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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범죄를 꾸민 여인, 사랑에 빠져 결국… - 봄에는 셜록을!
스마트폰으로 범인을 추적하는 새로운 탐정의 탄생 - <셜록>
“난 셜록 홈즈고 언제나 혼자 일해. 왜냐하면 내 지능을 따라올 수 있는 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으니까”
상암동으로 가는 지하철에 앉아 마이클 코넬리의 『시인』을 읽었다.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일산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는 스티븐 킹의 『미저리』를 읽었고, 일산에서 대구로 내려가는 KTX에서는 요네스 뵈의 『스노우 맨』을 읽었는데, 날씨가 너무 포근해서 여기저기 벚꽃이 만개한 걸 보고 그만 책장을 덮었다. 아무래도 얼음처럼 차가운 살인사건의 내막을 알기엔 날씨가 너무 포근해서였다. 대구 기차역에서 내려 ‘칠곡’으로 가는 버스 안에선 자주색과 흰색이 예쁘게 배열된 자목련을 봤다. 소설가 김훈은 목련이 지는 모습을 암 말기 환자의 투병기 같은 것으로 지독스리만치 적확히 묘사했는데, 질 때는 몰라도 피어 있을 때만큼은 목련은 정말 예쁘다.
최면술은 수사과정에서 상당히 자주 사용되는 방법입니다. 몇 년 전에 사건이 하나 있었어요. 레이첼이 말했다. 라스베이거스 나이트클럽에서 최면술 공연을 하는 남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은 아동성애자이기도 했죠. 그 남자는 시골 장터 같은 데서 공연을 할 때 아이들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어요. 오전에 어린이용 공연을 했거든요. 무대에서 그 남자가 어린이 지원자가 필요하다고 말하면, 부모들은 자기 아이를 거의 던지다시피 남자 앞에 내밀곤 했어요. 남자는 그 중에 한 명을 골라서 아이를 준비시켜야 하니까 잠시 무대 뒤로 가야 한다고 말했죠. 자기가 들어가 있는 동안 다른 공연이 진행될 거라면서요. 남자는 무대 뒤에서 아이에게 최면을 건 다음에 성폭행을 하고는 다시 최면술로 암시를 줘서 그 기억을 싹지워버렸어요. 그러고는 아이를 데리고 무대로 나와서 공연을 한 뒤 아이의 최면을 풀어줬죠. 그 남자가 강화약품으로 사용한 게 코데인이에요. 그걸 콜라에 타서 줬죠.
닥쳐! (셜록)
잘 하긴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야. 당신은 너무 열중했거든. 게임을 너무 정교하게 꾸민 나머지 자기 역할에 너무 빠져버렸어. (셜록)
홍매화, 청매화가 피고, 진달래가 만개하고, 개나리에 벚꽃까지 꽃이 피는 봄이 장르 소설을 읽기 좋은 계절은 아니다. 겨우 내 침울했던 바깥이 너무 찬란하기 때문에 책 사이의 핏빛 문장을 볼 겨를이 없다. 하지만 벚꽃이 만개하기 시작하는 봄날에 비 내리는 스산한 시애틀을 배경으로 한 영화 <만추>를 보고, 눈이 소복이 떨어지는 한 겨울에 햇볕이 고양이의 등처럼 스며드는 치앙마이를 배경으로 한 영화 <수영장>을 보곤 한다. 그래야 마음과 바깥의 풍경이 평평해지고 기울어지지 않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한 여름에 들어가면 차가운 기온 때문에 장갑을 끼여야 하는 ‘크리스마스 카페’ 같은 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긴 뜨거운 여름에 불현듯 정육점에 들러 양지고기를 잔뜩 사들고, 노란 달걀지단을 올린 떡국을 끓여 먹는 나를 어릴 적 친구들이 놀리곤 했었으니까. 나도 안다. 내가 꽤나 별스럽다는 것.
봄이 시체를 토막 내 버리는 <화차> 같은 영화를 보기엔 적당한 계절은 아니다. 단지 먹고 살기 위해 버리기 좋게 ‘시체 토막 내기’가 어느새 아르바이트가 되어 버린 기리노 나쓰오의 『아웃』같은 소설을 보기에도 너무 따뜻한 기운이 돌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랜만에 마이클 코넬리의 소설들을 읽었다.
『시인』을 읽다가 밀란 쿤데라가 『소설의 기술』에서 이야기한 소위 ‘잔디밭 효과’ 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를 테면 잔디를 심을 때, 자잘한 잔디 하나하나는 무의미해보일 수 있지만 그것이 군락을 이뤄 거대한 ‘잔디밭’을 이루었을 때, 엄청난 셔레이드 효과를 환기시킨다는 것이다. 한 그루의 나무가 완벽한 풍경 속으로 들어가 우뚝 돋보이기 위해서는 작고 사소한 잔디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미스터리 소설의 ‘반전’은 그 잔디밭 위에 서 있는 한 그루의 고혹한 나무 같은 것이다.
『시인』은 ‘나는 죽음담당이다’라는 첫 문장의 매혹적인 파괴력에 비해 다소 밋밋한 느낌을 줬다. 스릴러 마니아라면 ‘자살인 줄 알았으나, 실은 타살’이라는 장르적 공식에 익숙한 나머지, 자살로 판명 난 경찰관들을 찾아나서는 초반의 스토리가 그리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의 3/4지점에 들어서면 비로소 마이클 코넬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해지기 시작한다. 이야기의 밀도는 차츰 올라가고, 캐릭터가 가진 이중성은 그제야 빛을 발한다. 이때부터는 철저히 수학적, 심리적 계산에 의해 배분해 놓은 캐릭터들이 스스로 마법을 부리기 시작하는데, 이쯤 되면 책장이 줄어드는 게 조바심이 난다.
사악한 사람이 보면 알 될 것 같은 새로운 범행 수법에 대한 작가의 탐구는 『시인』에 독창성을 부여한다. 특히 “범인은 그녀를 죽인 뒤에도 할 말이 남아 있었던 것 같았다. 그는 허리쯤에서 시신을 둘로 잘라 하반신을 머리 위에 놓았다. 그것도 그녀가 혼자서 섹스를 하는 것 같은 끔찍한 포즈로” 같은 문장을 읽고 나면 진저리가 쳐지며 수원에서 일어난 토막 살인사건 같은 게 떠오르기도 한다.
사실 그녀가 범인인 줄 알았더니, 그녀 옆에 있던 평범한 ‘상관’이 범인이었다라는 식의 반전의 반전은 이제 미스터리 소설의 진부한 클리셰라 새롭진 않다. 그러나 이야기를 끝까지 밀어 붙이는 마이클 코넬리의 꼼꼼한 바느질 솜씨엔 과연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30년쯤 한복을 만든 장인의 바느질 솜씨를 기계적이고 규칙적인 브라더미싱의 재봉틀과 비유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아닌가. 특히 범인을 좇는 경찰관이 철저히 범인의 범행 뒤에 숨어 범인을 좇는다는 설정은 무척 재밌게 느껴진다. 자신의 범행을 지우는 방식이, 그 범행에 덧씌워지는 것도 흥미롭다. 자신의 범죄파일을 다른 이름으로 저장해 덮어씌워 일부러 삭제해 없애는 방식과 흡사하다.
최근 ‘물건이다’ 싶은 소설 중에 유독 캐릭터 장르물이 많은 건, 세계문학의 흐름인 듯 보인다. LA의 ‘반즈 앤 노블스’에서도, 바르셀로나의 ‘LIBRO'에서도 가장 크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미스터리, 스릴러 섹션이니까. 쫓는 자와 쫓기는 자 사이에 벌어지는 긴박감, 캐릭터와 캐릭터의 모서리가 끊임없이 부딪히며 만드는 스토리는 잘 짜여진 공식에 의해 움직이는 기존의 추리소설과는 확연한 변별점을 보여주며, 인간의 욕망과 욕망 사이에 낀 더러운 이물질들을 훨씬 더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장르소설들이 말하는 막장의 4종 세트인 ‘아동성폭행, 근친상간, 변태성욕자, 사이비 종교’는 인간의 어두운 심연을 내려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진흙탕’들이다.
놀랍게도 이것은 기념비적인 성공을 거둔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에 나오는 모든 코드를 아우르는 공통점이기도 하다. 인구 900만 밖에 되지 않는 스웨덴에서 300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 역시 동일한 코드를 적절히 사용했다. 그래서 하루키의 아오마메와 라르손의 살란데르, 각각 두 소설의 여자 캐릭터들에게서 유사한 패턴의 심리적 그림자를 찾아내는 일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남성과 여성 모두를 성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모호하고 강한 바이섹슈얼한 여전사의 이미지를 가진 캐릭터들은 앞으로 장르 소설에 훨씬 더 자주, 많이 등장하게 될 것 같다.
셜록 셜록
애거사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 시리즈를 읽던 초등학생 시절부터 나는 아주 오랫동안 탐정 소설을 쓰고 싶었다. 레이스로 예쁘게 뜬 손수건으로 살짝 입을 훔치고, 홍차를 홀짝 홀짝 마시면서 이웃집에서 일어난 엽기적인 살인사건을 잘도 파헤치는 이 할머니에게 홀딱 반해서 ‘할머니가 되면 반드시 탐정이 되고 말겠다’라고 생각하던 황당한 시절도 있었다. 게다가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텔레비전에서 ‘제시카의 추리극장’이 인기리에 방영되면서 내게 ‘탐정=할머니’라는 공식이 머리에 콕 와 박히게 됐다.
범인이 왼손잡이인지, 오른손잡이인지가 사건 해결에는 늘 중요하다. 햇볕이 어떤 방향으로 비추는 지 역시 중요하다는 것도, 거울의 상이 실은 ‘거꾸로’라는 사실 역시 중요한 키워드로 작용한다는 것도 나는 ‘미스 마플’ 여사나 ‘브라운 신부’에게서 배웠다. 도서관에서 셜록 홈즈 시리즈나 코난 도일의 책을 열심히 빌려보던 친구에게 내 결심을 얘기해주었더니, 친구는 내 손을 부여잡고 머리카락과 손톱 같은 것도 소중히 생각해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또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던 그 친구의 아버지는 신림동에서 치과를 개업한 ‘치과의사’였는데, 친구는 충치를 먹거나 부러진 이빨 역시 사건 해결에 중요한 열쇠라고 힘주어 말 했다. 그러면서 “영옥이 넌 늘 손톱을 물어뜯잖아! 특별한 습관은 범죄에 치명적이야.”라는 아이 같지 않은 말을 해서 날 무척 놀래 키기도 했다.
요즘 흥미를 가지고 보고 있는 건, 무엇보다
<셜록>이다. 새롭게 ‘셜록 홈즈’를 재해석한 BBC 드라마
<셜록>의 메인 작가가 ‘셜록’의 형으로 출연하는 ‘마이크로프 홈즈’ (영국 정부의 주요 요직을 맡고 있는 미스터리한 인물)라는 사실은 꽤 흥미롭다. 그가 이 드라마를 쓰기로 작정했던 것이 마돈나의 전 남편이기도 했던 ‘가이 리치’가 만든 영화 <셜록홈즈>를 보고 어마어마하게 분노했기 때문이라는 믿거나 말거나 한 사실. (이렇게 셜록 홈즈를 후지게 만들 수도 있다는 걸 알고 화를 냈다나 뭐라나!) 연기와 글 모두를 섭렵한 ‘마크 게티스’를 보고 있노라니, 나 같은 사람이 참 한심하게 느껴진다. 특히 그의 캐릭터를 묘사하기 위한 대사들의 배치를 보면 더더욱 그렇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왓슨)
생각하고 있었잖아. 짜증난다구! (셜록)
누군가 옆에서 생각하는 것마저 시끄럽다고 생각하는 남자라니! 차갑다 못해 정내미 뚝뚝 떨어지는 거만한 재수덩어리를 어찌나 매력적으로 그렸는지, 한 후배는 호감이 생기는 잘생긴 사람을 보면 가슴이 ‘셜록셜록’ 두근거린다는 신조어를 쓰기도 했다.
특히 시즌2에서 셜록과 마이크로프트가 “요즘은 지능이 섹시함의 정도죠!”라고 잘라 말하는 고급 창녀이자 스파이인 ‘아이런 애들러’의 함정에 빠져 꼼짝없이 어마어마한 돈과 보호를 요구 받았을 때, 셜록이 그녀의 계획이 틀어졌음을 추리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즐기는 데 지나친 건 없어요. (아이런 애들러)
쫓고 쫓기는 스릴을 만끽한다면야 상관없겠지. 게임의 재미를 탐닉하는 거야 이해하지만, 감상에 빠진다? 감상은 지는 쪽에서 발견되는 화학적 결함이야. (셜록)
감상? 무슨 소리 하는 거죠? (아이런 애들러)
당신! (셜록)
세상에! 이 불쌍한 남자 좀 봐. 설마 내가 진짜 당신한테 끌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왜요? 당신이 위대한 셜록 홈즈라서? 웃긴 모자를 쓴 똑똑한 탐정이라? (아이런 애들러)
아니. 내가 당신 맥박을 재봤거든. 정신없이 뛰던데. 동공은 확장됐고. 존 왓슨은 내가 사랑을 모르는 줄 알던데 화학반응이란 기막히게 간단하고 파괴적인 거야.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이 내게 그랬었지. 아무리 변장을 해도 결국 본바탕은 남아있다고. 당신 말이 옳아. 금고 비밀 번호는 당신 치수였지만, 이건 훨씬 더 사적이지. 이건 말하자면 당신 심장 같은 거야. 절대로 그게 머리를 지배하게 둬선 안 된다고. 아무 번호나 골랐으면 무사했을 텐데 결국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거야. 그렇지? 난 항상 사랑이 위험한 단점이라고 생각했는데 가장 큰 증거가 되어줘서 고맙군 ……이건 패배야. (셜록)
………(아이런 애들러)
I AM (S)(H)(E)(R) LOCKED
사랑에 빠진 여자가 쉽게 범하는 오류. 자신의 생명을 지켜줄 유일한 물건인 핸드폰의 비밀 번호를 사랑에 빠진 남자의 이름으로 걸어놓은 멍청한 짓은 이 시리즈의 화룡점정이다. “난 셜록 홈즈고 언제나 혼자 일해. 왜냐하면 내 지능을 따라올 수 있는 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으니까”라고 말하며 스마트폰으로 범인을 추적하는 새로운 탐정의 탄생. 순식간에 시즌1, 2의 모든 에피소드를 보고 난 후, 나는 상실감에 빠졌다. 언제까지 기다려 시즌 3를 볼 수 있단 말인가.
봄에 이런 저런 추리 소설을 읽다가, 문득 앞니가 유독 크고 튀어나와 삐삐 롱스타킹을 닮은 그 친구가 생각났다. 머리카락이 유독 까맣고 빳빳해서, 반 아이들은 그녀를 ‘까마귀’라고 놀렸지만 나는 지금도 가끔 그 친구가 뭘 하고 있는지 정말 궁금하다. 집안 대대로 이어졌다는 이빨 뽑는 가업을 이어 받아 치과 의사가 됐을까? 그녀는 환자의 이빨을 통해 무엇을 보고, 무엇을 알게 됐을까.
지금도 엉망진창으로 번역된 대실 해밋의 ‘몰타의 매’ (그때 ‘동서 미스터리 북스’의 단행본 제목은 ‘말타의 매’였다)를 읽으며 생전 처음 들어본 ‘몰타’라는 곳에 가볼 거라고 말하던 그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녀가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어쩐지 황야의 어느 거리를 ‘말 타’고 신나게 달리는 삐삐 롱스타킹이 떠올랐다. 당연히 그곳은 ‘몰타’가 아니라 ‘말타’다!
장편소설 『스타일』로 제4회 세계문학상 수상. 2008년에서 2009년에 걸쳐 YES블로그에 장편소설 『다이어트의 여왕』 연재, 일간지 연재칼럼을 모아 낸 에세이집 『마놀로 블라닉 신고 산책하기』, 단편집 『아주 보통의 연애』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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