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는 각본 없는 드라마라는 얘기가 있다. 아무리 연습을 해도 실전에 나서는 순간, 돌발적인 상황은 늘 생기기 마련이다. 기대했던 이상의 결과로 웃음 짓는 선수도 있고, 예상치 못한 실수로 순간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흔히 우리는 인생역전을 얘기하면서 스포츠와 인생을 견주어 얘기하곤 한다. 우리는 짧지만 강렬한 스포츠의 순간들을 즐기고, 그 속에서 또 우리 인생을 얘기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스포츠는 영화로 만들기에 꽤 좋은 소재이고 우리는 종종 인생의 희로애락을 녹여낸 스포츠 영화가 주는 감동을 즐긴다. 수많은 스포츠 영화중에서도 가장 비율이 높은 것은 아무래도 야구이지 않을까 싶다. 긴 경기 시간 때문에 기복이 심한 축구와 달리, 야구는 1회 초, 1번 타자의 등장과 함께, 아니 오히려 관중이 가득 찬 경기장에 들어선 순간, 유명인이 애국가를 부르고 시국을 하는 그 순간부터 드라마가 되기 때문이 아닐까?
휴먼 다큐가 된 스포츠 영화, <머니볼>
브래드 피트의 내한(▶ 관련기사)으로 더욱 화제가 된 <머니볼>은 메이저리그에서 있었던 실화를 소재로 한 야구영화이다. 하지만 박진감 넘치는 흥미진진한 스포츠영화를 기대한다면 다소 실망할 수도 있다. <머니볼>은 인물을 중심으로 한 휴먼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이 말은 야구의 박진감 넘치는 형식이 아니라, 야구를 둘러싼 사람에게 카메라의 초점이 맞춰져있다는 것이다. <머니볼>의 주인공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선수단장이 된 빌리 빈을 주인공으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인간승리의 기적을 노래한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는 열악한 재정 탓에 메이저리그 만년 최하위 구단이라는 불명예를 껴안고 있다. 승부욕과 욕심은 크지만 훌륭한 선수는 경쟁 구단에 뺏기고, 구단주와 고집 센 감독과는 늘 부딪친다. 구단의 변화를 주장하던 빌리는 어느 날 경쟁구단에서 예일대 출신의 데이터 분석가 ‘피터 브랜드’(요나 힐)와 만나고 그를 구단 부단장으로 전격 스카우트한다. 그러나 구단 내 다른 조직원들은 그를 이방인 취급할 뿐이다. 빌리 빈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피터의 조언을 받아들여 형편없다고 평가받아온 선수들을 영입하며 구단을 개조해 나가기 시작한다. 2003년 출간된 마이클 루이스 작가의 동명소설을 옮긴 <머니볼>은 빌리 빈이라는 인물의 감동 스토리를 고스란히 스크린에 투영시킨다. 그는 유명한 선수 없이 구단을 5번이나 포스트 시즌에 진출시켰고, 140년 메이저 리그 역사상 처음으로 20연승이라는 대 기록을 일궈낸 실존 인물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영화는 야구를 소재로 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은 빌리 빈이라는 인물에 고정되어 있다. 박진감 넘치는 야구장면도 있지만, <머니볼>이 얘기하는 것은 미국 야구계에 혁신의 바람을 일으킨 빌리 빈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본 감동적인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따라서 스포츠 영화에 기대하는 박진감이나 긴장감이 덜하다는 단점은 이야기가 자연스럽고, 야구를 몰라도 자연스럽게 볼 수 있다는 장점이 될 수 있다. 과장하는 법도 없고, 감동을 강요하는 법도 없다. 그렇다고 <머니볼>이 지루한 영화는 아니다. 스포츠 영화치고는, 이라는 단서를 제외한다면 <머니볼>은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모범적인 상업영화의 틀을 갖추고 있다.
주인공 브래드 피트는 오랜 관록답게 거의 모든 장면에 등장하며, 확신에 찬 사람의 행동이 바로 저러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우리를 계속 설득하고 믿게 만든다. 여기에 베넷 밀러 감독과 <카포티>에서 인연을 맺었으며, 이름만으로도 믿음을 주는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도 딱 그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해낸다. 선수들의 타율, 출루율 등 수치와 통계를 야구에 접목시켜 승수를 쌓아가는 빌리의 전략은 극적인 재미를 선사한다. 하지만, 여전히 한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기적을 믿는 미국식 영웅주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빌리 빈이라는 영웅의 승승장구가 다소 꺼림칙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야구는 인생의 축소판, 국내외 야구영화들
<사랑을 위하여>
<내추럴>
1999년 샘 레이미 감독,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사랑을 위하여>는 한때 최고의 투수였지만, 이제 전성기가 지난 노장의 사랑과 야구를 말하는 영화다. 수많은 야구영화 중에서 이 영화를 우선 얘기하는 것은 우리가 야구영화 혹은 스포츠 영화에 바라는 모든 것이 이 영화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야구의 박진감과 노장의 삶, 그리고 야구를 통한 인생의 의미를 골고루 아우른다. 이미 담백한 미국 영웅의 얼굴로 자리 잡은 케빈 코스트너는 이 영화 이전에도 <꿈의 구장>, <19번째 남자> 등 야구선수 역할을 했었는데, 아마 가장 미국적인 영웅의 얼굴을 가진 그가 미국을 대표하는 스포츠인 야구와 가장 잘 어울린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사랑을 위하여> 이전, 1987년 가장 미국적인 영웅의 얼굴이었던 로버트 레드포드의 <내추럴>도 같은 맥락으로 읽힐 수 있는 영화였다. 천재적인 실력을 가진 시골소년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야구에 담아 그린 영화로, 킴 베이싱어와 글렌 클로즈 등 캐스팅도 화려한 영화였고 국내에서도 야구 붐과 함께 꽤 인기를 끌었다.
이외에도 야구를 소재로 한 여려 영화들이 있다. 1989년 톰 베린저의 <메이저리그>는 야구를 소재로 한 코미디 영화였고, 1992년 여성 야구단의 이야기를 그린 <그들만의 리그> 역시 색다른 관점에서 야구를 본 영화였다.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을 맡은 <꿈의 구장>은 야구를 통해 아버지와 화해하는 미국적인 판타지 영화였다. <꿈의 구장>은 야구에 대한 미국인의 애정과 역사를 모조리 담아낸 작품이라, 선뜻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외에도 야구선수 베이브 루스의 일대기를 그린 <베이브>, 섹스 코미디였던 케빈 코스트너, 수잔 새런든의 <19번째 남자>도 인기를 끌었던 작품 중 하나이다.
<내일은 야구왕>
< YMCA 야구단 >
우리나라에도 고교야구와 프로야구의 인기를 반영하듯 수많은 야구영화가 있었다. 프로야구가 시작되기 이전,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었던 고교야구를 배경으로 김기덕 감독(<악어> 김기덕 감독과 동명이인)이 1977년 신성일 주연의 <영광의 9회말>이란 작품을 만들었다. 이 당시 야구영화는 70년대 얄개 영화와 견줄 만큼의 인기를 끌었는데, 같은 해 <고교결전 자! 지금투어야>도 큰 인기를 끌었으며, 프로야구가 출범한 이후 만들어진 1982년 김정일 감독의 <내일은 야구왕>은 박철순, 윤동균, 김우열 등 OB 베어스의 에이스들이 총출동한 영화였다. 프로야구의 열기를 담아 만화계의 돌풍을 일으켰던 이현세 화백의 <공포의 외인구단>은 1986년 영화화되어 역시 큰 인기를 끌었다. 이장호 감독과 최재성, 이보희 주연으로 청순한 엄지 역할에 <어우동>의 이보희가 가당치 않다며 팬들이 제작사에 항의메일을 보내는 등, 캐스팅 논란이 일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이후 90년대 큰 인기를 끌지 못한 스포츠 영화는 로맨스 코미디로 탈바꿈하여 다시 찾아왔는데, 고소영, 임창정 주연의 1998년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이 그 작품이다. 스스로 야구 마니아임을 자처한 김현석은 이 작품의 각본을 썼는데, 야구를 통해 복고를 이야기 한 송강호, 김혜수의 2002년 에서는 감독을 맡아 야구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영화에 듬뿍 담아낸다. 의 묘미는 지금은 대스타가 된 김주혁, 황정민을 비롯하여 단역으로 조승우의 모습까지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김현석 감독의 야구에 대한 사랑은 임창정 주연의 <스카우트>까지 이어진다.
2004년 김종현 감독의 <슈퍼스타 감사용>은 프로야구에 대한 감독의 애정과 관심이 듬뿍 담긴 감동적인 영화였다. 이 영화는 화려한 야구스타의 이면에 가려졌던 수많은 무명 선수들을 끌어안고, 우리의 추억 속에 가려진 사람을 본다는 점에서 무척 의미 있는 작품이었다. 장진 감독의 <아는 여자>는 야구선수인 남자주인공 덕에 다양한 야구 장면을 볼 수 있는 영화였고, 청각장애인 야구단의 이야기를 다룬 강우석 감독의 감동실화 영화 <글러브>, 김선아와 김주혁 투톱을 내세운 <투혼> 등의 야구영화가 최근에 만날 수 있는 영화였다. 2009년 롯데 자이언츠의 선수를 다룬 다큐멘터리 <나는 갈매기>는 한국 야구사와 그 속의 야구선수를 심도 있게 다룬 감동적인 영화였다.
<루키>
야구영화를 얘기하면서 <루키>를 마지막으로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 영화가 걸작이라서가 아니라 야구영화 혹은 스포츠 영화에 바라는 우리의 기대가 이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2002년 존 리 핸콕 감독, 데니스 퀘이드 주연의 <루키>는 믿을 수 없는 실화이다. 군인인 아버지 때문에 여기저기 이사 다니면서 꿈을 포기한 채 학교 선생이 되고 만 주인공이 아이들에게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가르치다가 늦은 나이에 야구선수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는 메이저리거가 된다는 실화이다. 가장 미국적이면서도 가장 비현실적인 얘기 같지만 이 이야기는 실화였고, 여전히 꿈을 가진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는 영화로 꼽히고 있다. 영화 <루키>는 우리가 실제로 스포츠 영화에서 바라는 모든 것을 다룬 영화로 읽힌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아주 가끔 만나게 되는 탄성과 좌절의 순간이, 스포츠에서는 거의 매일, 매회 벌어진다. 인생처럼 스포츠 역시도 예측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예측대로 이뤄지는 법이 없다. 이렇게 스포츠는 인생과 세계를 담고, 우주의 법칙까지도 아우른다. 그리고 극적이고 치열하게, 지옥과 천국을 오가는 희열과 배신을 반복하면서 우리는 스포츠에 빠져든다. 우리가 스포츠 영화를, 야구영화를 보고 즐기고 그 속에서 인생을 보고 배우려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한 순간에 영원을 이야기할 수 있고, 역사적인 스포츠의 순간은 모르는 사람들을 하나로 엮으며, 회상에 젖게 되는 순간 우리를 타임머신에 탄 것처럼 과거의 그 열정적인 순간으로 우리를 다시 데려다 놓는다. 찰나의 순간에도 놓치지 않는 인생의 의미, 우리가 야구영화를 보면서 감동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서른둘 젊은 호스피스 간호사의 에세이. 환자들의 마지막 여정을 함께하며 겪고 느낀 경험을 전한다. 죽음을 앞둔 이들과 나눈 이야기는 지금 이순간 우리가 간직하고 살아야 할 마음은 무엇일지 되묻게 한다. 기꺼이 놓아주는 것의 의미, 사랑을 통해 생의 마지막을 돕는 진정한 치유의 기록을 담은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