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 놀이터

졸지에 인도네시아 국어 선생님이 된 한국인

원숭이띠 원숭이가 국어 선생님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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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좋아하지만, 이렇게 많은 아이와 놀아본 기억은 없다. 공황장애가 있지도 않은데 아이들에게 무엇을 줘야 할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다.

아이들을 좋아하지만, 이렇게 많은 아이와 놀아본 기억은 없다. 공황장애가 있지도 않은데 아이들에게 무엇을 줘야 할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다. 탐색전! 대여섯 살, 많아야 예닐곱 살 또래 꼬마들은 허락 없이 들어왔다는 사실에 조심스럽게 앉아서 원숭이띠 원숭이의 눈치를 살피며 집 안 구석구석을 훑기 시작한다. 거실에는 흰 타일 바닥 위에 앉은뱅이 탁자와 긴 소파가 있을 뿐,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엉덩이를 주춤주춤 떼고 움직이는 녀석이 나타났다. 서재로 들어갈 기세다. 내 책을 남이 건드리는 것을 싫어하는 터라, 손가락을 들어 주의 신호를 던진다. 녀석은 서재에 눈길만 주고 다시 자리에 앉는다. 어색한 침묵이 흐를 때, 허리가 90도로 굽은 집주인 할머니가 한 손은 등짐지고, 다른 한 손에는 뭔가를 들고 들어오신다.

“아이들 간식거리요.”
“아, 예, 고맙습니다.”


역시 삶에서 나오는 지혜란 이런 거다. 먹을 것이 있으면 어색한 분위기도 쉽게 풀린다. 할머니가 들고 온 간식거리는 콩을 발효시킨 템페(Tempe) 볶음이다. 아이들은 접시에 놓인 템페를 하나씩 들고 오물오물 씹어 먹는다.

먹어본 경험에 의하면 아이들 입에 맞지 않을 성 싶은데, 꼬마들은 방금 볶아온 템페를 과자 먹듯 신났다. 간식거리가 생기면서 양측의 긴장이 풀렸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서재를 둘러본 한 녀석이 책이 왜 이렇게 많으냐고 묻고, 인도네시아 책도 있느냐고 묻는다. ‘책이 많다고? 책장에 꽂힌 책 다 해봐야 50권도 채 안 될 텐데, 너는 그게 많다고 보니?’ 속으로 물어본다. 하긴 동네에서 놀러 다니면서 책장에 책이 꽂혀 있는 집을 본 적이 없다. 아이들은 궁금한 게 한둘이 아니다.


“인도네시아 글, 쓸 줄 알아요? 읽을 줄 알아요?”
“응, 당연하지. 왜?”
“…….”
“넌 읽을 줄 알아?”
“…….”
“내가 가르쳐줄까?”
“네~”


인도네시아 글자를 가르쳐줄까 하는 질문에 갑자기 아이들이 입을 모았다. 유치원에 다닐 나이의 아이들인데, 아직 글을 읽을 줄 모른단다. 졸지에 선생이 되게 생겼다. ‘외국인 국어 선생님!’, 그렇게 시작되었다. 사람을 가르치는 원숭이 선생님 댁은 유치원이 되어, 날마다 학생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칠판이 없어서 방문에 도화지를 붙여놓고 큼지막하게 A, B, C를 쓴다. 아이들에게 “A는 ‘아’라고 읽어. Ayah(아야), 아빠, Anak(아낙), 아이에 나오는 글자야.”라고 말해준다. 혼자서는 목소리가 기어드는 아이들이 여럿이 함께 글자를 읽어보라 하자, 목에 힘줄이 돋게 빽빽 소리를 지른다. 거실 바닥에 앉은 꼬마들에게 종이 한 장과 연필 한 자루씩을 주며 아빠와 아이 그림을 그리라고 해본다. 연필을 제대로 쥐어본 적이 없는지 손가락에 잔뜩 힘을 주어 연필심을 뚝뚝 부러뜨리는 아이들 곁에서, 연필을 깎아주며 그림을 어떻게 그리는지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아이들은 금세 흥밋거리가 바뀐다. 말을 배워야 할 처지에 오히려 가르치게 된 원숭이띠 원숭이에게 아이들은 노래를 가르쳐달라고 조르기도 한다. 그리고 종이 위에 연필을 어기적거리던 몇몇은 얼마 안 되어 화장실로, 부엌으로, 밖으로 자리를 떠버려 수업 분위기는 산만해진다. 그래도 남은 녀석들은 사뭇 진지하게 그림을 마저 그리고 흐뭇한 표정으로 자신의 작품을 감상한다. 돌아가는 아이들 손에 종이 그림을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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