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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깊은 가을 밤, 잠을 자던 제자가 깨어나 갑자기 구슬프게 울기 시작했다. 스승은 그 모습을 보고 물었다.
“나쁜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는 게냐?”
제자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나지막이 말했다.
영화 <달콤한 인생>
“그 꿈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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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달콤한 인생>를 보면 마지막에 이런 독백이 나온다. 그날 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 장면이 떠올랐다. 기억이란 참으로 이상하다. 내가 모르는 강이 이리저리 흐르는 것 같다. 내가 기억을 하는 게 아니라, 그 강을 따라 나는 흘러갈 뿐이다.
그날 저녁, 전국에서 글을 쓰는 수십 명의 회원들이 모였다. 삼십 대부터 오십 대까지 다양했다. 네 시간 동안 회원들은 자신이 쓴 글을 돌아가면서 발표했다. 어떤 글은 지루했고, 어떤 글은 폭소를 터트리게 했으며, 어떤 글은 애매했다. 발표가 끝날 때까지 초대 받은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발표가 끝나고 진행을 맡은 회장이 내게 물었다. 수없이 많이 들은 질문이지만, 매번 당황하게 한다. ‘글을 잘 쓰고 싶다면?’이란 질문 한 가지에는 수많은 질문들이 복잡하게 담겨 있다. 어휘력을 키우는 법, 주제를 잡는 법, 독자를 정하는 법, 제목을 뽑는 법, 재미있게 만드는 법 그리고 그 무엇보다 중요한 독자에게 내 마음을 전달하는 법까지……. 기술적인 질문일 수도 있고, 정서적인 질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외로움이나 위로를 받고 싶다는 신호일 수도 있겠다. 당황했던 나는 그날 이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처음보다는 마지막 장면을 먼저 떠올리세요.”
“마지막 장면이라니요?”
“오늘 발표한 글을 보니까 첫 장면들은 대부분 멋지신데요. 마지막은 아무런 감흥 없이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던데요. 머리만 크고 꼬리는 작아서 마지막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어물쩍 끝내버리는 글이 많았어요.”
여기까지 말하자, 분위기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표정들이 심상치 않고 차가운 냉기마저 흘렀다. 너무 솔직했던 게 또 상처를 준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칭찬을 받고 싶다면 왜 나를 불렀을까? 나를 부른 이유는, 냉정한 평가를 받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나는 보다 자세히 내 의견을 전달하기로 마음먹었다.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하나로 연결이 되지 않으면 좋은 글이 나올 수가 없어요. 첫 장면을 쓰고, 두 번째, 세 번째 장면들을 써나갈 때 꼬이면서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지 않거나, 중간에서 막히는 경우가 있을 거예요. 이건 처음부터 스토리를 잡은 것입니다. 첫 단추를 잘 못 꿰면 두 번째, 세 번째 단추가 꿰어질 수는 있겠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어긋나고 말아요. 그러니까 중간에서 이건 아니다 싶으면 다 접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세요. 처음 쓸 때부터 마지막 장면과 하나로 연결을 지어야만 완성도 높은 스토리가 나옵니다.”
그리고 나는 음료수를 한 잔 마시고, 주변을 둘러봤다. 표정들이 심상치 않았다. ‘우리가 쓴 글을 다 접어야 한다는 소리야?’, ‘건방진 녀석!’, ‘네가 작가의 의도를 어떻게 알아…….’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의견에 질문하는 회원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모임은 싱겁게 끝났고, 나는 한 회원분의 차를 얻어 타고 지하철역까지 가게 됐다. 낡은 스틱 소형차를 그녀는 유연하게 운전했다. 문득 그녀가 물었다.
“저도 글을 잘 쓴다고 생각했어요. 학교 다닐 때부터 글도 많이 썼고요. 그런데 쓰면 쓸수록 모르겠어요.”
그리고 신호등 앞에서 그녀는 잠시 어느 길로 가야할지 살폈다. 그녀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저는 작가 되는 게 꿈인데요. 직장을 그만 두고 글만 쓰면서 살고 싶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갈등이 묻어났다. 두 갈래의 길에서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망설이는 상황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랬구나, 그녀는 여전히 꿈꾸고 있었구나.’
그녀는 나이가 마흔이 훌쩍 넘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꿈꾸고 있었다. 그 꿈이 그녀를 더욱 특별하게 보이게 했고, 더욱 아름답게 보이게 했다.
“그런데 서 작가님은 책을 250권이나 쓰셨다면서요? 어떻게 그렇게 많이 쓰신 거예요? 저는 한 권 쓰는 것도 소원인데!”
그녀는 꿈꾸는 소녀처럼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이름으로 나왔지만, 저 혼자만의 아니에요.”
내가 말했다.
“혼자 책이 아니라니요? 다 서 작가님이 쓴 거잖아요.”
“이런 말이 있어요.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냐고. 그 중 한 가지가, 아마추어는 혼자 일하고, 프로는 함께 일한다는 말이 있어요. 저는 책을 쓸 때 혼자 쓴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하는 고민을 편집자나 마케터나 디자이너와 함께 나누려고 해요. 편집자나 마케터나 디자이너의 고민을 저도 나누려고 하고요.”
“그래도 글 쓰는 게 두렵지 않으세요? 독자들이 평가하려고 심판하려고 하잖아요.”
“혼자 하는 일이 아닌데 뭐가 두렵고 힘들어요? 책은 혼자 만드는 게 아니에요. 작가 혼자 다 하겠다는 마음은 작가의 욕심일 뿐입니다. 자기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자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결과를 만들기도 하잖아요. 책을 만드는 편집자나 마케터나 디자이너 등은 작가와 함께 같은 배를 타고, 같은 목적지를 향해 노를 저어가는 동반자입니다. 그러니까 책을 완성할 때까지 충분하게 서로 얘기하고, 나누고, 다투고, 화해하는 게 좋아요. 그러면 어느새 서로 만족하는 결과물이 완성되고요. 그런 책이 독자도 만족시키더라고요.”
“그래서 제 이름으로 책이 나오지만, 저만의 책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거군요.”
그녀는 내 말에 시종일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나의 사소한 말에도 끊임없이 호응을 해주고, 감탄사를 넣어주고, 이해한다는 눈빛을 보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녀는 최소한 독자의 마음을 알아주고, 독자의 마음을 살펴주는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최소한, 내 글을 읽어줄 독자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 아닐까.
잃어버린 길을 몇 바퀴 돌아서야 간신히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오늘 좋은 말씀 많이 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글을 처음 쓸 때 마지막 장면을 먼저 완성하라는 말씀, 그것, 우리 인생 같아요. 내가 마지막에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떠날지 생각한다면 지금 이대로 살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 말이 제게 용기를 주네요.”
그녀가 떠나고 나는 지하철역으로 들어가지 않고 잠시 서서 밤하늘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영화 <달콤한 인생>의 첫 장면에는 이런 독백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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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을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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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내 인생의 마지막 장면은 어떤 모습일까? 나는 여전히 꿈을 이루지 못해 울고 있는 것일까?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바람도 아니고, 내 마음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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