 먹기 위해 사냥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고기가 정 먹고 싶다면 시골에 가서 아직도 옛날식으로 소나 닭을 기르고 있는 사람을 찾으면 될 것이다. 돼지는 옛날에도 그리 자비롭게 기른 것 같지 않으니 제외하자. 아니면 소나 돼지나 닭을 자연 상태에서 최대한 편안하게 손수 기르면 될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곤란한 점이 있다. 자비롭게 도살할 도축장이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윤리적 소비를 실천하는 조합(생협)들에서 방목까지는 아니더라도 항생제 없이 기르는 유기농 고기를 시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조합들도 유기농 가축을 인도적으로 도축할 곳을 찾지 못해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닭 정도는 옛날 방식대로 모가지를 비틀어 직접 잡을 수 있지만, 소나 돼지는 그럴 수도 없다.

마이클 폴란은 자비로운 도축장, 그의 표현에 따르면 ‘깨끗한 살해’를 하는 도축장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도 직접 방문한 것은 아니고 남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동물 전문가로서 도축장의 경사로와 도살 장치를 직접 설계한 템플 그랜딘(보스턴 출신 미국의 동물학자이다. 비학대적인 가축시설의 설계자이며, 콜로라도 주립대학 준교수이다. 자폐증을 극복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이 전한 이야기이다. 홀로코스트를 당하는 사람들과 달리 동물들은 농장에서만큼은 자기들이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러나 소나 돼지처럼 지능이 있는 동물들은 도살장에 끌려 들어갈 때 자신의 죽음을 금세 알아차린다고 한다. 오죽하면 남이 시키는 일을 마지못해 할 때 ‘도살장에 끌려가듯’이란 표현을 쓰겠는가? 그래서 자비로운 도축장은 소들이 일렬로 도살장으로 따라 들어갈 때 앞 소의 엉덩이밖에 볼 수 없게 하고, 마지막 순간에 소가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발이 땅에서 떨어지게끔 설계되어 있다. 이때 소가 피 냄새를 맡거나 두려워하는 소리를 듣지 않을까 궁금해 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랜딘은 자신이 직접 관찰한 것을 증언한다.



템플 그랜딘의 제안에 따라 ‘자비롭게’ 지어진 도축장과 그 설계도.

“송아지가 자신이 도살되리라는 것을 미리 알 수 있을까요? 나도 그게 궁금했어요. 그래서 송아지들이 통로를 따라가 마침내 도살당하고 방혈 구역으로 옮겨지는 광경을 끝까지 지켜본 적이 있죠. 송아지들은 아무런 차이가 없었어요. 자신이 죽으리라는 걸 알았다면, 송아지들은 크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을 거예요.”

이렇게 도살장에 들어간 다음에는, 공기 압력으로 발사하는 총을 소머리의 정중앙에 발사하여 소를 죽인다. 이 과정에서 가끔 총이 제대로 맞지 않아 의식이 살아있는 소가 나오는데, 이것은 도살 인부에게 너무 많은 소를 처리하도록 시키지 말고, 또 옛날 제사장처럼 신성한 일을 수행한다는 직업의식을 갖게 하면 해결될 문제이다.

이제 이론적인 문제를 거론해 보자. 문제는 ‘가장자리 인간’ 즉 갓난아이와 중증장애인에게서 생긴다. 이들 가장자리 인간들은 인간보다는 오히려 동물에 가까운 특징을 갖고 있기에 인간과 동물의 차별성을 찾으려는 시도를 무산시킨다고 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고통 없이 기르고 죽인 동물의 고기는 먹어도 윤리적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갓난아이와 중증장애인도 고통 없이 기르고 죽여서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펄쩍 뛸 것이다. 그러나 지금우리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실험을 해보자는 것이다.

그냥 펄쩍 뛸 것이 아니라 왜 그러면 안 되는지 진지하게 근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와 같은 사람이니까 안 된다는 근거는 곤란하다. 합리적인 이성도, 미래에 대한 기대감도, 언어도 없다는 점에서 그들은 인간보다 동물에 가까우니까. 물론 갓난아이와 중증장애인도 동물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그들에게는 보호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동물도 어미나 동료가 있으니 뭐가 다르냐고 반문할 수 있는데, 확실히 중요한 차이가 있다. 갓난아이와 중증장애인을 먹기 위해서 기르고 죽인다면 아무리 고통을 주지 않는다 해도 그들의 보호자들이 기겁을 할 것이고 슬퍼할 것이다. 그러나 동물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침팬지와 같은 고등동물은 새끼나 어미가 없어지면 인간과 비슷한 상실감을 느끼겠지만, 우리가 고기로 먹는 동물들은 그런 감정을 못 느낀다. 소, 돼지도 자기가 보는 데서 새끼나 어미를 끌고 가면 슬피 울겠지만, 쥐도 새도 모르게 데려가면 그런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 물론 평상시에도 자기 새끼가 먹을거리로 길러진다는 의식이 없다.

그렇다면 보호자가 없는 고아 갓난아이와 중증장애인은 고통 없이 죽여도 되느냐고 물을 수 있다. 현실에서는 이런 질문을 할 사람도, 실천할 사람도 전혀 없겠지만, 이런 식의 생각은 철학자들이 즐겨 하는 사고실험이다. 보호자가 없는 갓난아이나 중증장애인은 슬퍼할 사람도 없으므로 고통 없이 키우고 죽여서 먹는다 해도 윤리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보는 사람은 아마도 철학자들뿐일 것이다. 그래도 여기에 대해 대답할 수 있다. 보호자가 없다 해도 주변 사람들이 놀라고 슬퍼할 것이다. 그리고 공포심도 느낄 것이다. 내가 중증장애인이 될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는 법이며, 가족이 모두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엊그제 태어난 내 아이가 고아가 될 가능성도 언제든지 있다. 그럴 때 누군가 나 또는 내 아이를 먹어치운다고 생각하면 소름끼치지 않는가? 이런 공포와 충격 역시 고통의 하나이므로 갓난아이나 중증장애인을 고통 없이 죽여도 된다는 생각은 윤리적으로 옳지 못하다.

그러나 동물의 경우에는 그런 불안과 공포를 느낄 수 없다. 도살장에 끌려 들어가는 소나 돼지는 죽음을 예측하고 공포에 빠질 수 있지만, 템플 그랜딘이 설계한 도축장에서라면 그럴 일이 없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그런 도축장을 찾기는 어렵다.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도축장이 곳곳에 있을 리 없기 때문에 동물을 도축장까지 보내는 운송 과정에서의 고통도 무시할 수 없다. 결국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고기는 그런 도축장 가까운 곳에서 행복하게 자라다가 행복하게 죽은 고기뿐이다. 그런 고기를 먹으려면 그 도축장 가까이 살거나, 아니면 고기를 멀리서 배달해 먹어야 한다. 당연히 비싼 고기 값을 치를 각오도 되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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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 최훈 저 | 사월의책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는 채식주의, 정확하게 말해서 채식의 윤리적 측면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고기를 먹지 않는 식습관, 즉 ‘채식’이 도대체 왜 윤리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을까? 현직 철학교수인 저자는 이 질문을 심각한 철학적 난제로 다루는 대신, 독자로 하여금 웃음을 참을 수 없게 하는 자신의 체험담에서 시작하여 채식의 윤리적 의미를 친절하게 이끌어낸다.

 



채식과 관련된 도서

[ 채식의 유혹 ]
[ 존 로빈스의 음식혁명 ]
[ 육식의 종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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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훈

강원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선임연구원, 세종대학교 초빙교수를 거쳐 호주 멜버른대학교, 캐나다 위니펙대학교, 미국 마이애미대학교에서 방문학자로 연구했다. 현재 강원대 인문사회과학대학 교양과정에서 가르치고 있다.
전공분야인 논리학, 과학철학, 윤리학 등 철학의 응용 분야에서 왕성한 연구 활동과 함께, 철학이 얼마나 재미있고 유익한 것인지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데 큰 관심을 가지고 대중적 눈높이에 맞는 철학서 집필에 꾸준히 힘쓰고 있다. 그런 결과물로 논리ㆍ논술 분야의 대표적 스테디셀러로 꼽히는 『논리는 나의 힘』(2003)을 비롯하여 『데카르트 & 버클리: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 『벤담 & 싱어: 매사에 공평하라』 『라플라스의 악마, 철학을 묻다』 『변호사 논증법』 『좋은 논증을 위한 오류 이론 연구』 등을 펴냈고, 청소년 교양도서로 『생각을 발견하는 토론학교, 철학』 『나는 합리적인 사람』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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