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은 우리에게 자유의 소중함을 알게 해주는 광복절이 있는 달입니다. 우리 선조들의 피땀 어린 노력이 있었기에 이렇게 오늘도 다리 쭉 펴고 자유를 누리며 지낼 수 있는 것이겠죠. 오늘은 시대의 지성 밥 딜런이 1963년에 내놓은 앨범 < Freewheelin' >을 준비했습니다. 반전 음악의 표상이 된 노래 「Blowin' in the wind」가 수록되어 있는 작품입니다. 하루빨리 이 땅에서 모든 전쟁이 종식되기를 기원해봅니다.
밥 딜런(Bob Dylan) < Freewheelin' >(1963)
밥 딜런 이전에도 포크는 존재했고 사회 현실을 비판하는 저항음악은 있었다. 그러나 그는 포크에 활력과 중요성을 부여하여 60년대 초반 전면적인 포크 붐을 일으켰고 영미 대중음악에 저항정신을 일깨웠다. 포크는 물론 록 음악이 60년대 내내 저항적 메시지를 견지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의 덕분이다. 한 평론가는 “밥 딜런은 모든 대중음악의 저항성에 대한 채권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는 후대에 ‘거대한 짐머만의 지구촌’(밥 딜런의 본명이 로버트 짐머만)을 만들었다. 카에타노 벨로소는 브라질의 딜런이었으며 실비오 로드리게즈는 쿠바의 딜런, 이스마엘 로는 세네갈의 딜런, 빅터 가라는 칠레의 딜런, 도노반은 영국의 딜런, 김민기는 한국의 딜런이었다. 이 63년의 디스크는 이들 모두에게 “한 대의 통기타와 까칠까칠한 목소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쳤다. 밥 딜런이 이룩한 포크의 대중화 그리고 그가 전파한 프로테스트(저항) 정신이 이 음반으로 가능했다.
밥 딜런이 활약하던 시기의 미국은 하버드대학 출신의 젊고 의욕적인 대통령 케네디가 통치하던 시절이었다. 케네디의 뉴 프론티어와 그에 따른 민권운동 지원에 고무된 당시의 동부지역 대학생들은 인종평등과 반전(反戰)을 외치며 일제히 밥 딜런의 프로테스트 송을 경청했다. 그의 저항가요는 당시의 행동주의 포크 가수 필 오크스나 톰 팩스턴과 마찬가지로 방금 터진 사건과 같은 구체적 이슈를 노래에 담았다. 현실 그것도 당장의 현실이었다.
굽은 길을 지나 옥스포드 타운. 그는 문에 도착했으나 들어갈 수 없었지. 그의 피부색 때문이지. 친구여, 당신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나 「옥스포드 타운」(Oxford town) 이 곡은 62년 9월 옥스퍼드시의 미시시피대학에서 일어난 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다. 제임스 메레디스라는 이름의 흑인 공군 전역병이 이 대학에 입학 등록을 하자 보수적인 인종주의자들의 반발이 거세게 일었다. 양상은 놀랍게도 주(洲)방위군과 케네디가 보낸 국립경호대 간의 대결로 치달았다. 텔레비전 연설로 그 대학을 향해 인종분리를 중단하고 메레디스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한 케네디 대통령은 인종주의자들의 폭력으로 2명의 시위대가 사망하자 즉각 해병대를 파견해 메레디스를 보호했다.
62년과 63년 이러한 공민권 획득 운동이 미국 동부지역에 불길처럼 솟아올랐을 때 밥 딜런은 포크 음악으로 시대 정신을 이끌어나갔다. 그는 흑인 인권 운동 뿐 아니라 전쟁에 대한 반대라는 테마에도 집착했다.
영원히 폐기될 때까지 포탄은 얼마나 전쟁터를 날아야 하나. 주위를 외면키 위해 그는 얼마나 많이 고개를 돌려야 하나.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만이 알고 있지.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 in the wind)
이 노래는 전세계 대학가에 포크 음악 유행을 야기하며 반전가요의 표상이 됐으며 톤을 낮춰 상업화한 피터 폴 앤드 메리(Peter Paul & Mary)의 노래로 먼저 빅 히트, 작곡자인 딜런의 이름을 알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62년 10월에는 피그만사건에 의해 촉발된 쿠바 미사일 위기가 있었다. 미 공군에 의한 쿠바 피그만 공습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미국과 케네디의 위신은 크게 손상되었다. 당시 소련의 후르시초프 서기장은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해 무력을 강화하려고 했고 미국의 첩보 비행기가 그 증거를 포착하자 두 초강대국은 13일간 팽팽히 맞서면서 전면전의 위기에 봉착했다.
소련이 미사일 시설을 모스크바로 철수시키겠다고 한 발짝 물러섬에 따라 재앙은 비켜갔지만 이 사건이 전세계 사람들에게 미친 공포는 대단했다. 많은 이들이 3차대전이 아닌가하며 두려움에 떨었다. 「강한 비가 내리리」(A hard rain's a-gonna fall)는 미사일 위기가 초래한 공포를 노래한 곡이었다.
난 천둥소리를 들었어. 고함치며 그것은 경고를 던졌지. 세상을 덮어버릴 파도의 격랑을 들었어.시궁창에서 죽은 시인의 노래를 들었어. 미궁에 빠져 울고 있는 광대의 소리를 들었지.
물론 이 앨범의 수록곡들이 이 같은 리얼리즘과 프로테스트 계열의 곡으로만 채워진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애청되고 번안되기도 한 곡 「두번 생각하지마 괜찮아」(Don't think twice , it's all right)나 「북극에서 온 소녀」(Girl from the north)는 러브 발라드다. 이러한 곡들은 지나치게 참여적인 분위기로 흐르지 않게 앨범의 균형을 맞추는 효율성을 발휘하고 있다.
이 앨범은 록 쪽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 작품이다. 록의 명반선에 이 음반이 끼는 일은 없다. 통기타와 하모니카 그리고 딜런의 보컬만이 존재하는 ‘심심한’ 포크 음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운드의 부재에 고민하던 딜런은 곧바로 일렉트릭 기타를 잡고 록의 요소를 대폭 끌어들이게 된다. 이러한 ‘포크록’으로 변신하면서 그는 동시에 정치적 행동주의와 저항도 포기하고 내적(內的) 탐구에 몰입, 한층 포크 진영을 분노케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이미 많은 음악가들에게 청춘의 저항성을 심어주고 난 뒤였다. 사람들은 밥 딜런이 프로테스트와 절연한 후로도 오랫동안 그를 ‘저항의 기수’로 부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