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 놀이터

배우 김명민, 그에게 참 고맙습니다

<페이스메이커> 김명민 몸을 캔버스로 캐릭터를 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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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스탠딩 코미디가 유행하면서, 슬랩스틱 코미디를 ‘몸으로 웃기는’이라는 수식어로 폄하한 적이 있다. 때리고 넘어지는 과장된 동작들을 무시하는 발언 속에 그들이 간과했던 것은 그간의 선배들이 몸으로 웃기기 위해 흘려온 피와 땀과 눈물이었다.


한동안 스탠딩 코미디가 유행하면서, 슬랩스틱 코미디를 ‘몸으로 웃기는’이라는 수식어로 폄하한 적이 있다. 때리고 넘어지는 과장된 동작들을 무시하는 발언 속에 그들이 간과했던 것은 그간의 선배들이 몸으로 웃기기 위해 흘려온 피와 땀과 눈물이었다. 새로운 코미디언들이 말로 웃기기 위해 아이디어 회의를 거듭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그들은 몸이 움직이는 순간과 그 찰라, 액션과 리액션의 과학적이고 미학적인 표현을 위해 몸을 단련시켰을 것이다.

몸의 미학으로 슬픔까지 만들어낸 찰리 채플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우리는 ‘달인’과 ‘키스 앤 크라이’의 김병만을 통해서 노력하는 사람의 아름다운 몸을 발견하게 되었다. 짧은 시간 관객을 놀라게 하기 위해, 그 몇 백배는 더 되는 시간 동안 몸을 혹사시켜 이뤄낸 그 정교한 움직임을 발견하는 순간 우리는 감동을 느끼게 된다.


이와 달리 타고난 아름다운 몸을 수단으로 쉽게 살아가는 배우들도 있지만, 유난히 고단하게 연기를 하는 배우도 있다. 참 팔자려니 싶다가도, 천상 배우다 싶은 사람, 그들이 표현하는 연기, 그들의 달라진 몸은 일반인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이 묵직하고 긴 고통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내기 때문에 보는 이의 경탄을 자아낸다. <장화홍련>을 통해 우리는 긴 팔과 다리,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배우가 스스로의 신체를 하나의 기호로 만들어 내는 과정을 보면서 염정아를 새롭게 발견했다. 복서에서 스턴트우먼, 또 탁구선수로 변신하면서 스스로의 몸을 캐릭터에 맞추는 하지원의 연기는 늘 놀라움을 안겨주고, 전도연은 아직도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지만 온 몸 구석구석 잔 근육으로 가득하고, 중견 배우 안성기의 몸에는 숨겨진 식스 팩이 있고 여전히 아름다운 이미숙은 몸매관리를 위해 두 시간이 넘게 운동을 한다고 한다.

이렇게 배우의 몸이 하나의 기호가 되어 그들의 삶과 연기의 재료가 되기에 배우들은 화면에 드러나기 전, 언제나 자신의 몸을 다듬고 관리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들 중 몸의 변화를 통해 캐릭터를 체화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여배우가 하지원이라면, 남자배우 중에는 유독 김명민이 눈에 띈다. <내 사랑 내 곁에>라는 영화를 위해 52kg으로 감량했던 김명민의 앙상한 몸은 말 그대로 충격이었다. 김명민답다는 감탄을 쏟아내기 전부터 왠지 숙연해 진다. 그렇게 김명민은 스스로를, 배우라는 직업을 숭고하게 만들어낸다. 하지만, 멋진 몸을 만들기 위해 운동을 하는 배우들과 연기를 하기 위해 몸을 관리하는 배우들은 분명 다른 차원에서 얘기되어져야 할 것이다.


속아보고 싶은 2인자의 승리, <페이스메이커>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가난한 생활을 이어가지만 동생과 함께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온 주인공 주만호(김명민)는 마라톤 선수를 꿈꿨다. 하지만 부상으로 페이스메이커만 하게 된 만호. 동생 성호(최재웅)는 마라토너가 아닌 페이스메이커로 뛰는 형을 이해할 수 없고, 둘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소원해진다. 만호는 자신에게 찾아온 첫 번째 마라톤 완주라는 목표를 동생과 자기 자신을 위해 달리고 또 달린다. 어렴풋이 들었던 적은 있는데 별로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는 존재인 ‘페이스메이커’를 소재로 한 김달중 감독의 <페이스메이커>의 줄거리다.

영화는 팀 내 에이스가 편안한 상태로 레이스를 펼쳐 우승을 할 수 있게 30㎞ 동안 보조를 맞춰줘야 하는 마라톤의 페이스메이커의 드러나지 않았던 생활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실제로 페이스메이커들은 42.195㎞ 마라톤 경기에 30㎞ 밖에 뛰지 않는다고 해서 ‘삼발이’로 멸시를 당하기도 한단다. 1등의 승자를 만들기 위해 숨어있는 조력자를 무시하는 풍토로 가득하고 늘 1등만 해야 한다고 가르친 우리 사회의 모습을 투영해 보면 그들의 삶은 얼마나 퍽퍽했을까?

영화에는 박태환과 김연아처럼 늘 우승하고 예쁜 선수들이 등장한다. 2012 런던올림픽의 유력 마라톤 우승후보인 민윤기(최태준 분)는 얼짱 스타다. 장대높이뛰기 선수 유지원(고아라 분)의 별명은 ‘미녀 새’다. 이들은 CF모델로도 잘 나간다. 하지만, 민윤기는 쉽게 흥분 잘하고, 초반 레이스에서 들쭉날쭉한 문제점이 있다. 감독 박성일(안성기 분)은 민윤기의 단점을 보완하고자 페이스메이커로 주만호를 기용한다.


<페이스메이커>는 온전히 김명민이라는 배우의 가치에 기댄 영화다. 또한 <페이스메이커>는 어느 정도 결말이 예측 가능한 영화인 것도 사실이다. 불굴의 의지 속 인간승리라는 감동적인 드라마는 자칫 식상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극장>을 보는 것처럼 관객들이 캐릭터에 얼마나 동화가 되냐에 따라 영화적 감동은 배가 되기도 하고 실패할 수도 있다. 감독의 연출력, 영화의 완성도나 다른 배우들의 역할을 무시하는 얘기가 아니라, 김명민이 얼마나 달라진 몸으로 공감 가능한 캐릭터를 만들어내는가에 영화의 절반 이상이 기대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김명민이라는 배우는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영화 속 김명민은 그냥 보기에도 안쓰러워 보인다. 앙상하고 마른 그의 몸과 마라토너가 되기 위해 달리고 또 달려서 만들어진 그의 잔 근육들은 김명민의 몸을 빌려 새롭게 탄생한 캐릭터 ‘주만호’를 통해 살아 숨 쉰다. 김명민이라 감탄스럽고 김명민이라 보게 되는 영화에서 그는 사라지고 ‘주만호’만 남아있을 때 우리의 감동은 이미 시작된다. 김명민이라는 배우가 측은해 보일수록 영화가 강조하는 순수한 열정과 도전이 더욱 아름답게 보이기 때문이다. 동생을 위해 달리기를 하는 테마는 이란 영화 ‘천국의 아이들’에서 이미 한 번 사용한 테마이기도 하다. 감동을 위해 과장된 극적 결말로 치닫는 영화의 결말은 아쉽지만, 언제나처럼 김명민은 영화의 부족한 그 퍼센티지 이상을 채우고도 남는 연기를 보여준다. 김명민 덕분에 늘 그가 출연한 영화는 볼만한 영화가 된다.


기대보다 한 뼘 더…….

<소름>

1996년 SBS 공채를 통해 데뷔한 김명민은 여러 드라마에 출연했지만, 대중들은 그의 존재를 몰랐다. 그런 그에게 찾아온 첫 번째 기회는 2001년 윤종찬 감독의 영화 <소름>이었다. 우리는 <소름>을 통해 두 명의 값진 배우를 발견하게 되는데 다른 한 명이 고 장진영이었다. 긴 머리를 나풀대는 이통통신사 광고 등을 통해서 얼굴을 알리고, 촉망받는 연기자였지만, 대표작이 없었던 장진영과 대중들에게 전혀 인지되지 못한 김명민은 역시 늦은 나이에 데뷔한 윤종찬 감독과 만나 배우로서의 전환기를 맞이했다. 치열하게 배우로서의 존재감이 필요했던 장진영과 김명민은 영화에서 충돌하고 격렬하게 싸운다. 공포 영화 장르의 외피를 입었지만 충격적인 어떤 장면도 없이 느리고 끈질기게 이어지는 이야기는 낡은 아파트처럼 차곡차곡 쌓인다.

<소름>은 무겁고 치열한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과 지겨운 삶의 무게가 공포로 다가오게 만드는 인상적인 데뷔작이었다. 우연과 운명 사이에서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는 진정한 삶의 우울은 두 배우를 통해 완벽하게 재현된다. 모호한 불안, 다양한 해석이 가능했던 영화는 대중들 보다 평론가들에게 먼저 발견되었고, 극찬과 관심은 장진영에게 쏟아졌다. 그녀가 <싱글즈> 등의 작품을 통해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동안에도 김명민은 연기 잘하는 인상적인 배우의 타이틀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소름>을 통해 김명민이 얻은 것은 있다. 많은 대중과의 소통을 얻지 못했지만, 믿을 수 있는 배우라는 인지를 얻었고 계속해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기회는 이어졌다. 드라마 대신 몇 편의 영화를 통해 김명민은 계속 도전했다. 강인한 인상과 선 굵은 연기는 금방이라도 펑 터질 듯 농익었지만 <소름>이 열어준 가능성은 그저 열린 채로 길을 터 주진 못했다. 김명민은 영화와 잘 어울리는 배우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김명민을 새롭게 발견하고 대중과 소통하는 길을 열어준 것은 드라마였다.

<불멸의 이순신>, <베토벤 바이러스>

노희경의 <꽃보다 아름다워>에서 김명민은 강인해 보이지만, 우울하고 섬세한 연기를 통해 대중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기회를 잡았다. 그리고 김명민에게 인생 최대의 기회가 주어졌다. <불멸의 이순신>의 주인공을 맡은 것이다. 본인도 놀라고 언론도 놀랐던 이슈가 되었다. 위험해 보이던 선택은 결과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연기자로서 묵직한 입지를 얻기까지 쌓이고 쌓였던 내공은 <불멸의 이순신>을 만나 비로소 폭발했다. 대하사극의 주인공을 맡기에 그의 인지도는 떨어졌지만, 고된 수련을 통해 단련된 그의 연기에 대한 믿음은 단단한 것이기에 KBS의 모험은 드라마도 살리고, 자칫 기회를 잃을 뻔 했던 훌륭한 배우 김명민도 살렸다.

<하얀 거탑>은 일본의 동명 인기 드라마를 리메이크한 작품인데, 이 작품을 통해서 김명민은 단순한 악역이 아니라 난폭한 현실의 이면에 켜켜이 쌓아둘 수밖에 없었던 의사로서의 소명과 의지, 상처를 입체적으로 보여주었다.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과장되었지만 거부감이 없는 그의 연기는 김명민이 얼마나 치열하게 캐릭터에 빠져들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마치 머리카락 한 올까지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 그의 포즈와 표정과 인상적인 목소리는 감탄할 새도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앉아있는 자세, 걸어갈 때의 포즈, 숨을 쉬는 순간에도 인간 김명민의 흔적조차 지우면서 그는 강마에 자체가 되었다. 김명민은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단순한 연기의 기교를 거둬내고, 캐릭터의 본질에 다가갔다. 그리고 배우 김명민에 대한 믿음은 깊은 뿌리를 내렸다.

<무방비도시>

<조선명탐정 : 각시투구꽃의 비밀>

영화에서는 조금 사정이 달랐다. <리턴>도 <무방비도시>도 김명민이 가진 배우로서의 믿음을 넘어서는 흥행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후 <내 사랑 내 곁에>와 <파괴된 사나이> 역시 김명민의 몸은 수난을 당했지만, 아쉽게도 그 노력의 시간이 갈채로 보상받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작품 선정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명탐정 : 각시투구꽃의 비밀>의 성공으로 영화계에서도 믿을 만한 흥행배우가 된 김명민은 언제나 히든카드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어느 누구도 배우로서 의심하지 않는 김명민, 사람들에게 그 믿음의 씨앗을 뿌려둔 김명민의 저력이다. 어느 순간에도 무너지지 않으리란 걸 안다. 믿는다. 흔들림이 없다. 언제나처럼 김명민의 행보는 단단하고 곧고 강직하다. 살아있는 인간으로 미덥게 보여주는 그의 연기는 샛길도 곡선도 없이 쭉 일직선으로 뻗어있다. 사람들이 배우 김명민에게 바라는 기대치보다 한 뼘은 더 새로운 것을 얹어 감당하는 김명민의 연기는 굳은 신뢰에 그치지 않고 대중의 갈채와 함께 보상될 것이다. 영화 속에 ‘김명민’은 없지만, 우리에겐 배우 김명민이 있다. 참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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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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